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의 계보를 따라서
한국인만큼 국물에 집착하는 민족이 있을까. 우리는 태어나 처음 먹는 음식이 국이고, 인생의 중대사마다 국을 먹으며, 심지어 땅에 묻히기 직전까지 육개장과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반상 차림에서 국과 김치는 첩수로 세지 않을 정도로 근간이 되는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설렁탕과 곰탕은 한국 국물 요리의 양대 산맥이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이들이 이 둘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뽀얀 건 설렁탕?", "맑은 건 곰탕?" 정도의 이분법적 인식만 있을 뿐이다.
오늘은 설렁탕과 곰탕의 기원과 차이를 명확히 짚어보고, 이어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돼지국밥과 돼지곰탕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두백미(一頭百味)
"소 한 마리에서 100가지 맛이 난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 등록된 소고기 부위의 명칭이 무려 136가지가 넘는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위드는 한국인을 "전 세계에서 소고기를 가장 세밀하게 구분해 먹는 민족"이라고 평가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35가지, 아프리카 보디족이 51개 부위로 구분하는 것에 비하면 한국인의 소고기 세분화는 독보적이다.
이러한 문화는 조선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초기 오키나와의 물소와 토종 소를 교배해 종자개량을 하면서 조선의 소는 동북아에서 가장 큰 몸집을 갖게 되었다. 17세기 소 사육두수는 100만 마리로 증가했고, 1일 도축하는 소가 1천 마리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1인당 소고기 섭취량은 4kg으로, 1995년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한국인이 소고기를 이처럼 다양하게 먹게 된 배경에는 풍부한 소 사육과 도축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백정과 설렁탕의 탄생
설렁탕의 기원은 백정 문화와 밀접하다. 조선시대 도축을 하게 되면 도축업자(성균관의 반인, 백정)에게 소고기 대신 소고기의 특수부위와 선지, 가죽 같은 부산물을 주었다. 이들은 소고기 부산물을 활용해 가죽제품과 설렁탕을 판매했다.
설렁탕은 소가죽을 제외한 온갖 부위를 다 넣고
끓여 먹는 일종의 소고기 잡탕이다.
소의 머리, 내장, 뼈다귀, 발, 도가니 따위를 푹 삶아서 만든 국
또는 우려낸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다.
백정들이 버려지는 부산물을 활용해 만든 이 음식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국물 요리가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집 사진을 보면, 설렁탕집은 소머리를 '브랜드 로고'처럼 가게 앞에 걸어놓고 영업했다. 1930년대엔 경성에만 설렁탕집이 100여 개가 넘어 종로와 청계천 주변에 빼곡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서울 등 대도시에서 소머리 진열이 부담스러워졌고, 이후 상대적으로 소머리 사용에 관대한 경기도 곤지암 같은 지방에 소머리 국밥을 파는 식당이 들어섰다. 설렁탕과 소머리국밥은 같은 음식이다.
설렁탕과 곰탕, 그 기원의 갈래
'곰탕'이라는 명칭은 우리말 '고다(뭉그러지도록 익히다, 푹 끓이다)'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문헌에는 '곰국', '고음국', '공탕'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곰탕의 정의는 명확하다.
오랜 시간 동안 소뼈나 소고기를 고아서 만든 국물을 의미하며,
그 핵심은 '고다'라는 조리법 자체에 있다.
즉, 곰탕은 조리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둔 개념이다. 전통 곰탕은 크게 '맑은 곰탕'과 '뽀얀 설렁탕'으로 나뉘며, 그 차이는 재료와 조리 시간에 있다.
설렁탕은 곰탕의 하위 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곰탕 가운데서도 한양 지방에서 특화된 조리법으로
뽀얀 국물을 우려내는 탕을 특별히 설렁탕이라고 부른다.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조선 성종 6년(1475년)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가장 적은 재료로 최대 인구를 먹일 수 있는 요리를 만들라는 왕명에 따라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끓여 만든 '선농탕(先農湯)'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중세 몽골어 '슈루' 혹은 '슐루'(고기를 맹물에 삶은 국물)에서 왔다는 설, 국물을 오랫동안 '설렁설렁'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설렁탕과 곰탕, 무엇이 다른가
두 음식의 차이는 재료와 조리 방식, 그리고 완성된 국물의 성격에서 명확히 갈린다.
