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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국물의 시원함을 아는 그대

우리는 국물민족

by 송지

"국은 밥 다음이요, 반찬에 으뜸이라. 국이 없으면 얼굴에 눈이 없는 것 같은 고로 온갖 잔치에든지 신도(제사)에든지 국이 없으면 못 쓰나니."

1924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한 구절이다.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국이 없으면 밥을 잘 먹지 못하던 우리 조상의 식습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 한국인의 밥상 중심에 서다

한국 전통 밥상에서 국이 없으면 제대로 된 밥상이 아니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밥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많은 경우 국과 찌개가 함께 놓이지만,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둘 다 없을 경우에는 누룽지 끓인 숭늉이라도 놓았다.

1280년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원나라에는 "고려사람은 흰쌀밥에 국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정보가 퍼져 있었다. 한국인의 국 사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옛 한국인의 부엌 중심에는 아궁이가 있었다. 그 아궁이에서 가마솥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물을 데웠다. 한국의 난방 방식은 온돌이 기본이었기에, 언제나 부엌 아궁이의 가마솥에 물을 끓였고 끓인 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자연스럽게 뜨거운 물을 이용해 다양한 국과 국물을 만들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가정의 제사를 주자의 『가례』 절차에 따라 실천하려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밥과 함께 국(탕)이 상차림의 기본 음식이 되었다.
제례에 쓰거나 제물로 바치는 국은 귀한 것이었다.
이것이 국이 널리 퍼진 이유 중 하나다.


국물 문화, 얼마나 오래되었나

기원전 4~3세기에 이미 국에 대한 얘기가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옛날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자세하게 국 종류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채소를 주재료로 끓인 국은 '갱', 고기를 주재료로 끓인 국은 '확'(곰탕), 곡식을 넣은 국은 '찬'(국밥), 물에 곡식을 말아서 먹는 국물음식은 '손'이라 불렀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국물 음식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18~19세기 조선시대 왕이 궁중에서 먹는 국 종류만 64가지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국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는 국을 "고기, 생선, 채소 등에 물을 많이 붓고 간을 맞추어 끓인 음식"으로 정의하고, 탕은 "건더기가 많고 국물이 적은 국"으로 정의한다. 오래 끓여 진하게 국물을 우려낸 것이 탕이다.


한국의 국물 문화, 무엇이 다른가

끓이고 찌는 것은 동양 조리법의 기본이다. 중국은 '일탕삼채(한 가지 국물 요리와 세 가지 음식)'를 잔칫상의 기본으로 여긴다. 일본은 '일즙삼채(일본식 된장국과 세 가지 반찬)'가 기본이다. 일본인은 가정에서 식사할 때 꼭 미소시루를 먼저 먹고 밥을 먹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의 탕이나 일본의 시루는 밥과 별개이거나 종속적이다. 서양의 수프 역시 하나의 요리일 뿐이다. 먹어도 그만, 먹지 않아도 상관없다.


반면 한국의 밥과 국은 서로 하나 되는 융합의 관계다.
한국인은 국 없이는 식사를 못 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을 정도로
밥과 국이 일체감을 이룬다.


한국인의 국물 사랑은 전골에서도 드러난다. 전통 전골은 고기와 채소를 끓이면서 거기에서 나온 진국을 즐기는 국물 요리다. 일본의 스키야키, 샤부샤부, 중국의 훠궈와 비슷해 보이지만, 한국 전골은 고기, 채소와 뜨거운 국물을 함께 먹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중국 훠궈는 국물을 먹지 않고 재료를 데쳐 먹는 것이 포인트다. 흥미롭게도 중국 훠궈와 마라탕이 한국으로 건너와 국물까지 함께 먹는 요리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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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국물을 좋아하는가

국물요리는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산처럼 높게 쌓아 고봉밥으로 먹었다. 현재 밥그릇의 크기는 350g 정도지만, 조선시대에는 690g, 고려시대에는 1,040g, 고구려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

임진왜란 때 기록한 『쇄미록』에는 "조선의 일반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혀 있다. 현재 1공기의 2배 양이다. 고려 초 이후 보통 사람들은 하루 2끼, 귀족 등 부유층은 하루 3끼를 먹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을 여행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대식습관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한 글을 남겼을 정도다.

1960년대만 해도 일반인의 밥그릇은 650cc가 넘었고, 밥그릇에 넘치게 고봉밥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질적으로 밥의 양이 지금의 2.5배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양의 밥을 먹으려면 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국이 있어야 밥을 쉽게 삼킬 수 있었다. 햄버거와 탄산음료가 동반 식품이듯 밥과 국은 일종의 동반 식품이다.

