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오락거리가 풍부해요. 게임이나 퀴즈, 장기자랑대회 같은 형식으로. 퀴즈는 기본적인 상식만으로도 풀 수 있는 수준이죠. 여기선 뭐든 평준화되고, 쉽게 얻어져요. 위험을 무릅쓰고 애써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도 원치 않아요. 그러니 애써도 얻을 수 없는 건 오죽하겠어요. 그런 것들은 화질 좋고 생생한 다이아몬드 입체영상에 바로 맡겨버리죠. 아시다시피, 인간이 가장 잘하는 게 감각적인 환상에 사로잡히는 일 아닙니까? 망상 운운했던 당신이 그걸 모르진 않겠죠. 물론 제 말이 의도하는 바는 그보다 자명하죠. 누구도 실제로 다치거나 실패하고 고통받길 원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그러한 자극과 감정만은 느끼고 싶어 하죠. 감정이입은 인간의 가장 축복받은 능력입니다. 그 능력 하나면 위험에도 무사히 이를 수 있나니, 마텔이야말로 영원히 계속됐으면 싶은 약속의 땅 아니겠습니까.
그는 말하고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몽롱해져서 마치 외듯이 중얼거렸다. 자기 자리에서 매일매일 역할에 충실하면 아무 문제없이 생활이 굴러가요. 그의 시선은 창문 너머 무동력환풍기 쪽으로 가 있었다. 짙푸른 공기에 물들어 경계가 흐릿해진 덮개는 마치 회전이 멎은 듯 보였다. 청년은 그의 어깨를 흔들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하고 싶었다. 그는 아까부터 창 쪽으로 목을 비튼 자세였다. 시간이 그에게서 빠져 달아난 것 같았다. 가만히 청년 쪽을 향한 그의 귓속은 희고 차가워 보였다. 핏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너무 늙었어. 젊은이들조차. 여긴 은퇴자와 실업자, 무기력한 자들의 땅이야. 누구도 낳지 않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여긴 생명이 씨가 마른 곳이야. 그리움과 상실만 남은 땅끝마을. 청년은 한숨 쉬며 쿠키를 도로 내려놓았다. 입술에 붙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마저 털어내고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사람들은 사생활을 유지하는 게 곧 일이네요. 놀고먹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하는 셈이네요. 무사안일하기만 한 생활이 좋습니까? 행복한가요?
이곳에서 행복은 안전을 의미합니다.
그가 차분히 받았다. 청년은 발끈했다.
내가 볼 때 그런 생활은 삶을 죽이는 짓이에요. 나 역시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사생활 유지를 위한 모든 자원을 지원받으며 하릴없이 명줄만 이어가야겠군요. 놀고먹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한결같이 살아있어야만 하겠죠. 정말 림보보다 더한 곳이로군. 이제 보니 그쪽은 행운아인 셈이네요. 일하는 시늉까지 지원받으니까. 뭐라더라, 한쿡소년?
한입쿠키소년입니다.
그가 정색하고 말하였다.
뭐야, 자존심이라도 긁었나?청년은 멈칫, 생각했다. 상대의 눈은 자신의 눈동자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눈을 돌리지도, 껌뻑이지도 않고 변함없이 주시했다. 청년은 맞대응을 피하려 먼저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어찌됐든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했다. 청년은 상냥하게 태도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 줄임말이었군요. 진짜 이름은 한입쿠키소년이시고.
한잎쿠키소년입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청년은 ‘입’과 ‘잎’의 차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입’의 음조가 묘하게 강조되지 않았나 싶어 조심스레 그의 기분을 맞춰줄 요량으로 똑같은 음절에 강세를 실어 따라 읊조렸다.
예, 그러니까요. 한입쿠키소년.
이번엔 그가 잠자코 넘어갔다. 청년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말없이 한눈팔며 서 있었다. 참으로 능청스러운 모습이었다. 무슨 꿍꿍이인 거지? 꽤나 미끄러운 상대였다. 잡으려고 할수록 흘러내리는 젓가락 새의 가는 묵처럼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괜히 열내지마. 여기서 나가려면. 청년은 뜨거워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식혔다.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대화를 최대한 늘여 그에게서 아는 것을 더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엔 자신이 너무 과열되어 있었지만. 아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청년은 달은 김에 말머리를 홱 돌렸다.
그런데 여주인 말이에요, 아무리 자원이 넉넉하고 배포가 크다 한들, 어떻게 이 모든 인생들, 세월들을 감당해내죠?
청년의 어조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그는 즉답을 삼가고 이렇게 둘러댔다.
마텔은 세계평화사업의 일환으로 여주인의 아버지가 일궈놓은 것이라고 해요. 둘 다 전쟁을 겪은 세대죠.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청년은 조바심을 애써 누르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가 별안간 말하였다.
