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도(得道)하면 자유롭고, 그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고 곧 행복일까? 앞의 경허 스님의 예를 보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서 방랑 생활을 하는 동안 현지인들에게 ‘득도’를 영어로 설명해주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득도하지 못한 상태이니 당연히 설명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단순히 득도란 Achieving Enlightment “라고 설명했지만 Enlightment 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막연한 말이었다. ‘열반(涅槃, Nirvana)’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너무나도 설명이 복잡해지니 그냥 ‘Enlightment’ 로만 설명했는데 이는 외국인들에게도 막연하지만 무언가는 생각할 단초를 제공해 주는 듯했다.
경허 스님의 이야기를 읽고 난 득도를 이렇게 정의 내렸다. 어떤 의문(화두; 話頭)을 가지고 오랜 세월 사색과 명상으로 공부를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뇌리에 섬광같이 스쳐가는 한 줄의 지혜가 나타나는데,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아서 자신이 가진 얽히고설킨 모든 의문의 실타래를 한 번에 풀어버리는 마법 같은 마스터 키로 삼을 수 있다면 그 경지가 바로 득도일 것이다. 그러나 득도란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간 수행자만 얻을 수 있는 그렇게 접근로가 제한된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명상하여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그 일단의 생각이 일관성과 보편 타당성을 갖추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모든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마스터 키가 된다면 바로 득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 시점에서 내 방랑 인생 동안 읽고,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바를 종합하여 내릴 수 있는 득도의 마스터 키는 자유이다. 그 자유는 거리낌 없는 마음의 절대적 자유이다. 그것은 경허처럼 그물을 통과하는 바람 같고, 소 닭 보 듯 객관적이고, 장애가 있으면 비껴갈 줄 아는 물처럼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그런 마음의 상태일 것이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공부와 자기 성찰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본적 인성을 갖춘 다음, 재물, 명예 그리고 애증 등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너무 집착하여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 입장을 늘 견지해야 할 것이다. 또 갈등을 일으키는 중대한 판단과 결정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여 온갖 미혹, 편견, 증오 그리고 무의미한 호불호를 떨쳐 버린 상태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원칙 아래 중용(中庸)의 선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면 스스로 찾아 듣거나 읽은 충고, 경고, 책, 가족, 소속 단체, 도덕, 종교적 가르침 심지어 강행 법규까지 모두 나에게 꼬뚜레가 되어 나를 구속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오욕칠정(五慾七情)이 있는 한 태어나면서부터 코뚜레를 끼울 수 없는 즉 콧구멍 없는 소같이 자유로운 이는 없을 것이다. 결국 콧구멍은 스스로 막아 버려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나에게는 코뚜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으로서 오욕칠정을 다 버려야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투명 인간도 아니고 인공지능(AI)을 갖춘 로봇도 아닌데 어찌 모든 오욕칠정을 다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불교에서는 온갖 집착을 다 끊어버리면 번뇌도 사라진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어찌 현대의 고도화 물질 사회를 살아가는 선남선녀(善男善女)로서 모든 집착을 하루아침에 칼로 무 자르듯 잘라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 한낱 보통 사람이니 당연히 꼬뚜레가 있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고삐가 매어 있다. 문제는 코는 하나인데 코뚜레는 주렁주렁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달려 있고 그 고삐 끝을 잡고 있는 이도 여럿이라서 어느 때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는 것이다.
물욕과 소유욕, 어쭙잖은 자존심과 명예로 포장되는 체면, 운명 같은 인연, 내 업보로 만들어낸 가족, 육신의 안일함과 쾌감, 수자상(壽者相)과 그에 기인한 아집(시쳇말로 소위 꼰대 기질) 내지 편집증, 과도한 희로애락의 집착, 나의 편견 내지 호불호, 내가 속한 집단의 관습과 관행, 목표, 가치관, 종교 등, 그리고 나의 인생은 행복해져야 된다는 생각조차도 모두 나의 코뚜레이다. 심지어는 내가 듣고, 읽고, 배우며 체득한 경험과 지식조차도 어떤 때는 나를 끌어당기는 코뚜레이다.
일상의 예를 들어 본다면, 서울의 교통 체증이나 휘발유 가격을 고려할 때, 배기량 2000cc 이하의 중소형차가 나에게는 적당하다. 그러나 자동차 회사 중역 출신이라는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대형차를 샀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남자가 부엌에 와 이것저것 음식 집어먹거나 설거지를 하면 단호하게도 ‘불알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엌에 들어가 가끔 설거지해주는 데까지 몇십 년 걸렸다. 나의 자존심과 체면, 어머니의 남자의 길 가르침, 다 나에게는 한동안 꼬뚜레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의 모든 코뚜레를 훌훌 벗어던지고 영원히 다시는 코뚜레가 채워지지 않도록 콧구멍을 콱 막아 버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