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주 APEC 만찬
역사를 바꾼 만찬, 미래를 열 밥상
202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천년 고도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모이는 이 자리는 단순한 경제 회담을 넘어, 한국의 식문화를 세계 무대에 선보이는 중요한 기회다. 정상 만찬의 식탁은 과연 각국 정상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까? 그리고 20년 전 부산 APEC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외교만찬 전략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을까?
외식 및 식문화 전문가의 관점에서 볼 때, 경주 APEC 만찬은 한국 식문화 외교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05년 부산 APEC이 '한식의 소개'에 집중했다면, 2025년 경주는 '세계와의 공감'을 지향할 것으로 보인다. 이 변화의 배경과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해보고자 한다.
2005년 부산 APEC: '신토불이' 시대의 만찬
2005년은 한국에서 '한식 세계화' 구호가 본격화되던 시기다.
당시 만찬은 한식의 '원형'과 '정통성'을 세계에 알리는
'쇼케이스' 역할에 집중했다.
만찬의 콘셉트는 "약이 되는 아름다운 한국음식"이었다. 메뉴는 궁중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식 풀코스로, 신선로와 너비아니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메뉴는 100% 국내산 재료로 지역성·계절감·전통성을 강조했다.
메뉴 총괄은 한영실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가 맡았다. 식품영양학 전문가가 총괄했다는 사실은 당시 만찬이 한식의 '영양학적 우수성'과 '건강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국내 유명 셰프들과 호텔 요리사 등 150여 명이 조리에 참여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었다. 당시 '김치파동'으로 사회적 불안이 확산되었지만, 한영실 교수는 우리 전통 배추김치를 메뉴에 포함시켰고 외국 정상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행사 장소는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 APEC 하우스였다. 국제회의를 위해 별도로 신축된 이 시설은 약 4,396㎡ 규모에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화장실, 주방, 소방·전기시설 등이 완비되어 원활하게 운영되었다.
2024년 페루 리마 APEC: 최근 벤치마킹 사례
2024년 11월 페루 리마 대통령궁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공식 만찬은 참고할 만한 최근 사례다. 만찬 메뉴는 페루 전통 음식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킨 구성이었다.
세비체와 퀴노아: 5,000년 식문화 유산
세비체는 신선한 생선을 레몬즙에 재워 만드는 페루의 국민 음식으로 약 2,000년 역사를 가졌다. 페루에서는 6월 28일을 '세비체의 날'로 지정할 정도로 중요한 음식이다. 퀴노아는 안데스 지역의 고대 곡물로, 잉카 문명에서 **"모든 곡물의 어머니"**로 신성시되었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모든 필수 아미노산을 포함한 '완전식품'으로, UN은 2013년을 '세계 퀴노아의 해'로 지정했다.
여기에 중국 영향의 차이니즈 퓨전 요리가 포함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치파(Chifa): 페루 속 중국의 맛
19세기 중반 중국 광둥성 출신 이민자들이 페루로 건너와 중국 요리법에 페루 고유의 향신료와 식재료를 결합해 만든 독특한 퓨전 요리가 '치파'다. 중국식 볶음밥인 '차오판(炒飯)'을 변형한 '차우파(Chaufa)'는 오늘날 페루에서 매우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다. 페루에서 중국 요리는 단순 외래 음식이 아니라 페루 음식 문화의 한 부분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완전 채식 및 할랄 식단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옥수수·감자·열대과일 등 페루 재래 품종 식재료가 두루 쓰였다. 이는 5,000년의 식문화 유산과 스페인·중국·일본·이탈리아 등의 이민사적 영향을 반영한 구성이었다.
