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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상센터 이야기 Jun 13. 2022

반갑다 친구야

외상센터 이야기

처음엔 수많은 자해 환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얼마나 삶이 힘드셨으면. 지금 토니켓(지혈대) 압력 괜찮겠지? 혈관조영실에서 왜 연락 안 오지. 그런데 힘줄이 좀 많이 끊어진 것 같네. 빨리 정형외과 연락해야겠다. 참, 지금 응급실 체류 시간 몇 분 지났지? 입원 지연되면 센터장님께서 싫어하실 텐데.


"어재선 님! 어재선 님! 손가락 움직여보세요."

혼자 환자 처치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한 전공의 선생이 환자의 이름을 크게 불러대는 바람에 그 흐름이 끊기고야 말았다. 그런데 환자 이름이 뭐라고?


"환자 혹시 몇 년 생이예요?"

"87년 생이요 교수님."

아... 어재선. 25년간 잊고 지냈던 이름인데도 순식간에 그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고 장소를 확인했다. 천안시 OO동.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네이다. 추리의 마지막 조각은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온 환자의 보호자를 보는 순간 온전하게 맞춰졌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정말 좋아했던 우리 동네 수제비집 아주머니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수제비에 진심이었다. 수제비를 베어 물은 뒤 이에서 쩍 떨어질 때 느껴지는 그 쫀쫀함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나에게 있어 새로 이사 가는 동네에 두꺼운 수제비를 파는 곳이 어디인지를 미리 알아두는 것은 삶의 중요한 어젠다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 그녀의 가게는 허름했지만 그 안에서 파는 수제비는 만반진수였다. 뜨거운 김을 후후 불어가며 수제비 떡을 흡입하다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투명한 국물에는 반죽이 지나치게 푹 고와질 때 묻어나는 특유의 텁텁함이 없었다. 거의 매주 부모님을 졸라 수제비를 먹으러 가곤 했는데, 집에 가는 길에는 직접 담근 싱싱한 겉절이를 한 봉지씩 꼭 싸주시곤 했으니 거의 VVIP 대접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학교의 다른 반 남자아이가 수제비집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수제비를 먹고 있는데, 주방 쪽 기둥 뒤에서 내 또래의 남자아이가 빼꼼 고개를 빼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아이는 다시 기둥 뒤로 사라져 버렸다. 사건은 다음 날 아침 등교 길에 발생했다. 한 무더기의 반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더니 혓바닥을 날름 거리며 이렇게 놀려대는 것이었다.


"얼레리 꼴레리! 윤정이는 공주, 재선이는 왕자래요 얼레리 꼴레리~"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걔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푸하하, 5반 앞에 가봐. 복도에 다 쓰여있어 바보야."


수치심에 눈물 콧물을 짜며 복도로 올라가보니 정말 누군가 사인펜으로 '윤정 공주 ♡ 재선 왕자'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놓은 낙서가 보였다. 그 옆에는 삐뚤빼뚤 왕관을 쓴 하트 나라 공주와 왕자 그림까지 버젓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얼레리 꼴레리를 합창했고, 나는 점점 더 홍당무에 가까운 색이 되었다.


"야, 너네들 날 뭘로 보고. 나 그런 뚱뚱한 애는 완전 싫어하거든? 이거 누가 쓴 건지 알아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학급 청소함을 뒤져 찾아낸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있는 힘껏 낙서를 문질렀다. 재선이는 또래보다 덩치가 좀 있었고,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는 타입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매일 고생하는 엄마가 하는 식당에 찾아와 주는 학교 친구가 반갑기도 고맙기도 해 좋아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뿐일 텐데. 어린 나는 그저 운동장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나를 복도 끝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재선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낙서를 한 장본인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말을 한 번 더 뱉고야 말았다.


"뚱뚱한 애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나는 두 번 다시 그의 어머니가 하는 수제비집에 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25년 만에 만난 우리는 의사와 환자 관계였다. 친구는 정말로 죽으려고 했다. 목에 밧줄을 감고 1차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자 식칼로 손목을 긋고 그마저도 모자라 건물 4층 밖으로 뛰어내렸다. 흘러온 세월은 왜 그렇게까지 그를 힘들게 만들었을까. 수제비를 팔며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를 외면하면서까지 세상을 등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혈관 색전술을 통해 그의 골반에서 나던 출혈을 멈추게 하고 그어진 손목에서도 더 이상 피가 나지 못하게 혈관을 결찰 했다. 떠나려던 그를 내가 붙잡아 버렸다. 고통을 끝내고 싶었을 친구에게 또 다른 고통을 얹어주고야 말았다. 그의 자상을 헤집고 타이(수술용 실로 결찰 하는 것)를 하며 비명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꼬마 시절 내가 입힌 마음의 상처도 이만큼 아프지는 않았을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젊은 나이인 덕에, 친구는 나날이 빠른 속도로 회복해갔다. 고통에 신음하느라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코로나 시대에 친구가 나를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주머니, 제가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수제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세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보다 맛있는 수제비는 결국 찾지를 못했어요. 그녀를 붙들고 이렇게 말해보고도 싶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의사와 보호자 간의 일반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이제 곧 정형외과로 전과되실 거예요. 손상이 큰데 이만하길 정말 다행입니다."


퇴근길에 들러본 옛 식당 자리에는 번쩍번쩍한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분명 이 자리였는데. 어른이 되어 지워진 삶의 무게만큼이나 어린 시절 우리 동네도 많이 변해있었다.


친구야. 분명 고민도 괴로움도 많았겠지. 산다는 게 너무나 버거웠겠지. 그래서 삭제하고 싶었을 너의 생을 내가 괜히 리셋시켜버린 건 아닐지, 그런 너를 그냥 보내줘야 했던 건 아닐는지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친구야. 그래도 우리 한 번만 더 살아보자. 미치도록 괴롭고 힘들 땐 그저 놀이터에서 뛰어놀기만 해도 까르르 웃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을 한 번만 그려봐. 항상 너의 뒤에 계신 어머니를 아주 잠깐이라도 떠올려봐. 성나고 험악한 세상이지만 우리 이 악물고 살아보자. 0.001 퍼센트의 희망이 아직 세상 어디엔가 남아 있는 것 같다면, 부디 세상에게 너를 품을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줘. 나는 여기서 주어진 나의 사명을 다하고 있을게. 그러면서도 우주의 모든 행운과 용기가 네 남은 인생에 깃들 수 있게 기도하는 걸 멈추지 않을게.


그땐 내가 너무 미안했어.

반갑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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