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그녀가 말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즉흥적으로 받아친 말이었지만 뱉는 즉시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하지 그러냐고 언니가 넌지시 설득조로 말했을 때, ‘그럼 기다려야 하잖아, 시간은 생명인데’라고 그녀가 받아쳤던 것이었다. 무엇도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낼 수 없었다. 찬바람이 살랑이는 미풍으로 바뀌었다 해도 그녀의 솜털은 흔들었을망정, 발바닥만은 간지럽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장에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까지 읽던 책의 내용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어마어마한 시간대를 다룬 과학책들을 주로 읽었다. 우주의 기원에 관한 가장 최근의 학설과 오래된 질문, 패러다임의 변화를 총망라해 놓은 책들이었다. 그 책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었다. 138억 년 전 일어난 첫 폭발이 지금 그녀가 늙어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그로 인해 계속되는 우주의 팽창은 마음의 용량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일종의 허기가 숨 가쁘게 거실 전체로 퍼져 베란다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녀는 연필을 붙잡아 썼다.
‘빨래가 잘 마르고 사과가 무르익는 계절이 왔다. 이 계절의 한자는 불을 품고 있다.’
그녀는 자문했다. 갑자기 움직이고 싶어진 데에는 이 불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취향이 바뀐 것도 그래서……. 아니다, 책은 어쩌면 핑계일지 모른다. 거북해서 덮어놓고 외면하던 내용의 책이었다. 언니가 읽고 있던 책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책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그녀는 그 책을 찾아 계절이 바뀌고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다. 스크린도어에 비치는 영상은 무엇도 제대로 알아볼 겨를 없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기만 했고, 그녀는 이렇게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이동한다는 게 과연 이동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지하철이 막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리하여 남은 햇빛과 밭들을 물들인 선명한 노란색이 아낌없이 쏟아져 들어왔을 때, 그녀의 눈에는 뜨거운 것이 고였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 따사로운 빛들을 본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 벤 논에는 희고 불룩한 자루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궁금했다. 저 새하얀 것이 감추고 있는 것, 자루가 불룩해지도록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한철을 푸르게 보낸 대가로 시들고 말라버린 것들이겠지. 그녀가 기대어 살고 있는 절벽 아래도 세 가마니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집을 절벽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벽과 창문만 걷어내면 공중이었으니 늘 죽음을 한 겹 너머에 끼고 사는 셈이었다. 화단에는 낙엽을 쓸어 담아 불룩해진 가마니 셋이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잔디를 밀어낸 뒤라 풀밭은 깨끗한 갈색이었다. 가마니들 주위엔 미처 주워 담기지 못한, 혹은 주워 담을 수 있기도 전에 반쯤 흙이 되어버린 흙빛의 잎사귀가 드문드문 파묻혀 있었다. 가마니 셋은 겨울잠 자는 사이좋은 동물들처럼 유연한 각도로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11월의 첫눈을 이불로 살포시 덮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도 새하얗게 덮일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하였다. 갑자기 쓰레기더미가 와르르 눈앞에 닥쳤다. 하지만 쓰레기더미의 충격도 잠시였다. 곧 소박하고 조촐한 농가가 나왔고, 임시로 지어진 판자오두막 두세 채를 지났다. 마을 어귀에 깔린 희고 반듯한 길도 지났다. 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고, 그 점이 다행스럽기도 또한 불안하기도 했다. 아직은 햇빛이 내리쬈다. 구름 사이에 끼여 주름 잡혔을망정 지상에 던져지는 빛이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끌어내렸다. 매끈하고 팽팽한 비닐에 싸인 뼈대가 우르르 나타났다. 피하에 붙은 거대한 갈비뼈들 같았다. 그녀는 그 하나하나의 갈비뼈 안에서 자라나고 보호받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그것들이 때 이르게 시들거나 말라죽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녀의 다문 입술이 떨렸다. 황홀하게 물든 메타세쿼이아였다. 밭두둑 주변에 심긴 메타세쿼이아들은 입가로 퍼진 떨림이 그치기도 전에 시야에서 달아났다. 벽이었다. 벽만이 연속으로 내달리는 지하로 다시 옮겨졌다. 스크린도어의 유리로 ‘선로 무단횡단 사망 발생 장소’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다보였다. 도서관은 다음 역이었다.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가방끈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깨로 끌어올린 끈을 붙잡고 출구로 난 계단을 걸어 올랐다.
