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마텔
소년이 조약돌을 손에 쥐었을 때 그는 그것이 시간에서 구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소년이 쥔 것이 조약돌이 아니라 이 손이었다면, 자신도 구출되었을지 알고 싶었다. 소년은 그것이 유품 같다고 하였다. 죽은 사람의 방을 정리해 태우고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었던 것들만 모아놓은 조그만 상자 같다고. 그에게 그것은 이야기였다. 크고 강퍅한 바윗덩이가 오래도록 시간에 쓸려간 이야기. 조약돌은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알고 본다. 외부가 죄다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비듬들로 모여 쌓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약돌은 주변을 막아선 담과 외벽, 기둥이 제아무리 낯설고 거대해 보일지라도 다 제 살비듬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단숨에 불어서 폴폴 날려 버릴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동의하지 않는 듯 팔을 거두어들이더니 한순간 눈을 부릅뜨고 전광석화, 돌을 던져 버렸다. 물결은 소리도 없이 덥석 삼켰다.
조약돌이 돼보기도 전에 조약돌을 겁내는 거야?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소년의 말 없는 반문을 되풀이해 듣고 이렇게 뇌었다.
하지만 신우휘, 나는 보통의 인간이야. 일희일비하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신처럼 거침없던 시절은 지났어.
흐르는 물결이 아득하였다. 구불구불 넋을 빨아들이는 물결이었다. 너무도 끊임없고 너무도 단조로워 사람을 질리게 할 작정으로 저렇게 흐르나 싶었는데, 그가 떠밀려가고 있었다. 물결은 가만있는데, 어느 틈에 그가 흘러가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움켜쥘 것이 필요했다. 그는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한껏 떠밀려 내려가며 신우휘, 부르짖었다. 약간 쉰 듯한 미성이 거품처럼 꺼지자 눈앞엔 시퍼렇게 꿈틀대는 잔물결뿐이었다. 소년이 옆에 서 있었다.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소년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셔츠 가슴팍이 펄럭이며 조용히 매달려 있던 단추들이 앞다투어 비밀을 열어 보이려는 듯 한꺼번에 닥쳐왔다. 그는 소년의 들썩이는 머리칼 사이를 지켜보았다. 번뜩이는 눈동자와 부딪쳤을 때, 그는 자신의 몸에 눈부신 균열이 일어나리라는 걸 깨닫고 소스라쳤다. 숨쉬기가 곤란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회색의 두터운 표면이었다. 그 표면에 번개 같은 금이 그이고 섬뜩하게 깨지려던 순간이었다. 깼다.
막힌 천장이 마주 보였다.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그, 뿐이다. 낙조가 방 안에 퍼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갔다. 물이 닿자 입이 벌어질 만치 얼굴이 따끔하고 홧홧했다. 거울을 문질러 보니 뺨마다 발진이 일어나 울긋불긋했다. 특히나 미간 가운데에 돋은 그것은 핏방울이 맺힌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그는 철쭉꽃이 폈네, 라며 다소 의외의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지워버릴 듯 요란하게 비누칠을 해댔다. 뿌옇게 차오른 물은 더디게도 내려갔다. 그는 구멍을 휘도는 거품 섞인 물줄기를 응시하다 그것이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식했다. 그러자 거품이 별안간 반대쪽으로 돌며 구멍에 고이었다.
감정과 이성의 방향이 다르면 마음먹기대로 간다?!
그는 이렇게 자문하며 잠시 우두커니 섰다 표정을 싸늘히 굳히고 욕실에서 나왔다. 늘 입는 셔츠와 바지, 턱시도 재킷을 털어 입고 마지막으로 목줄을 머리 위로 통과시켰다. 깃 밑의 나비가 삐딱했다. 그는 맑게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어느새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처음엔 어색해서 대충 보아 넘기던 타이의 각도 따위가 이다지도 신경 쓰이는 걸 보면. 신우휘,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이 차림을 하고 문밖에 나가야 한다고.
