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 샴페인 한 잔

한 해를 보내는 가장 우아한 방법

by 송지

극 I인 나는 숫자를 세며 “해피뉴이어”를 외치는 떠들석한 분위기를 무척 어색해 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가지고 나오고 싶은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샴페인 한 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그 시간에는 무조건 샴페인 한잔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연말 리추얼은 영화 한 편과 샴페인 한 잔이다. 황금빛 기포가 천천히 올라오는 플루트 잔을 바라보며 한 해를 돌아본다.


샴페인은 영어식 발음으로 프랑스 발음은 샹파뉴다. 지명이 곧 와인의 이름이 된 셈이다. 프랑스의 유명 샴페인 하우스들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컬러를 가지고 있다. '포므리'는 블루, '랑송'은 블랙, '뵈브클리코'는 옐로우다.


샴페인은 이렇듯 맛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상징으로 소비되는, 그저 술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음료다. 스페인의 까바, 이탈리아의 스푸만테, 독일의 젝트 같은 스파클링 와인들이 있지만, 이들은 그러한 문화적 의미에서 샴페인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모든 항공사들은 기내 샴페인 선정에 심혈을 기울인다. 기내 와인의 품질은 항공사의 이미지와 직결되고, 특히 샴페인은 사람의 첫인상과 동일하게 해석된다. 기내 와인 선정 기준은 산도다. 기내 압력과 습도는 지상보다 낮다. 따라서 입안이 텁텁해 미각의 감도가 떨어져 신맛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타이타닉과 진수식의 샴페인

샴페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타이타닉이다. 1997년 개봉한 <타이타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3등실 승객 잭이 1등실 만찬에 초대받는 신이다. 캐비아를 권하는 직원에게 "캐비아는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며 태연히 거절하는 잭. 귀족들의 멸시 섞인 시선에도 전혀 기죽지 않는 그의 모습이 통쾌했다.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에서 그가 던진 대사는 명대사로 회자된다.


인생은 선물이에요. 낭비하면 안 되죠.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삶에서 그렇게 배우는 거죠. 매일이 소중하다는 걸.


아이러니하게도 타이타닉호는 진수식을 거행하지 않은 배였다. 대형 선박은 처음 물에 띄울 때 조선공들의 수고를 격려하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진수식을 연다. 고대 바이킹들은 처녀를, 타히티에서는 피를 뿌렸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유사한 풍습이 전승되었다. 18세기부터는 사제가 와인을 뿌렸고 현대에 와서는 여성이 뱃머리에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으로 변화했다. 진수식에서 샴페인이 종종 깨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다. 타이타닉은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미신에 의존하지 않겠다며 진수식을 생략했다.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오만이 낳은 비극이었다.


실제로 타이타닉에는 모엣샹동과 뵈브클리코 등이 실렸고 하이직 모노플이 공식 샴페인이었다.



뵈브 클리코, 로맨스 영화의 단골 샴페인

뵈브 클리코는 로맨스 영화에 자주 등장한 샴페인이다. <라라랜드>와 <카사블랑카>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라라랜드> 곳곳에는 <카사블랑카>의 오마주가 숨어 있다. 미아가 근무하는 커피숍 맞은편이 <카사블랑카> 촬영지라고 세바스찬이 설명하는 장면, 배우가 된 미아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펄럭이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포스터. 그리고 영화 마지막,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된 미아가 세바스찬의 재즈 바에서 재회하는 모습은 <카사블랑카>에서 릭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일사와 재회하는 신을 연상시킨다.


뵈브 클리코라면 남겠어요.


<카사블랑카>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남긴 유명한 대사다. 뵈브 클리코는 1772년부터 샴페인을 만들어온 역사적인 하우스다. 뵈브 클리코의 상징인 옐로우 레이블은 1877년부터 시작됐다. 영국 시장에서 스위트한 샴페인과 구분 짓기 위함이었다. 흥미롭게도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보다 스파클링 와인의 가치를 먼저 알아봤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샹파뉴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은 영국 귀족 사회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 궁정이 이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 이후였다.