이성은 광기를 지니고 있어요. 이성이 끝까지 가려고 할 때 광기가 풀려나오지요. 바로 그 이성의 광기로부터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아가 강해질수록 타인은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이 돼요. 자아는 확실히 이성의 산물입니다. 이성이라는 논리적인 기계장치가 공동의 적을 만들어 개개인 간의 적의를 극복하고 조화와 연대를 꾀하려 했어요. 가장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전쟁만큼 비이성적인 게 있겠습니까?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 중 가장 비이성적인 것이 이성에 의해 도입됐습니다. 실로 무서운 아이러니지요. 마텔은 그런 모순으로부터 어떻게든 인간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설계된 구조물입니다. 인간 최후의 보루인 셈이죠.
힘주어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어째서 자꾸만 마텔 대변인처럼 말하게 되는 걸까. 더욱이 예기치 않은 애환마저 하얗게 고여 들고 있었다. 그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몰아쉬듯 말하였다.
여주인은 지독히 외로운 사람일 거예요. 초창기에 사람들을 받을 때, 계약조건이 이랬대요. 너희는 구름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누구든 이 생활을 포기하고 떠나려거든 전원을 데리고 나가라. 안타깝죠. 제아무리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다 한들 홀로 아리랑. 장마철 하늘마냥 두루마리구름에 스스로를 휘휘 감아놓은 형국이죠.
두루마리, 뭐요?
청년이 그만 사소한 덫에 걸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풀어놓기 시작했다.
두루마리휴지는 아니고요. 구름이요. 비 오기 전부터 하늘을 온통 뒤덮어 놓기로 유명한. 흔히들 층적운이라 부르는데, 실제로 층적운을 보게 되면 지평선 위서부터 하늘 저 높이까지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층층이 감아놓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저는 수시로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높은 층에 묵는 게 좋은 이유가 그거죠. 구름과 하늘이 가까이 보이는 거요. 취미가 내다보기인 저 같은 사람에겐 정말이지 로열층이죠. 구름은 한 번도 지루해 보인 적이 없어요. 구름은 떠다니는 바다예요. 특히 방금 말한 두루마리구름은 어스름 녘이 되면 물을 흠뻑 묻혀 채색한 수채화같이 보여요. 번진 듯 엷게 퍼진 파란 색조가 축축한 물 기운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정도라니까요.
청년은 그쯤에서 끊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조건은 지켜졌나요?
그는 이 질문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멀뚱히 청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청년은 이른바 여주인이 내걸었다는 계약조건을 그대로 읊어보였다. 그는 마치 긴 꿈에서 깨나듯 눈을 한 번 끔뻑했다. 그러고는 놀랍도록 신속하게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아, 지켜졌어요. 누구도 나가길 원치 않았거든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어르신들은 그걸로 족했어요. 이미 많은 고생을 겪은 후였으니 그만 편하게 지내고들 싶으셨겠죠. 우리 세대에 와서 그 조건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게 됐습니다만. 이미 주어진 환경으로 굳어졌으니까. 내 생각에 지금 여주인이 바라는 건 이거 하나예요. 마텔이 변함없이 돌아가는 것. 마텔이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필요하죠. 사람들이 머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마텔은 무상으로 제공해요. 심지어는 역할까지도. 댁은 언제까지나 손님일 거예요. 그건 아마 당신이 바라는 것일 테죠. 이 방 모양이 다락방을 닮은 것도 당신이 원해서일 테고요. 마텔은 거대한 자기공명 센서와도 같아요. 수용되는 사람의 뇌파를 감지해 그에 맞게 구조를 변형시키죠. 이 골목의 방들이 기둥 딸린 입구를 가진 것은 이 골목 거주자들이 소방수가 되는 꿈을 자주 꾼다는 증거예요. 당신을 포함해서.
내가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통 기억이 안 나네요. 내가 소방수를 꿈꿨나. 그게 정말 내 꿈이었을까요? 지금 나는 다른 꿈이 생각나는데요. 양지 바른 땅의 나무에 기대 사과를 톡 깨먹는 꿈. 누구도 모르는 곳에 서 있는 그 나무의 사과는 언제나 익는 시간이고, 나는 늦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런 꿈을 꿨었어요.
청년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마를 찌푸리고 몇 발짝 걷다 냉장고 앞에 멈추어 그에게 말했다.
건물이 인간의 마음을 읽어낸단 건가요?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주인이 충분히 관심을 주면 물건에도 마음이 깃들지요. 인체나 물체나 물질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인체를 구성하는 입자가 똑같이 물체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니까. 한 예로 탄소를 들 수 있죠. 유기체이자 다이아몬드이자 연필심을 이루는 공통 원소 말이에요.
