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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Oct 26. 2024

고추를 따다가

새벽부터 매미 소리가 시끄러웠다. 

매일 폭염을 경고하는 문자가 울리고, 고추는 따고 돌아서면 언제 땄냐는 듯 새빨갛게 붉었다. 밖은 환하고 매미는 울어대니, 더 자려해도 잘 수도 없다. 

요즘 마을 할머니들의 관심사는 고추 농사다. 아버지보다 앞서 돌아가신 전 노인회장님 부인께서 며칠 전 나를 붙잡고 하소연하셨다.

“고추 많이 땄슈? 우린 날을 잘못 잡았어.”

혼자서는 딸 수 없고 자식들이 와야 하는데, 휴가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아 애타는 모양이다. 

“고추 땄어? 우린 100짝이나 땄어. 고추라면 아주 진저리나!”

90살이 넘은 할머니가 하는 인사다. 마을에서 고추 농사를 제일 많이 짓는 집이다. 농사는 아들 손에 넘어갔지만, 고추를 딸 때 동원되는 모양이다. 고추라면 진저리가 난다는 할머니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벌써부터 나도 고추가 진저리 난다.    

  

그저께부터 고추를 땄다. 이번이 네 번째 수확이다. 첫 번째, 두 번째는 수확량이 얼마 안 됐는데, 지난번부터 본격적으로 수확량이 많아졌다. 한 골에 3-4 포대씩 고추가 나오니, 한 골 따는데도 꽤 시간이 걸린다. 주말이라 남동생도 새벽부터 내려와 고추를 땄다. 고추는 생각보다 실하고 잘 됐다. 장마철이 지나도록 무르지도 않고 탄저병도 안 왔다. 엄마가 틈나는 대로 아들을 닦달해서 농약을 잘 준 결과다.     

 

1차 항암치료를 위해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종묘상에 들러 고추 모종을 가져왔을 때, 이 모종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걱정했다. 호스피스 병실로 옮기신 아버지를 두고, 비닐하우스에서 고이고이 길러낸 고추 모종을 밭에 심을 때도 모종이 제대로 자랄까 의심했다.

아버지 장례를 다 끝내고 집에 온 엄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밭에 심은 고추 모종 사이에 알루미늄 막대를 박고, 줄을 묶는 일이었다. 아버지 등산 조끼를 입고 낡은 배낭을 메고서, 엄마는 고추밭에서 줄을 묶었다. 혹여 애써 키운 모종이 쓰러지면 안 되니까, 팽팽하게 줄을 감았다. 나중에 하라고 해도 엄마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 년 중 고추를 딸 때 표정이 가장 좋았다. 모종 키우기부터 시작해, 밭에 거름 뿌리고, 두둑치고 모종 심고, 고추를 거두기까지, 그 많은 노동의 결과가 새빨간 고추로 보답을 한 것이니, 표정이 좋을 수밖에 없다. 빨간 고추는 곧 돈이다. 또 이맘때 읍내 장에 가서 고추 시세를 알아보고 자랑하신다. 한 근에 만 오천 원이면, 천 근이면 천오백만 원이다. 나는 매번 씨값, 농약값, 인건비를 빼야 한다고 했지만, 그런 말은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올해는 고추 시세가 얼마나 하려나…. 

이제 자랑할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가 가신 지 겨우 백일도 안 됐다니!    

 

고추를 따다 보니, 아버지 생각이 절로 났다. 아버지와 고추 농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고추를 따다가도, 씻어 말릴 때도, 마른 고추를 다듬을 때도 매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씩씩하게 고추를 따던 엄마가 고추밭을 나오며 울먹였다. 

“아빠가 너무 불쌍해. 먹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다 갔어.”

엄마는 고추 포대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아빠 보고 싶으면, 꼴통, 싸가지 바가지만 기억해.”

나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했던 안 좋은 말을 골라서 상기시켰다. 

“이제 꼴통 소리 안 들으니 좋지, 뭐!”

동생도 거들었다. 그러자 엄마가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우리도 별 수 없었다. 가족단톡방에 올라온 밭에 두둑을 치는 아버지 영상에, 

그냥 두둑을 치며 손을 흔드는 그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가장 강력한 안티였던 나와 여동생이 식탁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하필  옆에 있던 남편이 산울림의 '회상'을 BGM으로 깔아 우리 자매를 더 울렸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네

(...)

우, 떠나버린 그 사람

우, 생각나네

우, 돌아선 그 사람

우, 생각나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도 지나고 있다.

아버지는 잃었지만, 고추는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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