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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Sep 11. 2024

시골은 그런 것이다

시골에 집을 짓기 시작하던 그해, 지인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여행 첫날, 지인의 지인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제주도로 귀농해 당근 농사를 짓는 청년을 만났다. 여차저차하여 아버지 고향인 시골에 집을 짓고 있다고 하니,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꼭 읽어보라고 했다. 시골살이에 필요한 조언이 담겨 있다며. 8년 전이라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뿔테 안경 너머 진지한 눈빛은 생각난다. 


물론 서울로 돌아와 겐지 선생은 까맣게 잊었다. 집짓기 과정에서 생기는 뻔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공 기일은 자꾸 늦춰지고, 마감공사는 엉성하며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막판에 건축소장이 핸드폰을 끄고 잠수 타는 일까지 벌어졌다. 크고 작은 하자 상태에서 집은 완공됐고, 시골에서 부모님과 한집살이가 시작됐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친정 부모님인데, 자꾸 시부모님을 모시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저녁 밥상을 차리고, 틈틈이 농사일과 각종 심부름에 시달리고, 1층 방을 부모님께 내드리고, 급기야 우리 부부는 다락방에서 자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 생각했던 전원생활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문득 부모님과 합가 전 갔던 제주도 여행이 생각났고, 당근 청년의 진심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15km 떨어진 도서관에 가서, 겐지 선생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빌렸다.  

책에는 될 수 있으면 시골에 오지 말라는 협박 같은 조언이 담겨있었다. 시골은 낙원이 아니며, 풍광이 좋을수록 살기가 힘들고, 시골 사람들 또한 도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라서 지역의 기질을 모르고 갔다가는 낭패를 당한다는 얘기다. 더욱이 '프라이버시의 경계선' 지키는 걸 미덕으로 살아왔던 나 같은 인간에게 시골은 힘들 것이란 충고다. 


"자기 집과 다른 집을 그리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아, 상대방 사정 따위는 개의치 않고 아무 때나 찾아와서는 부르는 동시에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오는 깔끔 치 못한 왕래에 피로를 느낄 것입니다.(...) 결국에는 논두렁길 저 너머에서 오는 모습만 봐도 몸이 오싹해집니다."


내 이야길 써 놓은 것 같았다.  서문에 적힌 ‘후회뿐인 비참한 인생 2막을 맞는 경우’가 꼭 나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겐지 선생도 ‘엎질러진 시골생활은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독채를 지어 분가했다. 문만 열면 코앞이 부모님 집이니,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니, 최대한 거리감을 유지해야 했다. 내 경계대상 1호는 바로 우리 부모님이다. 


그렇게 8년째 부모님과 살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게 됐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끌어당겼던 아버지가 사라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진짜 거리가 생겨 버렸다. 발인이 끝나고 화장터에서 아버지 유골함을 모셔 왔다. 아버지가 콩농사를 짓던 밭 위쪽에 집안 납골묘가 있었다. 


유골함을 모시고 마을로 들어서자, 감나무 아래 평상에 마을 할머니들이 잔뜩 모여계셨다. 허연 머리카락에 쪼글쪼글한 얼굴,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평상 가득 앉아서 한 줌 뼛가루가 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 앞에 차를 세웠다. 엄마가 내리자, 할머니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등을 쓸어내렸다. '프라이버시의 경계선'이 희미한 그들은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슬퍼했고 위로를 건넸다.


엄마는 울음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마을 할머니들은 평생 농사짓고 남편을 먼저 보낸 선배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버지를 성실하고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애썼던 멋진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유골함을 납골묘에 모시고, 내려올 때까지도 할머니들은 근처까지 유모차를 끌고 와서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마을 할머니들이 모두 배웅해주고 있었다.  


아침 산책을 갈 때마다 아버지 유골함이 있는 납골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지나가던 할머니들이 "아버지한테 인사 왔어?" 하고 묻는다. 

엄마는 점심 저녁을 거의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과 해결한다. 남편과 먹던 밥을 이제는 할머니들과 먹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후회뿐인 비참한 인생 2막'은 끝나고, 이제 3막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시골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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