특히 2023년 세계 1위 레스토랑으로 선정된 '센트럴 레스토랑(Central Restaurante)'의 셰프 팀이 메뉴 기획에 참여하여 미적·문화적 완성도를 높였다. 센트럴은 해발 고도별로 분류한 페루의 다양한 지역 식재료를 활용하여 안데스 산맥부터 아마존 열대우림에 이르는 생태 다양성을 메뉴에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만찬 철학의 변화: '소개'에서 '공감'으로
2005년과 2024년 APEC 사례를 보면 정상 만찬 전략의 변화가 명확히 드러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자국 음식의 '원형'과 '정통성'을 보여주는 '전시(展示)'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어떻게 하면 상대가 더 즐겁게 경험할까'에 초점을 맞춘 '공감(共感)' 중심으로 진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APEC뿐 아니라 양자 외교에서도 나타난다.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시 백악관 만찬에서는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테이크에 '고추장 소스'를, 바나나 스플릿에 '된장 캐러멜'을 곁들였다. 미국인의 음식에 한국의 맛을 세련되게 녹여내 공감을 이끌어낸 사례다.
2025년 경주 APEC 만찬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0년대 이후 해외 유학과 스타주(실무 경험)를 통해
서양 요리의 기술과 철학을 체득한 셰프들이 늘어나면서,
한식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상대 문화를 존중하며
우리의 맛을 세련되게 녹여내는 '문화적 융합'이 가능해졌다.
경주 만찬은 바로 이러한 역량이 집약될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리 셰프의 기용 배경
2025년 경주 APEC 만찬의 총괄을 맡은 인물은 에드워드 리(Edward Lee) 셰프다. 그는 뉴욕대 영문학도 출신으로, 저서 『버터밀크 그라피티』로 2019년 제임스 비어드 재단상 도서 부문을 수상했고, 2024년에는 레스토랑 산업 내 소수자 지원 활동으로 인도주의상을 받았다.
제임스 비어드 상은 1990년 제임스 비어드 재단에서 제정한 미국의 대표적인 요리 및 음식 문화 관련 상으로, 보통 "요리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린다. 단순한 요리 실력뿐 아니라 음식 문화의 다양성, 지속 가능성, 사회적 책임 등도 평가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무엇보다 그는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당시 백악관 만찬의 게스트 셰프로 초청되어, 미국 요리에 한식 터치를 가미한 메뉴로 '한미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경험이 있다. 미국 남부 요리에 한식 철학을 접목해 온 '퓨전 퀴진의 전문가'인 그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아시아-태평양'이라는 APEC 정신을 음식으로 표현할 최적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다만 에드워드 리가 총괄을 맡았지만, 실제 메뉴 기획 및 개발은 라한셀렉트 경주와 서울 롯데호텔의 셰프팀이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에드워드 리는 전체 콘셉트와 실행을 통합 관리하는 역할이며, 구체적인 메뉴 개발은 한국의 전문 셰프진이 맡는 협업 구조로 진행될 예정이다.
예상 메뉴와 전략
APEC 준비기획단과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만찬 메뉴의 윤곽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만찬주로는 제1차 고위관리회담에서 이미 선보인 '경주 교동법주(신라 화랑의 술)'와 '안동소주(700년 전통)' 등 강력한 스토리를 지닌 전통주가 유력해 보인다. 이들 전통주는 단순히 맛뿐 아니라 역사적 서사를 담고 있어 대화의 소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식재료는 경주가 동해안에 인접한 만큼 감포항의 자연산 참가자미, 대게, 전복 등 해산물과 경주 천년한우, 경주 체리 등이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에드워드 리 셰프의 특기인 고추장, 된장, 간장 등 한국의 장(醬)이 맛의 핵심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 문화는 한식의 정체성이면서도, 서구인들에게는 발효식품의 깊은 맛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요소다.
K-푸드 쇼케이스: 푸드 스테이션의 전략
2025년 경주 APEC의 가장 큰 차별점은 공식 만찬을 넘어, 전 세계 미디어와 관계자들을 위한 파격적인 식문화 행사를 준비했다는 점이다. 바로 '푸드 스테이션'이다.
APEC 준비기획단 발표에 따르면, 이곳에는 CJ, 농심, 교촌치킨 등 K-푸드 대표 대기업뿐만 아니라, 경주 향토 제과점 '부창제과'의 호두과자, 뉴욕타임스가 극찬한 '옥동식'의 돼지곰탕 등 한국 미식의 '뉴웨이브'를 이끄는 메뉴들이 포함될 예정이다.