곰탕은 주로 살코기와 내장을 중심으로 국물을 우려낸다. 양지머리, 사태 같은 고기 부위와 양, 곱창 등 내장을 무와 함께 넣고 끓인다. 고기를 3~4시간 정도 끓이고, 뼈도 함께 넣을 경우 12시간 이상 고아 맑고 기름진 국물을 낸다. 고기와 깔끔한 내장 등 비교적 고급 부위로 국물을 내고, 뼈를 많이 쓰지 않아서 맑고 투명한 국물이 특징이다. 간은 주로 간장으로 맞추며, 당면, 파, 계란 노른자 지단 등 다양한 고명이 올라간다.
반면 설렁탕은 사골, 소머리, 도가니 등 뼈 위주로 10시간 이상 푹 끓여 뽀얗고 탁한 국물을 만든다. 뼈에서 우러난 골수와 콜라겐으로 인해 국물이 진하고 고소하다. 소가죽을 제외한 온갖 부위를 다 넣고 끓이지만, 소머리와 사골이 주연이다. 간은 소금으로 맞추며, 소면과 파 위주로 올린다. 고기가 적거나 없을 경우 소면이 주요 건더기가 되기도 한다.
곰탕은 고기 중심이어서 비교적 짧은 시간 조리로 충분한 반면,
설렁탕은 뼈 위주라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곰탕은 고소하면서도 맑은 맛이고,
설렁탕은 진하고 뽀얀 국물이 특징이다.
제대로 사골을 이용해 끓인 설렁탕은 식으면 묵처럼 응고되지만, 첨가물을 넣은 설렁탕은 여러 층으로 분리된다. 설렁탕을 제대로 끓이려면 100인분짜리 솥이 하나는 만드는 용도, 하나는 만든 걸 데워 파는 용도로 최소한 2개는 있어야 한다. 이는 설렁탕이 대량 생산을 전제로 한 음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밥의 탄생 배경
한식의 기본은 국과 밥이다. 온돌이라는 난방문화가 발달해서 집안에 기본적으로 불이 있었고, 난방열을 조리열로 활용해서 국 문화를 발달시켰다. 겨울이 긴 한반도는 한랭건조해서 뜨거운 국을 선호했다. 또한 제한된 양의 식재료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패스트푸드는 세계 어디에서든 일반 대중, 서민의 생활을 반영하는 음식이다.
햄버거, 샌드위치, 만두, 초밥, 덮밥 등
가장 일상적인 음식이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았다.
한식에서는 국과 밥이 기본이며
한국 대중음식점 메뉴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의 국밥은 시장에서 발달한 음식이다. 상인들이 빨리, 간편하게, 든든히 밥을 먹기 위해 생겨난 간편식이다. 격식을 갖춰 제대로 먹으려면 국과 밥을 따로 먹어야 하지만, 국에 밥을 말아 절차를 상당히 줄인 간편 음식이 바로 국밥이다. 지체 있는 양반의 식사는 아니었다.
유명 국밥과 배달 국밥
국밥의 역사는 상업의 발달과 시장의 확산과 궤적을 같이한다. 18세기 무렵부터 나타난 국밥은 19세기 초 조선의 시장이 1,061개에 달하고 오일장 체계가 확립되면서 본격적인 외식메뉴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 주막에서 국밥을 판매하면서 한양에 수많은 장국밥이 등장했다.
무교탕반은 헌종이 변복을 하고 자주 출몰하던 외식업소로, 무교동 일대에서 유명했다. 양지머리를 무와 삶아 여러 가지 나물과 산적을 올려 제공한 메뉴가 인기였다. '탕반(湯飯)'은 국(탕)에 밥(반)을 말아낸 국밥을 의미하는 옛 표현으로, 무교동의 탕반은 맑은 고깃국을 바탕으로 한 해장국 겸 곰탕의 형태였다.
효종갱은 효종(새벽 종)을 뜻하며 갱은 국을 의미한다. 남한산성의 유명 해장국으로, 밤에 솜에 싸서 소달구지에 실어서 한양에 배달했다. 이미 조선 후기부터 배달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안성탕은 안성 소머리국밥을 말한다. 안성 소머리국밥을 '안성탕'이라고도 하며, 현재는 '안성국밥'으로 특화해서 판매하고 있다. 1920년대 초 안성 우시장으로 이어지는 '쇠전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마솥 하나를 걸고 팔던 국밥집에서 시작되었다. 안성은 대구·전주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이라고 했을 만큼 큰 시장을 이루었다. 한양에서 해남으로 이르는 삼남길과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이 교차하는 입구였다.