그는 커튼을 홱 밀어젖혔다. 변함없이 맞은편 옥상에서 무동력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환풍기 뒤로는 피뢰침이 구름을 찌르는 하늘이 펼쳐졌다. 건물 지붕마다 하나씩 솟은 피뢰침은 홀로 드넓은 하늘을 상대하기라도 하듯 찌를 듯한 기세로 왜소하게 서 있었다. 인간이 만든 것 아니랄까 봐 너무도 인간을 닮은 모양새에 그는 콧바람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봐. 이게 바로 내 전망이야. 알아, 신우휘?
그는 도중에 멈춰 섰다. 교대 시간에 맞추려면 바로 가야 했지만 사나운 모양의 하늘 앞에서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발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갑작스런 한기가 척추를 타고 흘렀고 목구멍이 콱 막혔다. 갈빗대를 치는 심장은 발굽소리를 내며 뻗어 나와 창유리를 떨게 했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붉은 기운이 잠시 겹쳐진 것뿐인데, 이게 어째서 황소의 얼굴을 하고 있나. 그렇게 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보일 뿐이야. 여기는 해가 지는 세계다. 혈색을 잃고 파리해지다 끝내 파열해버리는 하늘을 덮어쓴. 가자. 발을 들어 올리고 몸을 비틀어. 어서. 그러나 생각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얌전해지기까지 기다렸다. 다시 눈 떴을 때 불 밝힌 층계참이 유리 위로 떠올라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주먹을 쥐고 불거진 마디뼈로 타격해 보았다. 유리는 완강했다.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치다 관두고 숨을 골랐다. 유리에 비친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목이 조이었다. 그는 와이셔츠 깃 아래로 손을 가져가 팽팽한 목줄을 당겼다 놨다. 나비가 기우뚱 늘어졌다. 넌더리가 났다. 발을 뗐다.
한 번에 세 계단씩 뛰어내리다 문득 뺨을 만졌다. 지배인은 평소 말끔한 용모가 서비스의 기본이라 강조해왔다. 아마 서비스의 바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새 돋아난 거야. 지배인이 뭐라 해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잖아. 싹 밀어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기껏해야 의료실에 보내는 정도일 텐데. 그는 의사의 진단이 궁금했다. 큰 병의 전조증상으로 의심되니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할지, 아니면 단순한 알레르기성 염증이니 주의해서 연고나 바르라고 할지. 어쨌거나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당신은 안드로이드가 아닙니다. 안드로이드라면 발진 따위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일을 하게 된 후로 그는 자신이 안드로이드 같단 생각을 자주 했다. 필요해서 하는 일, 요구되는 일들만 하게 되면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쓸데없는 일들로 빈둥거리는 시간을 약으로 처방 받아도 그것 역시 필요에 의한 것이니 효험이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배인은 안드로이드에 대해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적절한 순간 은근하게 다가서는 세련된 몸가짐을 어떻게 표준화시키겠느냐는 논리였다. 시시각각 바뀌는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읽고 재치 있게 낄 때를 알아야 하는데 무신경인 기계로 그게 되겠냐며 우쭐해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유명 리서치 기관의 설문조사에서 최초로 승무원을 제치고 미래에 사라지지 않을 직업 2위에 오른 것이 뉴스에 보도되고부터는 더욱 의기양양해져 틈만 나면 이 일의 대체불가능성에 대해 논증하려 들었다. 그런 지배인의 눈에 요 발진은 일종의 먹칠처럼 보이겠군. 하지만 그는 좋았다. 희끄무레하던 혈색이 발진의 영향으로 생기 돌아 보였다. 홍조를 띤 소년처럼.
대리석 바닥으로 프로젝터가 내쏜 선전 문구가 나타났다.
마트와 호텔을 하나로, 신개념 마텔!
