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을 즐겨 먹었던 인물과 사연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루트피히 페이어바흐의 에세이 <신비주의와 철학>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이는 한 인간의 사고와 존재에는 그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한 신체적, 물질적 조건이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1825년 프랑스의 대 미식가 브리아 사바랭이 그의 저서 <미식예찬>에 주장한 바다. 페이어바흐가 그의 생각을 40년 후에 철학적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브리아 사바랭은 같은 책에서 음식이 단순히 생존의 수단이 아닌 사회, 정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며, 음식문화가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국가의 운명은 그들이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물을 즐겨먹었던 역사적 인물은 누구였을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흔히 우리는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채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온순한 성품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과연 그 가설이 유효한 것일까?
먼저 채소를 사랑한 사람들은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의외로 음식에 관심이 많았다. 조리서 등을 저술한 사례도 있고 스스로 텃밭을 가꾸어 채소를 길러 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율곡 선생이다. 그는 탐식에 대한 경계를 중시했다. 그는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며 우금령을 따라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나물을 캐러 다니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미나리의 일종인 '동초'를 좋아해서 집에 동초를 옮겨 심고 공부하는 동안 즐겨 드셨다고 전해진다.
조선 최고의 지식으로 불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다산은 채소밭 가꾸기가 취미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배 생활 내내 두부, 부추, 아욱국 등을 즐겨먹으로 채소를 직접 가꿔 먹었다. 식생활 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조선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선생이 가진 음식관을 나타내는 글을 인용한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모름지기 이런 생각을 가져라.
정력과 지혜를 다하여 변소간을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으리라.
이렇듯 자신을 절제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을 최우선 덕목으로 여겼던 유학자들에게 나물은 가장 알맞은 식재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아래는 <광해군 일기>, 11년 3월 5일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더덕 정승의 권세가 중하더니, 이제는 잡채 판서의 세력 당할자 없구나( 沙參閣老權初重, 雜菜尙書勢莫當. 사삼각로권초중, 잡채상서세막당.)
위에서 언급한 더덕 정승과 잡채 판서 이야기는 당시 민간에 떠돌던 노래가 실록에까지 실린 것이다. 실록뿐만 아니라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더덕 정승’ 이 아닌 ‘김치 정승[沈菜政丞]’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더덕이든 김치든 간에 중요한 것은 광해군이 더덕과 잡채를 좋아했으며, 그 시절 정승, 판서라는 고관대작의 자리가 그 음식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더덕 정승'은 광해군 시절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이다. 그는 광해군에게 더덕정과를 넣은 떡을 자주 진상해서 왕의 총애를 받았고 관직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삼각로'에서 '사삼'은 더덕을 뜻한다. 사삼과 더덕은 다른 식물이지만 한방에서는 더덕이 사삼과 효능이 비슷하다 하여 '백사삼'이라고 부르기도 했기에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잡채판서'는 당시 호조판서였던 '이충'이다. '잡채'는 광해군이 매우 좋아했던 요리로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의 잡채와는 다른 음식이다.
현재 우리가 먹는 잡채는 엄밀히 말해 '당면잡채'다.
당면은 1912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다.
이후 잡채는 조리법의 변화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맛과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와 달리 이충이 만들었다는 잡채는
다양한 채소를 실처럼 채쳐서 겨자즙에 버무려 먹었던 음식으로
맛은 지금의 양장피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광해군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만든 진기한 반찬을 자주 진상했는데 광해군은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이 음식들을 매우 좋아하여 이충을 총애하였고 벼슬을 내렸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이 두 신하는 왕을 보필해 어진 정치로 이끌지 못하고 백성을 수탈하는 일에 앞장섰다. 음식에 현혹된 광해군이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지 못해 당대에도 후대에도 불명예스러운 일로 남게 된 것이다. 역시 통치자에게 탐식은 경계해야 할 대상임은 분명한 듯 하다.
또 다른 예외도 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은 육식을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평소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했고, 연회에서 고기의 양이 적을 경우 관련자를 문책할 정도로 육류를 중시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태종이 세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상중에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은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을 가졌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강한 결단력을 보이는 군주였다. 그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쳐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국사에 전념했던 탓에 당뇨와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출처: 고전번역원, 채소의 인문학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