1900년대부터 서울에는 온갖 음식점이 생겼고, 조선 음식점은 조선인이면 계층과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양반 출신들과 근대적 취향을 가진 모던보이/모던걸은 설렁탕을 좋아해도 방문하는 것을 꺼렸다. 양반들은 여전히 계층과 남녀 구분을 따졌고, 모던 피플들도 계층의 구분을 중시해서 출입을 하지 않았다. 서울의 설렁탕집 주인 중에는 이런 별난 고객들을 위해 배달서비스를 제공했다. 설렁탕과 곰탕은 그때부터 배달음식이었다.
가장 오래된 설렁탕 음식점은 서울의 1904년 이문설농탕, 가장 오래된 곰탕집은 전남 나주의 1910년 "하얀집"이다.
돼지국밥, 설렁탕의 DNA를 계승하다
경남 지역, 특히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인 돼지국밥은 설렁탕의 조리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돼지 부산물과 뼈를 이용하여 소고기 베이스의 설렁탕과 유사한 형태의 든든한 국물을 만들어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
돼지 뼈를 오랜 시간 끓여 콜라겐과 골수가 우러나오게 만든 뽀얗고 진하며 걸쭉한 국물이 돼지국밥의 특징이다.
설렁탕이 소뼈를 10시간 이상 끓이는 것처럼, 돼지국밥도 등뼈, 잡뼈, 머리뼈 등을 장시간 추출한다. 이 과정에서 뼈에서 우러난 콜라겐이 국물을 뽀얗게 만들고, 진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설렁탕이 소고기 부산물로 만든 한양 서민의 음식이었다면, 돼지국밥은 돼지고기 부산물로 만든 경상도의 서민 음식인 셈이다.
밀양은 돼지국밥의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한국전쟁 이전인 1930년대 후반~194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한 돼지국밥 식당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개업한 양산식당(현 동부식육식당의 전신)이 대표적이다. 밀양식 돼지국밥은 소뼈까지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설렁탕의 조리법을 더욱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돼지뼈나 부산물을 이용해 만들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되었다. 부산 영도 지역에 제주도 해녀들이 정착하여 제주 돼지를 도축해 사용하기도 했다. 제주 돼지는 잡내가 적어 국밥 육수에 적합했다고 한다. 부산은 이를 전국적으로 대중화하고 발전시킨 곳이다.
돼지곰탕, 곰탕의 DNA를 계승하다
돼지곰탕은 전통적인 곰탕의 원칙을 돼지고기에 적용하여 세련되게 해석한 요리다. 곰탕이 고기 중심으로 맑은 국물을 내는 것처럼, 돼지곰탕도 양질의 돼지고기만을 사용하거나 선정된 뼈를 사용하되 불순물을 철저히 제거하여 맑고 깨끗한 국물을 낸다.
돼지곰탕의 핵심은 정제된 맑은 국물이다. 뽀얀 돼지국밥과 달리 맑고 투명하며 덜 기름진 국물이 특징이다. 곰탕이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당면, 계란 지단 등을 올리는 것처럼, 돼지곰탕도 소금이나 후추 등의 간소한 양념으로만 간을 하여 국물 본연의 맛을 살린다. 돼지 자체의 맛을 강조하기 위해 더 순수하고 가벼운 풍미에 중점을 둔다.
부산 돼지국밥 중에도 맑은 국물 형태가 존재하는데, 이는 여러 기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 출신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익숙한 방식인 맑은 장국 형태의 국밥 조리법을 혼합한 것, 그리고 전통적인 곰탕의 조리 원리를 돼지고기에 적용한 것이 합쳐져 맑은 돼지국밥, 즉 돼지곰탕의 형태가 나타났다. 범일동 할매국밥 같은 노포에서 맑은 국물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결국 설렁탕과 곰탕이 각각 뼈 중심의 진한 국물과 고기 중심의 맑은 국물로 구분되는 것처럼, 돼지국밥과 돼지곰탕도 같은 원리로 구분된다. 돼지국밥은 뼈를 장시간 끓여 뽀얀 국물을 내는 설렁탕의 계보를, 돼지곰탕은 고기를 중심으로 맑은 국물을 내는 곰탕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이다.