국은 육류, 어패류, 채소류, 해조류 등 거의 모든 식재료를 사용해 탄수화물 밥의 영양을 보충하고 영양소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옛날 쌀은 영양가가 최고로 높은 곡식이었다. 쌀밥을 임금이 먹는 보석같은 음식이라는 뜻에서 '옥식'이라 불렀다. 조선은 특히 18세기 무렵 벼농사 기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고, 쌀이 풍부했다. 한국인이 국에 가장 많이 넣는 재료는 무, 배추, 파, 고추, 버섯, 쑥, 냉이, 시금치, 쇠고기 등이다.


서양의 국물 요리는 따로 스톡을 만들어 건지를 적게 쓰지만,
한식 국물 요리는 국물을 내려고 고기나 멸치, 생선 등의 건지를 풍성하게 넣고
이를 건져 내지 않고 그대로 먹는다.


기후적 요인도 한몫했다. 한국의 기후는 겨울이 춥고 길고 건조하며 여름은 짧고 습하다. 식사할 때 뜨거운 국물을 먹으며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역시 국이 발달한 이유 중 하나다.


지역마다 꽃피운 국물 문화

이러한 우리민족의 국물 사랑은 지역별로 고유의 국물 요리를 발전시켰다. 그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메뉴는 설렁탕이다. 설렁탕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깊이 있는 음식이다. 소뼈, 도가니, 쇠고기 등을 큰 솥에 통째로 넣고 보통 한나절, 길게는 하루 이상 '푹' 고아야 한다.

부산의 돼지국밥은 돼지뼈로 우려낸 육수돼지고기 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음식이다. 전쟁 중 피란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 부속물로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부산 돼지국밥은 순살코기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뽀얀 국물을 내더라도 반드시 살코기가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1956년 개업한 범일동 할매국밥(60년전통 할매국밥)은 뼈를 거의 쓰지 않고 고기만으로 감칠맛 나게 끓여낸다. 나주국밥과 서울 장국밥과 같은 계열이다. 일 판매량 500인분에 50킬로그램의 고기를 사용한다. 맛의 비결은 갓 삶은 고기(하루 두 번 삶아냄), 나이 든 삼겹살과 어깨 쪽 앞다릿살(국물이 잘 나온다), 비계와 고기의 비율이다. 거기에 더해 전통 방식을 똑같이 계승하는 것이다. 어떤 맛이 입에 맞은 채 기억에 저장되면 사람들은 그 맛을 최고로 친다. 맛은 보수적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더 잘하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비결이다. 이 곳은 재료비에 투자하고(주인의 인건비와 자가 건물 임대료를 모두 재료비로), 휴무일은 년 4일(설과 추석)만 두어 손님에 대한 끝없는 존중을 보여준다.

나주 곰탕은 나주 오일장의 장터국밥에서 시작했다. 나주 곰탕의 유래는 몇가지가 된다. 첫째는 나주에 생긴 군납용 쇠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소 부산물이 쏟아져 나와 이를 곰탕으로 팔았다는 설이다. 둘째는 비옥한 나주평야와 우시장 발달로 나주곰탕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유래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지역 곰탕과 달리 좋은 고기를 삶아 만들어 국물이 맑은 것이 특징이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은 전주의 물이 좋아 콩나물이 맛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콩나물은 우리나라에서만 먹는 음식으로, 콩에는 없는 비타민 C와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밥과 국을 따로 담아내 국의 고유한 맛도 즐길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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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도, 저잣거리에서도

궁중잔치에서는 초대받은 손님과 참여한 종사자 모두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둔 상차림을 받았다. 왕과 왕족에게는 많은 가짓수의 음식을 높이 쌓은 고배상을, 손님에게는 사찬상을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종사자들에게는 간단한 국수상이나 국밥상, 술상을 단체로 먹도록 차렸다는 것이다. 궁궐에서도 국밥은 실용적인 한 끼 식사였다.


중국 『예기』는 국을 양, 밥을 음이라 칭했다.
음식의 기본 구조를 이 두 음식으로 본 것이다.


국밥은 가장 빠르게 완전식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탄수화물, 지방, 섬유질, 소금을 한 번에 섭취할 수 있다. 서양의 수프는 흔히 크림 형태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채소와 고기를 삶은 국물이 더 많다. 사람들은 여기에 빵을 뜯어 넣고 한끼를 때웠다. 보관해둔 딱딱해진 빵을 먹기 위해서는 뜨거운 수프나 물이 필요했다. 이 땅에서는 수프가 바로 국이고, 식은 빵 대신 식은 밥을 넣어 먹었다.