뵈브 클리코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27세에 남편을 여의고 평생을 와이너리에 바친 뵈브 클리코 퐁사르당 여사다. 그녀는 샴페인 양조에 획기적인 발명을 남겼다. 병 안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퓌피트르'라는 A자 형태의 나무 랙을 개발한 것이다. 45도 각도로 거꾸로 꽂은 병을 매일 조금씩 돌려주면 찌꺼기가 병목에 모인다. 이 작업을 '르뮈아주', 영어로는 '리들링'이라 부른다. 현재는 '자이로팔레트'라는 기계가 대량으로 리들링을 처리하지만, 고급 샴페인은 여전히 퓌피트르에서 숙성된다.


G.H.멈, 샴페인의 기준

<카사블랑카>에는 뵈브 클리코 말고 또 다른 샴페인이 등장한다. 바로 G.H.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세기의 명작은 중립국 모로코를 무대로 펼쳐진 사랑 이야기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


험프리 보가트가 남긴 이 명대사는 <카사블랑카>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만들어준 일등 공신이다.


G.H.멈은 샹파뉴 5대 명문가 중 하나다. 1875년 출시한 코르동 루즈는 지난 15년간 포뮬러원의 공식 샴페인이었으며 '샴페인의 기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 샴페인의 붉은 리본 디자인은 최고의 품질을 자부하는 상징이다.


코르동 루즈는 77개 구획에서 수확된 포도를 별도로 발효한 후 블렌딩하는데, 여기에는 수년에서 수십 년 보관한 리저브 와인이 사용된다. 리저브 와인을 사용하는 이유는 매년 기후와 수확량이 달라도 샴페인 하우스만의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지하 셀러에서 3~5년 추가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모엣 샹동, 샴페인 제국


"딸기가 샴페인의 향을 돋워주거든."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리차드 기어의 대사다. 샴페인을 마실 때면 항상 이 대사가 떠오른다.


<귀여운 여인>뿐 아니라 <캐치 미 이프 유 캔>, <위대한 개츠비>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샴페인이 바로 모엣 샹동이다. 모엣 샹동의 3대 캐릭터는 구수한 플레이버, 오래 유지되는 작은 기포, 상큼한 산도다. 1743년 클로드 모엣이 설립했으며 루이 15세와의 인연으로 궁중연회에 종종 사용됐다. 손자 장 레미 모엣은 나폴레옹과 친분을 쌓으며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영국, 러시아, 미국, 브라질, 일본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아들 빅토르 모엣과 사위 피에르 가브리엘 샹동에게 사업을 물려주었고 이때 '모엣 샹동'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1860년대 브뤼 임페리얼을 출시하고, 1930년대 돔페리뇽 상표권을 인수해 1936년 첫선을 보였다. 1962년 상장, 1971년 모엣헤네시 합병, 1987년 LVMH(루이비통 모엣헤네시) 탄생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곧 샴페인 제국의 역사다. 현재 LVMH에는 모엣샹동 외에 돔페리뇽, 루이나르, 크루그, 뵈브 클리코 등의 샴페인 하우스가 속해있다.


극중 리처드 기어가 제안한 샴페인과 딸기는 사실은 쉽지 않은 조합이다. 실제로 신맛이 강한 과일은 샴페인의 신맛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피해야 하지만, 달콤하게 익은 딸기라면 좋다. 샴페인은 고소한 맛과 궁합이 좋다. 비스켓이나 카프레제 샐러드의 모짜렐라 치즈는 샴페인과 만나 고소함이 배가된다. 짠맛은 샴페인과 만나면 상쇄된다. 한 모금의 샴페인이 캐비어의 비릿한 짠맛을 금새 씻어준다. 한통에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캐비어 대신 명란젓은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명란젖을 팬에 구워 상큼한 오이와 마요네즈는 곁들이면 썩 괜찮은 샴페인 안주가 된다. 샴페인은 입안의 기름기를 제거해주기에 각종 전이나 튀김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샹파뉴 지방의 음식인 비프 타르타르과 유사한 한식의 육회는 의외로 샴페인과 아주 잘 어울린다. 참기름의 고소함, 생고기의 기름기, 채 썬 배의 달콤함까지 샴페인의 맛을 더욱 고조시킨다.