거리마다 2억년 된 나무가 노란 잎을 매달고 있었다. 신호등은 빨간색이었다. 도로 맞은편에서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왼편 뒷바퀴가 고무타이어로만 구르고 있었다. 중심부의 바퀴통이 빠지고 없어 바깥쪽만 덜덜덜 돌아갔다. 그런데도 나머지 세 바퀴가 멀쩡해서인지 눈앞에선 문제없이 달려 나갔다. 삐뽀삐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앰뷸런스 바퀴가 절박하게 굴러왔다. 그녀는 방금 지나간 트럭의 헐거운 타이어 상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식의 부주의 때문에 미래가 끝장나는 거야. 그녀는 지켜보고만 있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다급하게 아우성치는 사이렌 소리가 한바탕 눈앞을 휘돌며 지나갔다. 그 소리는 하늘 높이 닿는 기도처럼 멀어지면서도 쩌렁쩌렁했다. 그녀는 가방끈 앞으로 손을 모으고 자신의 기도를 보탰다. 핑핑 도는 붉은빛이 애타게 다른 차들을 추월해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도로가 다시 조용해졌다. 세상은 이전보다 더욱 불확실하게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되뇌었다. 그래도 저 시끄러운 앰뷸런스 바퀴가 도는 한 희망이 있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을 구하고 싶어 하는 한, 누군가를 간절히 살리고 싶어 하는 한, 오직 그러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나가는 한, 인류에겐 존속가치가 있는 거 아닐까. 그녀는 믿고 싶었다. 아니, 그 순간 믿었다. 자신의 살아있음을 믿듯이 믿었다. 그러자 도로를 가볍게 구르는 마른 잎의 속도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잎사귀도 선명히 보였다. 모든 것이 부드럽고 탄력 있게 자기만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기 꼭 알맞은 속도로.
신호가 바뀌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건너갔다. 발치에 머리통만 한 플라타너스 잎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원시에 다다른 기분에 사로잡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게 도서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열람실엔 군인 한 명이 서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찾는 책이 꽂힌 서가 앞이었다. 어떡하지?그녀는 통로를 빠져나와 그 책과 아주 관련이 없는 코너로 몸을 숨기고 잠시 서성였다. 이윽고 돌아오니 서가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걸어가 손을 뻗었다. 책등에 손가락이 닿으려는 찰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공대 모자를 쓴 낯선 얼굴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슬하 씨의 부탁을 받고 왔다고 그 얼굴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거리는 죄다 회색이었다. 그새 비가 쏟아진 모양이었다. 비에 젖은 돌덩이들이 번들거렸고 돌에 둘러싸인 문들은 닫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끈을 쥔 채 이따금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바람이 숱 많은 갈색 머리타래를 이리저리 흩어놓을 때마다 얼굴에 핀 열꽃이 드러났다. 달라진 거리에서 붉은 기가 도는 거라곤 이제 미미한 그것들뿐이었다. 그녀가 바투 가방끈을 추어올렸다. 가방에 단 쇠고리가 흔들렸다. 쇠고리엔 입이 없는 곰돌이가 파랗고 보송한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김서!
남자는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무심한 듯 보이는 흰 얼굴이었다.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 백지 같은 얼굴. 그 얼굴이 다시 한 번 불렀다.
김 서!
그건 내가 아닌데. 사람을 착각한 모양이야. 그녀는 이렇게 시치미를 떼면서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매고 있는 끈이 갑자기 포박처럼 느껴졌다. 그래, 기꺼이 김서가 돼주지, 하는 순간 머리칼이 달궈진 쇠의 빛깔로 변했다. 녹아 흐르는 쇳물같이 머리색은 뜨거웠지만 그 색은 또한 쇠의 본성을 간직해 금속성의 차가움이 배어나오는 그런 색이기도 했다. 전원이 켜진 스위치의 형광주황처럼 꺼버리고 싶은 색이기도 했다. 문득, 배숙 만드는 과정이 뇌리에 스쳤다. 밭은기침을 하던 언니를 위해 어깨 너머로 봐둔 것을 흉내 내어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갓난아기 머리통만 한 크기의 배는 쇳덩이처럼 무겁고 단단한 과일이었다. 살을 파내기가 쉽지 않았다. 꼭지를 잘라내고 응어리에 닿도록 숟가락을 밀어 넣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배웠다. 배의 본질은 배 살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배 씨에 있는가. 아니, 배 살에도 배 씨에도 들어있지 않다. 관계에 있다. 햇빛과 바람, 구름과의 관계, 흙과 뿌리, 미생물들, 벌레들, 새들과의 관계, 또 나무를 심고 철마다 보살피며 거름을 준 사람과 그 정성어린 땀과의 관계, 이 모든 관계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융화하여 배를, 한 알의 배를 탄생시키고 배답게 성장시켜서 배가 배다워진다면 바로 그것이 본질이라고, 그러니 이제부터 주변에, 특히 언니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고 다짐하며 속을 파냈었다. 마침내 배가 빈 그릇이 되어 무언가를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아카시아 꿀 한 숟갈과 잘 익은 대추 한 알을 넣고 삶았다. 삶는 동안 아기 보듯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배가 땀 흘리기 시작했다. 응어리에서도 차츰 물이 나며 고이는 게 보였다. 그 물이 뜻밖에도 이때까지 순간순간 경험해온 일들을 일시에 되비추며 물어왔다. 배가 배다움을 유지하고 고집하는 것만으론 부족하지 않나, 오히려 그 고집을 꺾고 배다움이란 것을 헐어버려 거듭 다른 것을 수용하고 녹여내어야,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약이 되는 단물로 우러나와야 배가 배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비로소 본질적이 되는 것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이미숙(梨未熟), 하고 불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고리를 풀어 곰돌이를 뺐다. 손재주가 있는 언니는 답례로 이 파란 곰돌이 고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곰돌이를 뒤집어 등에 달린 지퍼를 내렸다. 빽빽이 들어찬 솜뭉치 사이로 가느다란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손마디만 한 두루마리 종이였다. 가운데쯤이 노란 끈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허기진 사람처럼 끈의 리본을 풀었다. 부풀어 오르는 종이를 양손 엄지와 검지로 잡아 누르며 조금씩 펼쳐나가자 촘촘하고 날렵한 손 글씨가 나타났다. 그녀는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파도가 삼키듯 종이가 끝자락을 덮쳐올 때까지 조용히 읽어나갔다.
