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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먹는 순간, 낯선 이는 벗이 된다.

외교만찬의 역사

by 송지

음식은 가장 오래된 외교 도구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동료(Companion)'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다. 이 말은 '함께(com)'와 '빵(panis)'의 합성어다. 함께 빵을 나눈 사람, 그것이 동료의 본질이다. 인류는 태곳적부터 음식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 낯선 이를 벗으로, 적을 동맹으로 만들어왔다.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은 평화의 상징이었고, 음식을 나누지 않겠다는 것은 적대감의 표시였다. 연회에서의 음식은 대화를 뒷받침하는 도구였으며, 식사 자리는 대화의 기회였다.

제국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함께하는 식사'는 연회라는 형태로 진화했다. 최초의 연회는 신을 위한 제사였다가, 점차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연회로, 다시 왕의 연회로 변모했다. 손님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로 여겨졌으며, 이 환대를 받은 손님 역시 주인을 해치지 않을 의무를 졌다. 이는 부족과 국가 간의 적대 관계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대화의 장을 여는 중요한 사회적 장치였다. 이처럼 고대 연회의 핵심은 '환대의 법칙(Rule of Hospitality)'이었다.


고대 그리스: 심포시온의 탄생

고대 그리스에는 '심포시온(Symposion)'이라는 독특한 연회 문화가 있었다. 이는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었다. 도시 국가(폴리스) 간의 사절들이 모여 정치와 철학을 논하며 동맹을 굳건히 하는 중요한 외교 무대였다.


심포시온에서 심포지엄으로
현대의 '심포지엄(Symposium)'은 바로 이 심포시온에서 유래했다. 어원은 '함께(sym)' + '마시다(posis)'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함께 마시는 자리"를 의미한다. 저녁 식사 후 그리스 상류층 남성들이 모여 물에 희석한 포도주를 마시며 철학, 정치, 문학을 토론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이 지적 토론의 정신이 재발견되면서, 19세기 학문의 전문화와 함께 오늘날의 학술 회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로마 제국 역시 정복지의 지도자나 동맹국의 사절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어 제국의 부와 힘을 과시하고 복종과 충성을 유도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도 조약을 체결하거나 동맹을 맺을 때 신들 앞에서 함께 제물을 바치고 음식을 나누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신성한 맹세를 상징하며, 약속을 어길 시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는 강력한 구속력을 부여했다.


고대 중국: 만한전석과 황제의 권위

중국에서는 주나라 시대부터 제후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여는 것이 천자의 중요한 통치 행위였다. 이러한 전통의 정점은 청나라 시대의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 강희제가 66번째 생일에 만주족 관리와 한족 관리를 함께 초대해 3일 밤낮에 걸쳐 연회를 연 것이 시초다. 이는 '만주족과 한족은 하나'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만한전석은 최소 108가지, 많게는 300가지가 넘는 요리로 구성되었다. 제비집, 샥스핀, 곰 발바닥, 낙타 혹 등 온갖 귀한 재료가 총동원되었고, 금·은·옥으로 만든 최고급 식기가 사용되었다. 이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황제의 권위와 제국의 풍요로움을 과시하고 민족 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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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외교만찬의 확립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격식과 의전을 갖춘 외교 만찬의 직접적 기원은 17~18세기 유럽 궁정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은 유럽 외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열린 연회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식사 예절, 좌석 배치, 메뉴 순서 등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의 궁정 연회 문화는 곧 유럽 전역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각국의 사절들은 이 연회에 참석하여 자국의 위상을 드러내고 복잡한 외교적 탐색전을 벌였다.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 개념과 상설 외교 공관이 생겨나면서, 외교 만찬은 점차 공식적인 외교 활동의 일부로 제도화되었다. 좌석 배치는 국가 간의 서열과 관계를 반영하는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가 되었고, 만찬에서의 대화는 공식 회담 못지않은 중요한 외교 채널로 기능했다. 다자회의 기념사진에서 주최국 정상이 정중앙에 위치하는 것, 주최자의 오른쪽 자리가 최고 상석인 것, 우호적 관계일 때 소파에 나란히 앉고 긴장 관계일 때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는 것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확립된 외교 언어다.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은 유럽의 군주국들과 동등한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백악관에서의 국빈 만찬(State Dinner)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프랑스 대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식 만찬 예법을 도입하여 미국식 외교 만찬의 기틀을 마련했다.