볼랭저, 제임스 본드의 선택

<007 어나더 데이>는 한반도를 소재로 제작된 제임스 본드 시리즈다. DMZ와 북한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북한군 무기 밀매 현장에 위장 잠입한 본드는 포로로 잡히게 된다. 1년 반 후 극적으로 홍콩으로 탈출한 그가 호텔방과 함께 요청한 것은 볼랭저 61년산이었다.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임스 본드에게 필요한 것은 수트와 볼랭저였다.

볼랭저는 1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샴페인 하우스로 40여 년간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협업해왔다. 1884년부터 영국 왕실에 샴페인을 공급했으며, 모든 제초제의 사용 금지 및 60% 이상의 피노 누아 사용 등 엄격한 기준을 고수한다.

이 샴페인 하우스의 가장 큰 차별점은 오크통 발효다. 대부분의 양조장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오크 배럴에서 발효를 진행한다. 이곳에서는 부르고뉴 와이너리에서 5년 이상 사용한 배럴을 공급받아 오크 풍미를 최소화하면서도 와인의 시큼한 맛을 부드럽게 변화시킨다. 2차 병 발효를 길게 가져 이스트의 구수한 풍미가 고조되는 것도 특징이다. 브뤼는 최소 3년, 프레스티지 샴페인은 최소 8년을 숙성한다.


이 밖에 영화에는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샴페인들을 소개한다.



파이퍼 하이직, 마릴린 먼로의 샴페인

샴페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스타는 마를린 먼로다. 그녀의 삶은 샴페인처럼 화려하고 거품처럼 덧없었다. 그녀는 욕조에 약 350병의 샴페인을 채워 넣고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 에피소드는 마릴린 먼로를 샴페인과 연관짓기에 충분하다. 먼로가 특히 좋아했던 샴페인은 파이퍼 하이직이었다.


나는 매일 밤 샤넬 No.5를 뿌리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파이퍼 하이직 한 잔으로 잠을 깬다


그녀의 말은 글래머러스하고 퇴폐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실제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집에서 발견된 물품 목록에 파이퍼 하이직 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파이퍼 하이직은 아카데미 시상식과 칸 영화제를 후원하며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먼로 사후에도 이 샴페인 하우스는 그녀와의 인연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고, 영원한 아이콘 마릴린 먼로와 샴페인의 럭셔리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다.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 황제를 위한 샴페인

크리스탈은 샴페인 하우스 루이 로드레가 생산하는 최고급 프레스티지 퀴베로, 그 특별한 기원과 디자인, 그리고 현대의 논란으로 인해 샴페인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브랜드 중 하나다.


1876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특별한 요구로 탄생했다. 당시 황실은 빈번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는 폭발물이나 독이 병 바닥에 숨겨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투명한 크리스탈 유리로 만든 병을 요구했다. 일반 샴페인 병과 달리 병 바닥에 움푹 들어간 펀트가 없는 평평한 디자인 역시 황제의 요구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투명한 병 때문에 '크리스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45년 로마노프 왕조 멸망 이후 일반 공개된 크리스탈은 현재는 바닥만 크리스탈인 유리병과 함께 자외선 차단용 주황색 비닐 사용한다. 이는 투명한 유리가 와인을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탈은 2000년대 초반까지 힙합 문화와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래퍼 제이 지는 자신의 뮤직비디오와 가사에서 크리스탈을 자주 언급하며 사실상 홍보 대사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6년 루이 로드레의 전무이사 프레데릭 루자드가 한 잡지 인터뷰에서 "크리스탈이 힙합 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인종차별적으로 해석한 제이 지는 즉각 크리스탈 불매 운동을 선언하고, 자신의 클럽에서 크리스탈 판매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2014년에는 경쟁 샴페인인 아르망 드 브리냑('에이스 오브 스페이드' 샴페인)을 직접 인수하며 크리스탈과의 결별을 공식화했다. 이후 2021년, 제이 지는 아르망 드 브리냑의 지분 50%를 LVMH 그룹에 매각했다.


샴페인은 수년간의 숙성 시간을, 영화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단면을 담고 있다. 올해 연말에는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골라 샴페인 한 잔과 함께 감상해보면 어떨까? 한 해를 보내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출처 : 와인이 있는 100가지 장면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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