‘우리는 작디작은 세계에 살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누구나 가엾어지는, 거창한 목표 따위 존재하지 않는 곳. 우리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구슬을 정성껏 꿰어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생명을 담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만들어보려 애쓰는 존재다.’
털썩, 가방이 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끈을 잡아 올리지 않았다. 다시 종이를 말아 묶고 곰돌이를 여민 다음 사뿐사뿐 걸어갔다.
탁 트인 무채색 길이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쫙 펼친 공책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언니와 걷던 길들이 생각났다. 그녀는 언니와 걸을 때마다 툭 튀어나오는 모퉁이를 발견하고 가슴 졸였었다. 지난여름엔 숲이 있는 공원을 향하던 도중 쭉 뻗은 대로 한구석에서 수상쩍은 모퉁이를 마주치고 꺾여 들어갔다. 전에 없던 구부정한 골목이었다. 골목길 안쪽 저 끝에는 잔혹하게도 벽이 세워져 있었다. 행인들은 벽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지 그 앞에 서서 웃으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녀는 흣, 콧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길을 막아놓은 저 벽이 도대체 사진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내가 이 골목 주인이라면 당장에 저 벽을 부숴버릴 텐데.
벽은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끝없이 가고 싶었다. 한때 그녀는 벌어 모은 돈을 모조리 승객이 되어 돌아다니는데 털어 쓸 정도로 여행을 좋아했다. 하지만 여행길의 끝은 언제나 벽으로 둘러막힌 장소였다. 퇴폐적이고 늘 축제 분위기에 파티가 한창인 곳이었다. 그렇게 가는 길마다 끼어들고 에워싸는 돌덩이들이 그녀는 지겨웠다. 벽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사람도 점점 벽이 되어가는 거라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사람들은 길을 막아서는 벽 같았다. 사람들과 엮일수록 숨통이 조여 왔다.
그 벽이랑 손잡으면 넌 직접 가지 않고도 모든 곳에 도달하게 될 거야.
언니가 말했다.
아니, 그건 무의미해. 내 두 발로 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야. 내가 직접 도달하고 싶어.
그녀가 받아쳤다. 골목 양편엔 벽을 세우게 한 힘들의 충돌, 이제는 파편으로만 남은 투쟁의 흔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녹슨 전투기, 철조망, 선로 조각 따위가.
하지만 넌 잠시 벽에 기대어 쉬기도 하잖아. 계속 가기만 할 순 없잖아.
언니가 되받았다.
하지만 멈춘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야. 멈추는 순간 난 내가 고통에 차 있다는 걸 속속들이 느끼게 될 테니까. 숨 쉴 구멍조차 남아있지 않을 만큼 꽉꽉 메워져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작 자체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체감하게 될 거야. 나는 오직 살아있기 위해, 숨을 쉬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가 그러는 것처럼 울어야 할 거야. 그래도 나한테 멈추라고 할래?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흣, 흐느끼듯 웃었다. 언니는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손을 가볍게 쳤다. 짝, 한 번 치고는 태연히 앞장서 걸었다.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일의 결과를 우선시하게 되면 폭력을 정당화하게 돼.
