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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Oct 12. 2024

노견 요양보호사

작년까지 내 별명은 ‘티거 엄마’였다. 마당을 지나가던 엄마가 나를 불렀다.

“티거 엄마야!”

“왜?”

“여기 똥 치워. 티거가 똥 쌌네.”

언제부터 내가 티거 엄마가 된 걸까?

‘티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털로 뒤덮인 래브라도 리트리버다. 서울 단독주택 살던 엄마 지인이 키우던 녀석인데, 감당이 안 된다며 이곳에 파양 시켰다. 족보상 티거를 받아준 사람이 엄마인데, 오히려 내게 ‘티거 엄마’라는 족쇄를 채웠다.


티거는 정말 덩치도 크고, 짖는 소리도 우렁차다. 한 번 짖으면 마을 입구까지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성견일 때 왔으니 2-3살 정도일 테고, 수캐지만 중성화수술을 마쳐 성격은 온순했다. 한 번도 품종견을 길러본 적 없는 아버지는 단박에 티거를 좋아했다. 티거에게서 ‘대학교수’ 같은 기품이 느껴진다며. 그래봤자, 여기선 다른 개들처럼 하루 종일 목줄에 묶인 채 지내는 마당개 처지다. 티거를 보자마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 개가 우리 애들을 물면 어떡하지?’

사실 나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키우던 개를 잡아먹은 후, (다른 집 개랑 바꿔서 잡아먹었다고 하지만, 그거나 그거다.)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 털 달린 짐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걱정과는 달리 애들은 티거를 좋아했다. 특히 7살이었던 둘째는 티거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방학 때마다 시골에 내려와 지냈다.


우리가 이사 오고 나서 손녀만 따르는 티거에게 아버지는 배신자 딱지를 붙였다. 급기야 손녀를 불러서 “티거 살래? 30만 원에 팔게.” 이런 거래를 시도했다.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배신자가 된 티거는 우리 집 현관 앞 포치에서 편히 지냈다. 그렇게 쌓인 애정이 13년. 마당개였던 티거는 어느새 반려견이 되어 우리 집 거실에서 여름이면 에어컨을 쐬며 낮잠을 자고, 겨울이면 따뜻한 기름보일러가 돌아가는 바닥에서 함께 군고구마를 먹었다. 새까맣던 얼굴은 허연 털로 뒤덮여 ‘가오나시’ 얼굴처럼 변했고, 약해진 관절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는 노견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티거를 좋아하던 둘째가 대학생이 되어 타도시의 기숙사로 떠나자, 녀석의 수발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엉겁결에 티거 엄마가 된 나는 하루에 두 번씩 뒷동산으로 산책을 시키고, 똥 싸는 걸 지켜보며 건강을 체크하고, 사료와 간식을 챙겨줬다. 저녁부턴 온전히 티거와 함께다. 컹컹 짖는 녀석을 진정시켜 집 안으로 데려온 후, 간식을 주며 녀석이 잠들 때까지 TV를 함께 봤다. 녀석은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잠투정 같이 끙끙대며 집안을 두리번거린다. 둘째를 찾는 모양인데, 나는 녀석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없다. 제풀에 지친 녀석이 쓰러지면 드디어 나에게도 자유가 생긴다. 티거가 잠이 들었다고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잠이 푹 들 때까지 TV 볼륨을 줄이고, 기다린다. 이건 마치 아기 키울 때 독박육아의 심정이다. 뉴스가 끝나고 티거가 코를 골기 시작하면 그제야 2층으로 올라온다. 중간중간 티거 기침 소리에 잠이 깨면 물을 챙겨줘야 한다. 어쩌다 내가 이 ‘개르신’의 엄마가 되어 시중을 들게 되었는지, 참!


봄과 여름을 넘긴 티거는 날씨가 쌀쌀해지자,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걷는 게 힘들어지면서 계속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하고 수발을 들어야 했다. 티거는 40kg이 넘는 거구다. 티거가 힘들어지자, 나는 엄마에서 요양보호사가 되었다.  딸이 방학해서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너 내가 아파도 티거만큼 돌봐줄 수 있어?”

평상에서 고추꼭지를 따던 엄마가 티거 곁에 있는 나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역시 엄마 말은 당해낼 수가 없다.

“티거만큼만 해주면 되겠어?”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티거만큼이면 충분하지.”

엄마 옆에서 고추를 다듬던 아버지까지 나섰다. 표정을 보니 농담은 아닌 듯했다. 부모님은 지금껏 질투 어린 시선으로 나와 티거를 바라본 것이다. '티거 엄마'라는 말에는 늙은 부모한테는 관심도 없고, 늙은 개만 챙긴다는 질책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하긴 부모에게도 보이지 않은 호의를 배은망덕한 배신자 티거에게 보였으니 질투가 날 만도 했다.

‘티거야, 봤지? 이 아줌마가 부모에게도 보이지 않는 호의를 베푼 거야. 그러니까 힘을 내서 이 겨울을 나자.’

나는 티거를 보며 주문을 걸었다. 티거가 생의 마지막을 가장 좋아하는 둘째와 충분히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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