금실로 짠 망사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핥으며 지나갔다. 그는 옆으로 비켜났다. 오려낸 듯한 옆얼굴이 시야에 걸렸다. 드레스 색조에 맞춰 염색한 머리칼을 돌돌 말아 정수리 위까지 틀어 올렸다. 아직 젊게 보이지만 한창때를 지난, 여인의 얼굴이었다. 홍조가 깃들지 않은 표정엔 우윳빛 그늘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리워져 잘 말려 올라간 입가에서 도로 웃음기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미인이라 불릴 얼굴이었지만 그 미모에선 세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심스럽고 메말라 보였으며 속임수 같았다. 석연치 않은 미모라고 그는 느꼈다. 노골적인 순간도 있었겠지. 공사하는 과정처럼. 처음엔 뼈대를 고스란히 내보이다 차차 그 위에 시멘트가 발리고 벽지가 발리고, 그럴싸해지지. 말끔해지지. 세상엔 이제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 없어. 고스란히 남은 것들은 야만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거칠게 다루어지지. 당신의 주름처럼. 그의 눈이 날카로운 각도로 여인을 훑었다. 그물처럼 몸에 밀착된 드레스가 어깨를 반쯤 싸고 내려와 그림자마저 덮는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드레스는 여인을 마치 금박을 살짝 젖힌 초콜릿처럼 눈길을 끌게 만들었지만, 초콜릿은 그 맛이 궁금해 까 먹어보고 싶을지언정 초콜릿이 그걸 원할지, 초콜릿도 같은 마음일지 궁금해지지는 않는 대상이다. 소비란 일방적인 것이다. 여인의 미모는 소비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떠나갔다.
그들이 눈에 띈 건 바로 그때였다. 홀 왼편 가장자리를 일렬로 걷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아래위가 붙은 메탈 소재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무게와 부피는 생략하고 얼추 느낌만 살려 재봉한 간편 우주복 같았다. 처음 보는 의상이었다. 여태껏 저런 옷을 입은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포춘 쿠키 문구보다야 기분이 전환되는 광경이었다. 보고해야 할까? 그는 약간 뜸들이다 상황 봐가며, 라는 조건을 붙였다. 여차하면 우주복이 떴다 말해 지배인의 주의를 돌려버려야지.
카운터는 비어 있었다. 그새 퇴근했는지 교대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출근체크화면에 얼굴을 디밀어 홍채 인식을 시키고 얼른 자기 몫의 쟁반을 챙겨 갔다. 잡담하는 남녀들의 구둣발 사이를 요령껏 피해 다니며 이따금 한 손에 받쳐 든 쟁반을 내밀었다. 나긋나긋 친절하게 손으로 짚기 적당한 높이로. 이것이 그의 일이었다. 엄연히 이름을 부여받은 일이었다. 듣거나 입으로 뱉을 때마다 관자놀이가 꿈틀대고 뼈마디가 움찔하는 아주 긴 이름. 지배인이 손수 지은 닉네임이었다.
폼 나잖아.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해. 안드로이드보다 한 자가 더 많아.
몇몇 손들이 쿠키를 집어갔다.
금방 허기가 지죠?
분홍으로 칠한 입술이 말했다. 턱이 자그마한 앳된 얼굴이었는데, 쿠키를 깨부수는 앞니에도 입술같이 분홍 칠 범벅이었다.
반지하에 드는 볕처럼 넉넉지가 않죠.
여자의 눈 밑은 검었다.
다른 걸 먹어봐요. 초콜릿이 듬뿍 발린 걸로요.
여자와 마주 선 남자가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말했다. 남자는 꼬리가 짧은 비단 연미복 차림이었다. 말끔하게 면도된 턱 끝에 딸기잼이 흘러 있었다. 여자는 초콜릿 크림이 사이에 발린 샌드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구부러진 손끝이 파르르 떨리더니 쥐고 있던 쿠키 표면을 뚫고 들어갔다. 여자는 황급히 입 안에 넣고 손가락을 내렸다. 손톱 사이에 낀 초콜릿이 번져버린 눈 화장 같았다. 남자가 하품을 했다. 손등으로 딸기잼을 슥 닦으며 지금이 몇 시죠?, 물었다. 붉어진 여자 목줄기에 시퍼런 혈관이 한 가닥 돋치고 남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졸린 듯 눈을 비비었다. 여자의 두 눈은 깜빡임도 잊은 채 이마가 퍼레지도록 뜨여만 있었다.
그는 눈길을 떼었다. 쟁반을 거두어들였다. 신선한 공기가 마시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