국밥, 노동의 음식에서 민족의 음식으로

삼국·고려시대에 곡식과 국물이 결합한 국밥의 원형적 음식이 등장했다. 이후 조선시대에 역참 조직에서 밥을 말아 먹었고, 임진왜란 이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시장이 번성하고 상인들의 잦은 이동으로 국밥도 성장했다.

조선은 제사가 많아 소를 자주 잡았다. 소는 경운기이므로 평소에는 도살을 억제했지만 명절에는 특별 허가를 내렸다. 쓰고 남은 내장과 뼈는 시장으로 갔다. 그리하여 설렁탕과 곰탕, 해장국이 성행하게 되었다.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1778)에서 조선에서 매일 소를 500마리 잡는다고 기록했다. 역축으로 요긴한 소를 그렇게나 많이 잡을 만큼 당시에도 소고기 사랑이 대단했고, 당연히 부산물이 많이 나와 탕 문화도 함께 성장했다.

19세기 말부터 국밥은 외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지금의 해장국, 순댓국, 육개장, 닭곰탕, 도가니탕, 콩나물국밥 등이 바로 밥과 국의 조합이 진화된 결과다. 근대에 이르러 노동자 계급이 본격 출현하고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국밥의 효용은 최대치가 됐다. 빨리 먹고 일하기에 국밥만 한 것이 없었다.

중국 기록을 보면 서기 500년경에 이미 국밥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은 현재 국밥 문화가 쇠퇴한 반면, 한국에서는 여전히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국밥의 특징은 밥과 국을 하나로 합쳐 간편하면서도 포만감이 큰 음식이라는 점이다. 지역과 계층별 다양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숙취 해소, 보양, 한 끼 식사 등 다목적으로 소비된다.


대표 국밥, 해장국


해장국은 우리 음식의 상징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음식이다.
원래 일꾼들의 노동 음식이었던 해장국은 소뼈와 내장을 넣어 끓인 것으로,
서울과 인천의 명물이 되었다.


인천이 개항한 후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소고기 수요가 생겼다. 특히 서양인들이 들어오면서 소고기를 납품했는데, 그들이 먹지 않는 뼈와 선지, 내장이 조선인들 몫으로 남았다. 인천에는 일제 때 미두취인소라는 쌀 선물 시장이 있었다. 선물 시장은 투기의 성격이 있어 술집과 색주가가 성업했고, 당연히 해장국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부두 노동자와 정미소 일꾼, 모주꾼들이 몰려 해장국집이 성업했다. 이것이 인천이 해장국의 명소가 된 이유다. 지금도 남아있는 인천의 평양옥이 그 역사를 증명한다.

서울의 '청진옥'도 본디 현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나무장에 몰리는 나무꾼이 주요 손님이었다. 시장에는 늘 나무장이 있었고, 억센 일꾼들이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국밥을 찾았다.

본디 해장이란 수분을 보충해야 가능하다. 유달리 술을 좋아하는 성정에 늘 상에 국물이 오르는 식습관이 더해져 해장국 문화가 발달했다. 자극적인 조미료 맛 대신 순하고 개운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해장국의 기본은 된장이다. 대량 생산 공장이 없던 시절, 해장국집에서는 동네를 돌면서 묵은 된장을 사들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병술집이 주막으로 변화하면서 식사 겸 안주가 되는 해장국을 판매했다. 이것이 음식점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해장국은 한국 외식 문화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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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흐르는 국물의 시간

역사는 흐른다. 청진동의 해장국이 서울의 대표음식이던 것도 이제 기억으로만 머문다. 아침밥을 국으로 뜨는 식습관도 많이 사라졌다. 시절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DNA 깊숙이 자리 잡은 국물 사랑은 여전하다. 지역별로 제각기의 재료와 조리법으로 만든 다양한 국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선지해장국, 뼈해장국, 강원도의 북어해장국과 황태해장국, 전주의 콩나물해장국, 경주의 묵해장국, 제주도의 몸국, 하동과 광양의 재첩국, 충청도의 올갱이국, 순대국, 내장탕, 육개장까지.

뜨거운 국물 한 그릇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서민의 애환이, 가족의 정이 담겨 있다. 국 없이는 밥상이 아니라던 선조들의 말은 단순한 음식 취향을 넘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국물 민족, 우리는 여전히 뜨거운 국물의 시원함을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고, 술 한잔 끝에 해장국 한 그릇으로 내일을 준비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삶이고, 우리의 문화다.


출처 : K-FOOD, 한식문화사전, 전통음식사전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 호텔조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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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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