역사를 바꾼 세 번의 만찬


1. 1814년 빈 회의: 탈레랑의 미식 외교

폐하, 제게는 서면 지시사항보다 소스팬(냄비)이 더 필요합니다.


나폴레옹 패망 후 열린 빈 회의는 패전국 프랑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승전국인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주도하는 자리에서 프랑스는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영토 축소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라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외무상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은 독특한 전략을 선택했다. 공식 회의 석상에서는 승전국들의 논리에 밀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비공식적인 사교 무대, 즉 화려한 만찬과 연회에 주목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요리사 앙토냉 카렘을 대동하고 연일 최고급 만찬을 열었다.

부드럽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최고급 샴페인과 와인, 정찬 요리를 즐기는 동안,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은 자연스럽게 누그러졌다. 탈레랑은 프랑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나폴레옹 개인과 프랑스 혁명의 과격파에게 돌리는 여론을 형성했다. 그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한 프랑스는 나폴레옹 체제와는 다르며, 유럽의 안정과 세력 균형을 위해 프랑스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이 만찬에서 선보인 '브리 드 모' 치즈는 만장일치로 '치즈의 왕'으로 등극하며 프랑스 식문화의 위상을 과시했다. 유명한 와인 대결 일화도 있다. 각국 외교관들이 자국 와인이 최고라고 논쟁을 벌이자, 탈레랑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제안했다. 이 대결에서 프랑스 와인이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만찬의 시작과 끝에는 어김없이 세계 최초의 샴페인 하우스인 '루이나(Ruinart)' 샴페인이 등장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탈레랑은 승전 4개국 사이에 존재하던 미묘한 갈등과 이해관계를 파고들어 프랑스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패전국이었던 프랑스는 과도한 처벌을 피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좋은 요리사를 달라, 그러면 좋은 조약을 가져와겠다"던 그의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나아가 프랑스 미식 외교의 힘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으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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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 1972년 닉슨 방중: 젓가락으로 녹인 죽의 장막

20년 넘게 단절되었던 미중 관계의 물꼬를 튼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에서 가장 중요했던 협상은 회담장이 아닌 만찬 테이블에서 이루어졌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준비한 만찬은 고도로 계산된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

만찬 메뉴는 마오쩌둥이 제시한 '사채일탕(四菜一湯)' 원칙에 따라 비교적 검소하게 구성되었다. 제비집이나 곰 발바닥 같은 초호화 요리가 배제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 혁명 정신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는 사치로 상대를 압도할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물론 사용된 죽순 같은 식재료는 '정치 임무'로 각지에서 공수된 최고급품이었다.


마오타이주: 혁명의 상징
저우언라이는 환영주로 서구 외교의 상징인 샴페인 대신 '마오타이'를 내놓았다. 구이저우성 마오타이진에서 생산되는 이 술은 고대 한나라 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시기 홍군 병사들의 상처를 소독하는 데 쓰이면서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역사 위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자"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이 외교극의 하이라이트는 닉슨의 젓가락질이었다.


위성을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이 장면의 파급력은 중국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중공(Red China)'은 이념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붉은 악마'였다. 하지만 그들은 TV 화면을 통해 자신들의 대통령이 서툰 손짓으로 젓가락을 사용하고, 맞은편의 저우언라이가 온화한 미소로 이를 지켜보는 인간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이 순간, 이념의 구호는 사라졌다.