이는 매우 영리한 전략으로 평가된다. 대기업을 통해 'K-푸드의 대중성'을, '부창제과'를 통해 '지역의 스토리'와 현대적 진화를, '옥동식'을 통해 '글로벌 미디어가 인정한 한국의 맛'을 동시에 보여주는 입체적 접근이다.
격식 있는 만찬과 활기 넘치는 스트리트 푸드를 아우르며
한국 식문화의 다채로운 매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만찬장 변경 논란: 무엇이 문제였나
하지만 2025년 경주 APEC 준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가장 큰 논란은 만찬장 변경 사태였다.
당초 계획은 국립경주박물관 내에 한옥 스타일의 별도 만찬장을 신축하는 것이었다. 약 41억 원의 예산을 들여 2024년 건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윤석열 정부가 집권 중이던 때로, 2024년 말 비상계엄 선포 등 국내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정부의 의사 결정이 늦어지고 행정력이 분산되면서 준비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2025년 이재명 정부로 교체된 이후, 정상 만찬 규모가 확대되고 주요국 정상 참석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존 한옥 만찬장의 문제점이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만찬 한 달여 전 최종 시설점검 결과, 치명적인 문제들이 발견되었다.
첫째, 내부 화장실이 전무했다. 참가자들은 외부 화장실까지 40~50m 이상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둘째, 조리 시설이 전무했다. 외부에서 음식을 가져와야 하는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셋째, 전기·소방 안전 문제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넷째, 공연 무대 설치로 좌석수가 230석 수준으로 현저히 감소했다. 당초 계획인 600석 대비 크게 부족했고, 늘어난 참석 인원(400명 이상)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결국 라한셀렉트 경주호텔 대연회장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이곳은 1,498㎡ 규모로 약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으며, 화장실·조리실·대기실 등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안전성과 편의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존 한옥 만찬장보다 더 넓고 실용적인 장소로 평가받았지만, 41억 원의 예산 낭비와 준비 미흡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초기 준비 지연의 책임 소재와 최종적인 만찬장 변경 결정의 시점이 행정부 교체와 엮이면서 복합적인 논란을 낳았다.
2005 vs 2025: 시대가 요구하는 것
2005년과 2025년 만찬의 차이는 한국 식문화가 세계 무대에서 차지하는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2005년은 한식 세계화 사업이 한창이던 시기로, 한식의 영양학적 우수성과 건강적 가치를 강조해야 했다. 세계에 "한식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알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반면 2025년은 K-콘텐츠의 전 세계적 성공과 함께
한식도 자연스럽게 주목받는 시대다.
더 이상 기능적 가치나 전통을 주장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이제는 한식의 세련미, 현대화된 면모, 미래지향성,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때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일방적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의 맛이 여러분의 입맛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쌍방향 소통의 시대가 된 것이다.
에드워드 리라는 글로벌 셰프를 발탁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그는 한식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서구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2005년에는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면, 2025년에는 '우리가 어떻게 세계와 함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졌다.
현대 외교만찬은 종교적·문화적 다양성 존중이 필수가 되었다. 또한, 지역 식재료 사용, 제철 식품 활용, 푸드 마일리지 절감은 단순히 환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식문화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경주 천년한우, 감포항 해산물, 경주 체리 등 지역 특산물 활용은 이러한 글로벌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페루가 센트럴 레스토랑을 통해 해발 고도별 생태다양성을 메뉴에 반영한 것처럼, 한국도 음식을 통해 자연, 역사,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졌다.
평화와 번영을 위한 역사적 밥상을 기대하며
2025년 경주 APEC 만찬은 준비 과정의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한국 외교만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역사 속 외교만찬은 때로는 군대보다, 조약 문서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해 왔다. 1814년 탈레랑의 냄비가 10만 대군을 이겼고, 1972년 닉슨의 젓가락질이 죽의 장막을 녹였다. 2025년 경주의 식탁이 각국 정상들에게 평화와 번영의 메시지를 전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협력을 강화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밥상'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한식은 더 이상 세계에 소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한식은 이제 세계와 함께 대화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파트너다. 2025년 경주 APEC 만찬이 바로 그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