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9장 임무

by 수연


이신추가 무리를 이끌고 계단 왼편 그늘로 들어섰다. 그녀는 막 내려온 층계 벽을 왜 거슬러 가는지 궁금하면서도 등뒤의 낯선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 얼굴엔 자신처럼 열꽃이 퍼져 있었다. 소년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살며시 돌아보려다 대열이 멈추어 그만뒀다. 계단의 측벽이 끝나는 우묵한 지점에서 이신추가 오른손을 벽면에 대고 있었다. 성냥갑 유황을 긁듯 요령껏 쓸어내리자 벽이 뻐끔 열리고 안으로 책걸상의 배치가 들여다보였다. 칠판 앞에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먼저 들어간 이신추가 교탁 가까이 책상에 놓인 프로젝터를 작동시켰다. 줄이 빠르게 짧아졌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걸상에 앉았을 때 이신추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마텔은 많이 변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만 해도 갓 걸음마를 뗀데 불과했지만, 지금 이곳은 궁극적인 합의에 도달한, 어엿한 세계다. 실은 하선할 때, 마텔 여주인으로부터 신호를 받았다. 내게 임무를 맡겼다. 모두의 협조가 필요하다. 우선 주목하기 바란다. 이 영상은 업무능력테스트의 일환으로 대원들 몰래 찍었음을 양지해주기 바란다.

몰래 찍었다고! 그녀는 바싹 약이 오르는 걸 참으며 프로젝터가 쏘아올린 영상을 마주했다.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사생활을 찍어 만인과 공유하는 것이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사생활과 공적인 업무의 경계선이 남아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스크린은 대원들이 일렬로 걷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서!

이신추가 갑자기 외쳐 불렀다.

넌 걸음이 한참 뒤처져서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지도 않다. 언제 화면에 잡히는지 볼까?

이신추가 손목시계와 스크린을 번갈아 보며 초읽기에 들어갔다. 동료들이 화면 밖으로 거의 나가버린 시점에 그녀는 포착되었다.

5초. 넌 협업능력에서 최저점을 받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사방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비웃는 눈동자.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눈짓을 주고받는 참새같이 약은 패거리. 그깟 걸음속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그건 지나친 비약 아니면 오만이야! 그녀는 속으로 항변했다. 정작 제대로 평가되어야 할 자신은 보이지 않던 그 5초간의 시간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 밖의 그녀는 어쩌면 쫓기듯 큐브를 맞추던 손을 멈추고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을지 몰랐다. 바로 거기야. 눈에 띄지 않던 그 순간이 바로 경계야.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언니의 걸음걸이가 떠올랐다. 고개를 숙인 채 뒷짐을 지고 목을 앞뒤로 들먹이며 걷던 언니의 모습은 종종 숲길에서 마주치는 까치 같았다. 꽁지를 바짝 추키고 목덜미를 주억거리며 걷던 까치는 이따금 멈추어 궁리하는 듯한 까만 눈동자로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곤 했었다.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앞으로 부지런히 걸어 나가는 도중 내부로부터 복받쳐 오르는 왜, 라는 질문에 압도되어 갑자기 꼼짝도 못했다. 그러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 강력한 물음표에서 풀려나와 문득 고개 들어 처음 보는 풍경인 양 낯설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마치 여기서 더 걸어 나가기 위해선 지금까지 봐온 것보다 창창한, 탁 트인 전망이 펼쳐져야 한다고, 그렇지 않고 똑같이 얽매일 것 같으면, 이대로 공중에 휘발되겠다고 맹세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언니는 보았을까. 언니를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놀랍고 기쁘게 할 무지갯빛 전망. 그녀는 기억했다. 숲을 한 바퀴 빙 돌아 나와 다시 초입에 선 순간이었다. 앞에 펼쳐진 광장엔 들어올 때 보았던 아저씨 한 분이 짙은 색 옷을 입고 똑같이 어깨를 구부린 자세로 지나가고 있었다. 언니의 두 눈은 그때와 달리 아저씨를 향해 있지 않았다.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난날 보지 못한 쪽으로 눈이 간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웃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언니가 웃었다. 한결 너그러워진, 그러면서 기대에 찬 미소가 전에 없이 화사하고 신비로워서, 그녀는 그 미소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딴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미소를 직접 체험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래서 이토록 멀리까지 오는 선택을 하게 됐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미소와의 간극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벌어져 그게 정말로 미소였던가, 그녀는 자꾸만 되묻게 되는 것이었다.

영상이 바뀌었다. 이번엔 대원들끼리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의견이 분분해 보였다. 옥신각신하는 장면들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비교적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듣다 한마디씩 던지는 사람은 조종사였다. 하나 둘, 그러다 한꺼번에 몰려들며 대원들이 조종사를 에워쌌다. 빙 둘러선 모양이 무슨 철책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깨와 어깨 사이 세모지게 깎인 얼굴은, 그녀였다. 그녀는 대원들 뒤에서 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발진투성이 화약고 같은 얼굴이 스크린 전체로 확대됐다. 그녀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 심술궂은 야유가 퍼져 왔다. 그녀는 조용히 수첩을 꺼냈다. 스프링에 꽂아둔 연필을 뽑아 썼다.

‘보이지 않는 장면에서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고, 보이는 장면에서는 저주였다.’

이신추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협업능력 최고점자가 누군지는 봐서 알겠지? 제대로 듣고 말하는 이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통섭능력에서는 김서가 최고점을 받았다. 왜 그런지는 이번 비행을 겪으면서 모두들 잘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임무는 비밀리에 접촉해서 연결되는 것이 관건인 일이다. 대원들도 알다시피 나는 탁월한 교섭능력 덕분에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번 임무는 나와 김서가 맡기로 하고 다른 대원들은 일단 대기한다.

그녀의 눈이 순간 빛났다. 이신추는 잠자코 바닥을 응시했다. 몇몇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몇몇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신추가 통로를 걸어와 맨 끝줄에 앉은 그녀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소년을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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