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 판정을 받기 전 아버지의 일상은 더없이 순조로웠다. 기대하지 않은 깨농사가 잘 돼, 다섯 가마 넘게 들깨를 수확했고, 마지막 남은 트랙터 할부금도 갚았다. 그림자처럼 딱 붙어 어딜 가든 따라다녔던 대출빚에서 해방된 것이다. 게다가 연금도 올라 세 자릿수의 연금을 받게 됐다. 이제 당신이 연금생활자 반열에 올랐음을 자랑하며, 농사도 슬슬 줄이겠다고 했다. 듣던 중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12월에 제주도 여행도 다녀오셨다. 제주도는 한 번 가보고 죽어야 한다며 코로나전 가려던 여행이 미루고 미루어져, 이제야 생애 처음으로 제주도에 발을 들인 것이다. 가서 뭐 볼 거 있냐, 그 돈으로 회나 실컷 먹고 싶다던 아버지는 아들이 여행경비를 다 낸다고 하자, 못 이기는 척 비행기에 올랐다. 나도 큰애와 함께 그 비행기에 무임승차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서열 1,2,3,4가 함께한 가족여행이었다. 제주도 별로 볼 거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물론 회도 실컷 드셨다.
제주도를 다녀와 마음이 넉넉해진 아버지는 반려견을 잃고 슬픔에 빠진 손녀를 위해 바람이나 쐬고 오라며 용돈을 주셨다. 가보니 별 건 없는데, 회는 맛있다며 채식하는 손녀에게 여행자랑을 했다. "티거가 나를 부르고 있어."라는 농담에, 둘째는 미간을 찌푸리며 용돈을 챙겼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희망찬 새해를 맞았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생굴을 먹고 탈이 났다. 구토와 설사, 장염 증세로 살이 빠지고 탈수증세까지 왔다. 항생제로 버티다 대장 내시경을 했고, 대장암일 수 있으니 큰 병원에 가보라는 소견을 들었다. 희망찬 새해에 먹구름이 끼었다. 보훈병원과 대학병원을 왔다 갔다 하며 검사를 하는 사이 아버지는 예민해졌고, 히스테리도 심해졌다.
이미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끊은 나는 암이어도 초기일 테니 너무 걱정 마시라고 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말기암일지 모르는데, 저렇게 관심이 없다며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냈다. 매일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 때문에, 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늑대가 나타났다' 소리에 하루이틀 속은 게 아닌데, 순순히 끌려다니기 싫었다. 어떡하든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내 일상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속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둘째를 데리고 제주도로 튀었다.
여행을 다녀온 이틀 후,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암이 간 전체에 퍼져 이식수술도, 색전술도 어렵다고 했다. 이번엔 진짜 늑대가 나타난 것이다! 신약으로 항암치료를 해 보자는 대학병원을 찾았고, 아버지는 당장 입원을 결정했다. 1차 항암치료를 위해 아버지를 대학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종묘상에 들렀다. 미리 신청한 고추모종을 데려와야 했다. 줄이고 줄여서 신청한 사천 개의 모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파릇파릇 자라는 모종을 보니,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음날 온 가족이 출동해 모종을 모판에 옮겨 심었다. 아침 일찍 오신 마을 할머니들 덕분에 모종 심기는 점심 전에 끝났다. 아직은 썰렁한 비닐하우스에 여린 생명이 가득 찼다. 이제 얼어 죽지 않게, 말라죽지 않게 잘 키우는 일만 남았다. 긴 철사를 아치형으로 박아 그 위에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또 두세 겹의 천을 덮었다. 일종의 모종 하우스인 셈이다. 오전엔 덮개 천을 벗겼다가, 오후엔 다시 씌워야 한다. 또 해가 떨어지면 덮개 안에 전기히터를 틀어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추위에 약한 고추 모종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모종 사진을 찍어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버지는 "수고했네!"라는 문자와 함께 수액을 맞는 자신의 셀카를 보냈다. 긴장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 희망은 있고, 일상은 유지되었다.
신약을 맞은 아버지가 퇴원했고, 항암이 시작되었다. 1차를 잘 버텨야 2차, 3차 항암도 할 수 있다며 의지를 불태웠지만, 아버지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모종들이 단단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말라갔다. 항암 10일 차 아버지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2차 항암 때까지 버틸 거라던 아버지는 결국 응급실에 실려갔다. 의사는 급성 패혈증으로 오늘밤이 고비라며 임종준비를 하라고 했다. 임종이란 말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날 밤 고비는 넘겼지만, 의사는 간이 전혀 기능을 못한다며 남은 시간이 길어야 3개월 정도라고 했다. 2차 3차 항암을 기대했던 희망이 모두 사라졌다. 불과 보름 전 신약에 희망을 걸며 셀카를 올렸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구급차에 실려 보름 만에 집에 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다. 바리깡으로 짧게 민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살았어."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온 게 믿기지 않아서일까? 무시무시한 어둠의 골목을 혼자 헤매다, 비로소 집을 찾은 아이처럼 아버지는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저런 표정으로 우는 모습을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이 더 슬퍼 보였다.
말기암 때문에 아버지도 우리도 소소한 일상을 잃어버렸다. 싸우고, 울고, 웃고 걱정했던 모든 일상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따뜻해진 날씨 덕분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쑥쑥 크는 고추 모종만이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었다. 덮개천을 열고, 물을 주고, 모종의 상태를 살피고, 다시 덮개천을 덮고, 히터를 틀고, 비닐하우스를 덮고... 전에 아버지의 일상이었던 모종 키우는 일에 우리는 정성을 쏟았다.
모종이 다 자라 밭에 아주심기를 할 때쯤 아버지는 다시 혼수상태가 되어 응급실에 실려갔다. 대문을 나서는 구급차를 보며, 아버지가 다시 살아서 집에 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진짜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이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고추 모종을 밭에 심었다. 키운 모종 중 절반 정도는 팔고,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모종 상태가 좋았다. 종묘상에서 파는 모종보다 2배는 키가 크고 줄기도 두꺼웠다. 사람들이 모종을 잘 키웠다고 한 마디씩 보탰다. 밭에 가지런히 심은 고추 모종이 가득 찼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니, 밭에서 고추 모종이 우릴 반겼다. 조금 커진 잎사귀 사이로 하얀 꽃도 폈다.
"아버지는 못 살리고, 고추 모종만 살렸네."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모종이라도 살린 게 어디야!"
동생이 말했다.
그래, 모종이라도 살린 게 어딘가! 아버지가 살아계셨대도 모종 잘 키웠다고 칭찬했을 거다.
엄마는 아버지가 입던 작업 조끼를 입고 나와 고추 줄을 묶기 시작했다. 나중에 하래도 엄마는 말을 듣지 않고 고추밭으로 갔다. 노란 조끼를 입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언뜻 아버지 같기도 했다.
멈추었던 우리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아버지 없는 일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