그녀가 이윽고 걱정스레 말하였다. 은연중 생각이 아이들에게로 뻗어 있었다. 그녀는 언니와 공동 운영하는 공부방에서 한동안 토론 수업을 진행했었다. 찬성과 반대, 양편으로 아이들을 갈라놓고 입씨름을 시켜 점수를 매기는 일이었다. 논술 시험을 대비한 교육이었다. ‘통합적’이라느니 ‘융합적’이라느니, 논술에 요구되는 사고방식에는 일반적으로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의 기준에 맞춰 양측의 견해가 가진 장단점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과정은 출제자의 의도대로 더 새롭고 원만한 해결책에 이르기보다는 둘 중 하나의 관점을 택해 그 타당성을 입증시키고자 편리하게 나머지 관점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쏠리기 일쑤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따끈한 밥을 짓고 계란지단을 부치고 자기 입맛대로 골라온 갖가지 반찬들을 한 장의 구운 김에 나란히 놓아 한데 뭉쳐 둥글둥글하게 말아서 직접 맛보도록 했다.
자, 어떠니? 김과 밥, 시금치나물, 단무지, 계란지단 사이에 벽이 느껴지니?
불꽃이 피어난다!
아이들 사이에서 꾸밈없는, 그리고 막힘없는 함성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이 순간의 기쁨을 잊을 수 없었다. 아이의 외침이 곧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기대에 차 생각했다. 화합이 김밥 본연의 맛이다. 이른바 ‘김밥적 사고방식’이야말로 전쟁의 원인이 되는 벽을 돌파해낼 것이다. 그녀는 이날의 체험을 ‘김밥 프로젝트’라 이름 붙여 토요일마다 특별 활동 삼아 되풀이했다. 그러나 당장의 시험 결과로써 그 가치를 입증해보일 수 없었던 까닭에 학부모들이 폐지를 요청했고, 그녀는 수락했다. 그녀 자신도 ‘김밥적 사고방식’에 회의를 느끼던 참이었다. 그것 역시 일종의 가둬두는 허물일 뿐이었다. 유충이 변하려면 허물을 뚫고 나와야 한다. 그녀는 당시 이렇게 인정하고 넘기려 했다. 그런데 언니가 짚고 넘어갔다.
안타깝지만 너의 그 관점 또한 하나의 극단으로 읽힐 수 있어. 각자의 개성일랑 허물고 전체를 위해 무조건 김밥이 되라 강요하는 것 같잖아.
그녀는 멈춰 섰다. 나란히 걷던 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겁게 입을 뗐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데 벽은 필수 요소야. 세계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데 이 단순한 벽만큼 확실한 게 어딨어? 난 그 벽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그러면 토론은 성립되지 않겠지. 왜 이 세계는 벽을 세우는 데 그리 열심인가. 평화, 발전을 위해서라고? 질서를 위해서라고? 벽 밑에 파묻힌 시체들은 동의할까? 벽들이 이 세계의 수수께끼들을 덮어버릴 순 없어. 정치란 없어져야 해.
그녀는 말을 멈추고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같이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고집을 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하려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하여 그 모든 변명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는 감정이 치밀어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토해내듯 말했다.
벽이 가리는 건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이 아니야. 벽은 진실을 가려. 그럼으로써 사람 안의 많은 가능성들을 썩게 만들지. 사람이 벽을 닮아가게 되는 거야. 사람이 벽화(化)되어버리는 거라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얻는 게 고작 이거라고. 사람의 벽화! 자, 벽이 걸어간다, 깨부숴라! 모조리 깨부숴! 깨부수라고! 나부터, 어서!
언니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읊조렸다.
네 발밑의 그림자가 담벼락으로 꺾여 올라갔다면 그건 그림자일까 담벼락일까. 담벼락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아니, 의도적으로 세웠지. 정치가 전쟁을 만드는 거야. 정치가 하는 일이란 기껏 사태를 더 복잡하게 비비꼬아 결국엔 성냥불을 산불로 키우는 일일 뿐이야.
그녀는 말을 멈추고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니가 눈을 감았다 떴다. 지그시 미소를 지어보이곤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래? 그럼 가보자. 싸움이 그친 곳으로.
그때는 갈 수 없었다.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자의 입에서 언니의 제안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슬하 씨는 네가 이제 준비가 됐다고 하셨어.
남자가 묻기도 전에 대답해왔다.
왜 하필 나야?
그녀가 물었다.
네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재능이 있어.
그녀는 토를 달았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우린 척 보면 아는 부류거든.
참으로 뻔뻔하게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재미를 느꼈다. 엉뚱한 호기심도 좀 생겼다.
너는 왜 그런 복장일까?
그녀의 질문에 남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장난기 그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똑같이 되물어왔다.
글쎄, 내가 왜 이런 복장일까.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 군복 입은 헤르메스, 하고 읊조리듯 말하였다. 그러자 남자가 오른손을 내밀며 사뭇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