돼지를 활용한 국물요리의 다양성
돼지국밥과 순댓국밥은 형제 같은 음식이다. 둘 다 돼지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하지만, 순댓국밥은 순대가 필수적으로 포함된다는 점이 다르다. 순댓국밥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특히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발달했다. 이북 음식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돼지국밥이 경상도의 향토 음식이라면, 순댓국밥은 더 전국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두 메뉴를 함께 파는 식당이 많아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제주도에는 독특한 돼지 국물요리가 발달했다. 돼지갈비국은 돼지갈비 또는 돼지등뼈를 푹 삶은 국물에 메밀가루를 넣고 끓인 국으로, 불린 미역을 넣기도 한다. 돼지등뼈국, 접착뼈국, 접작빼국이라고도 부른다. 돼지고기고사리국은 육개장 방식으로 만드는 돼지고기 국물요리로, 고사리를 넣어 끓인다. 제주는 돼지 사육이 활발했고, 제주 흑돼지의 품질이 좋아 다양한 돼지 요리가 발달할 수 있었다.
전북에는 돼지뼈국이 있다. 돼지뼈를 푹 고아낸 국물에 들깨물을 붓고 고추 다진 양념, 된장, 다진 마늘로 양념한 토란대와 고구마순을 넣고 푹 끓인 후 어슷하게 썬 대파를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들깨를 넣는 것이 특징이다. 돼지고기국은 참기름으로 돼지고기를 볶다가 무, 대파, 삶은 시래기를 넣고 끓이는 음식으로, 고춧가루와 들깻가루를 넣어 구수한 맛을 낸다.
재료와 먹는 방식에 따른 국밥의 분화
곰탕은 '고다'라는 조리법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다양한 재료로 응용할 수 있다. 꼬리곰탕은 소꼬리를 주재료로 한 곰탕이고, 도가니탕은 소의 무릎 부위인 도가니를 넣은 곰탕이다. 우족탕은 소발을 넣은 곰탕이다. 이들은 모두 곰탕의 기본 원리, 즉 특정 부위를 오래 고아 맑은 국물을 내는 방식을 따른다. 다만 주재료가 특화되어 있을 뿐이다.
닭곰탕은 곰탕의 계보를 닭에 적용한 음식이다. 닭 육수는 육류 육수 중 가장 단시간 내에 조리가 가능하다. 뼈가 얇기 때문이다. 닭을 푹 고아 만든 국물은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곰탕의 조리 원리를 닭에 적용한 것으로, 곰탕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로국밥은 국과 밥을 따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 문화는 옛날 양반들이 국에 밥을 통째로 말아 먹는 것을 예절상 상스럽게 여겨 밥과 국을 따로 먹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대구로 몰리면서 더 확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국물의 형태는 설렁탕, 해장국, 육개장처럼 한국 전통 탕류와 유사하나, 대구지역에서는 주로 육개장을 따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감자탕, 곱창전골, 연포탕, 두부전골 등은 술안주에서 시작된 음식이기에 밥을 별도로 준다.
국밥은 많은 반찬이 필요가 없고 식사이기도 하고 술안주가 되기도 했다. 1970-80년대 한국인의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았다.
에필로그: 국물의 철학
설렁탕과 곰탕의 차이는 단순히 재료나 색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리 철학의 차이다. 설렁탕은 뼈를 극한까지 우려내는 추출의 철학이고, 곰탕은 고기의 맛을 맑게 정제하는 정련의 철학이다.
이 두 철학은 돼지고기 국밥 문화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돼지국밥은 설렁탕처럼 뼈를 장시간 끓여 뽀얀 국물을 내고, 돼지곰탕은 곰탕처럼 고기를 중심으로 맑은 국물을 낸다. 같은 재료라도 어떤 철학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국의 국물 요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축적된 조리 지혜의 결정체이며, 재료를 대하는 태도와 철학의 표현이다. 설렁탕 한 그릇에는 백정의 지혜가, 곰탕 한 그릇에는 양반의 품격이, 돼지국밥 한 그릇에는 서민의 생명력이, 돼지곰탕 한 그릇에는 현대인의 세련됨이 담겨 있다.
우리가 국밥 한 그릇을 먹을 때, 우리는 단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와 문화를 먹는 것이다. 설렁탕과 곰탕 사이, 그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음식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출처: 한식문화사전,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전통향토음식사전 등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