베이징덕: 키신저를 사로잡은 외교 무기
만찬 메뉴에 포함된 베이징덕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었다. 1971년 7월 닉슨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극비리에 베이징을 찾았던 헨리 키신저가 1864년 창업한 '전취덕(全聚德)'의 베이징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요리사가 눈앞에서 오리를 얇게 저며주고, 손님들이 각자 전병에 파, 오이, 소스를 얹어 싸 먹는 이 참여적 경험은 서먹한 분위기를 깨는 탁월한 '아이스 브레이커'였다. 베이징덕의 바삭한 껍질은 '괘로(掛爐)' 방식의 결과물이다. 오리를 갈고리에 걸어 화덕에서 직접 구우면 지방이 아래로 떨어지며 껍질이 종이처럼 얇고 바삭해진다.


중국은 만찬 내내 외교적 유연성을 과시했다. 미국 측이 답례 연회에서 샥스핀 요리를 빼달라고 요청하자, 중국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식문화를 고집하는 경직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는 유연하고 합리적인 파트너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미국 내 차이나타운은 월스트리트 직장인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뉴욕의 레스토랑에서는 '닉슨 만찬 코스'가 등장할 정도로 중국 음식이 인기를 끌었다. 1972년의 만찬은 중국이 음식을 통해 자국의 문화적 매력을 '소프트파워'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전 세계에 증명한 첫 번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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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2년 힐러리 클린턴: 아메리칸 셰프 군단


음식은 가장 오래된 외교 도구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경계를 허물고 다리를 놓도록 도울 수 있다.


2012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이렇게 선언하며 '아메리칸 셰프 군단(American Chef Corps)' 프로그램을 창설했다. 이는 미국의 정상급 셰프들을 '국가대표 식문화 외교관'으로 임명하여, 전 세계에 미국의 식문화를 알리고 문화적 유대를 강화하려는 적극적인 공공외교 전략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클린턴의 '스마트 파워(Smart Power)' 외교 전략을 직접적으로 적용한 사례다. 외교적 요리 파트너십(Diplomatic Culinary Partnership)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권위 있는 제임스 비어드 재단(James Beard Foundation)과 협력하여 출범했다. 호세 안드레스, 릭 베이리스, 메리 수 밀리켄, 마사하루 모리모토 등 80명 이상의 최고 셰프들이 참여했다.

셰프 군단의 역할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것을 넘어섰다. 그들은 외국 정상 및 고위 인사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며 미국 요리의 다양성과 우수성을 선보였고, 전 세계 미국 대사관 및 영사관을 방문하여 교육 및 문화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들 셰프는 '요리 대사'로서 음식을 만국 공통어처럼 사용하여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했다. 이 프로그램은 외교 행사에서 전통적으로 프랑스식 케이터링에 의존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더욱 개인적이고 문화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접근법을 채택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공식적으로는 중단되었지만, '음식을 통한 외교'라는 개념은 오늘날 외교 무대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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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만찬의 현대적 의미

외교만찬의 역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다. 정신은 고대에서, 형식은 프랑스에서 왔다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환대의 법칙, "함께 먹는 순간, 낯선 이는 벗이 된다"는 믿음, 그리스의 심포시온에서 로마 제국의 연회, 중국 만한전석에 이르기까지, 음식을 나누며 신뢰를 쌓고 동맹을 맺는다는 외교만찬의 정신적 뿌리는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정교한 좌석 배치, 메뉴 순서, 식사 예절 등 외교만찬의 형식적 틀은 17~18세기 프랑스 베르사유 궁정 문화에서 확립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가 만든 이 외교 연회의 표준은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근대 국제 관계 수립과 함께 공식적인 외교 의전으로 제도화되었다.

고대의 정신과 프랑스의 형식이 결합하여 탄생한 현대 외교만찬은, 수천 년을 거쳐 가장 세련된 소프트파워의 도구로 진화했다. 탈레랑의 냄비는 10만 대군보다 강했고, 닉슨의 서툰 젓가락질은 20년 넘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셰프 군단은 음식외교를 공식적인 국가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함께 먹는 순간, 낯선 이는 벗이 된다는 고대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식탁 위에서는 국가의 크기도, 군사력의 강약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진심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얼마나 세련되게 자국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느냐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외교만찬의 힘이다.


이범준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 호텔조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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