그는 청년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건 내가 생각했던 거잖아. 어떻게 그걸 똑같이 말할 수가 있지? 저토록 무덤덤하게, 아무 맛도 없다는 투로. 청년은 말을 그친 상태였다. 정수리가 천장에 닿아 있었다. 양쪽으로 경사져 세모꼴을 이룬 천장은 색이 짙고 옹이가 진 통나무로 거칠게 짜 맞춘 것이었다. 청년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손을 들어 만져보았다. 꺼끌꺼끌한 나뭇결이 살에 박히듯 만져졌다.
이건 다이아몬드가 아닌데요?
당신 눈엔 그렇게 보이겠죠. 어쨌든, 마텔은 세부엔 영향을 주지 않아요. 자잘한 세부나 세부의 질적인 차이 같은 건 우리 인간에게나 중요할 뿐이지요. 말하자면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일부 소재의 재질이나 주관적인 반응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닌 거죠. 그런데 이따금 잠든 사이 방들이 자동으로 개조되는 일이 있어요. 물론 생활에 불편은 없어요. 오히려 더 편리하고 쾌적한 쪽으로 변경되는 쪽이랄까.
그는 자신의 불안은 숨기고 말했다. 그러나 설계도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쫓기듯 다급해졌다. 하마터면 경솔하게 같이 찾아보자고 내뱉을 뻔했는데 청년이 대뜸 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거죠? 마텔이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답니까.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어있는 침대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턱시도 단추를 끄르며 말했다.
신이 뭐 별겁니까. 요즘은 누구나 신이 되는 세상입니다. 당신도 얼마든지 신이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의 호감만 산다면. 마텔은 그런 신들의 집단수용소인 셈이니 옛 신을 훨씬 능가해야죠. 중과부적 아니겠습니까! 규모로 보나 기능으로 보나 내부의 복잡함으로 보나 충분히 옛 신을 압도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곳에 와서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원하게 됐어요. 작은 일이라도 이 손으로 해치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화장실 비데부터 없앴죠. 그렇게까지 기계에 의존해야 되나 쭉 의문이었거든요. 이 손으로도 할 수 있는데. 아니, 이 손이 더 확실한데. 휴지랑 물만 있으면 감쪽같이 처리되는데. 제대로 알면 더러울 것도 없어요. 똥이라는 게 뭡니까. 소화되는 과정에서 변한 음식 아닙니까. 만일 음식이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그걸 먹은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먹느니만 못한 상태로 죽겠죠. 그러니 더러운 것이 뭡니까. 우리를 살리는 변화, 그 삭은 형태가 더럽습니까. 차라리 똥이라는 이름이, 그 이름과 함께 떠올리는 머릿속 관념이 더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똥이라는 건 없습니다. 시간이 있고 변화가 있을 뿐이죠. 어떤 아름다운 것도 영원할 순 없어요. 때가 되면 배설하고 분비하게 되어있는 겁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우리가 배변을 하며 배울 수 있는.
거침없이 말하던 그가 문득 서늘한 콧바람을 날렸다. 자신이 유화물감튜브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비우기 위해, 자기 안에 가득한 것들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쫘악 짜내기 위해, 숨 한 번 내쉬면 파삭 바스러질 거죽만 남기 위해, 끝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 혹 얼굴에 돋아난 붉은색들은 일종의 경보음 같은 게 아닐까. 물감이 굳기 전에 어서 색을 배설하고 분비하라는. 그는 흠칫 말을 바꿨다.
남들이 알면 이상한 눈으로 보겠죠. 도로에서 혼자 역주행하는 격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죠. 이 쿠키를 좀 봐요. 맛도 모양도 영락없는 과잔데 하루 종일 이것만 먹어도 기운이 떨어지는 일이 없어요. 소화도 잘되고요. 다음날 화장실에 가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뿐만 아니라 이 쿠키가 생체시계를 되감는단 소문도 있어요…….
흰 와이셔츠 바람으로 하늘색 침대에 앉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환했다. 그쪽에만 불이 켜진 듯 밝았다.
어느 날 꿈에서…….
그의 표정이 사탕 빠는 아이처럼 바뀌었다.
나는 내 갈비뼈를 사랑하게 됐어요. 내 갈비뼈는 너무나 가볍고 시원했어요. 안에 있던 묵직한 것들이 다 빠져나가 사라진 것 같았어요. 난 갈비뼈를 손으로 두드리고 쓰다듬어 주었어요. 작고 여린 풀꽃을 흔드는 해맑은 산들바람처럼. 내가 바라보던 얼굴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 얼굴은 나를 뼛속 깊이 걱정하고 염려해주었어요. 나를 믿는 얼굴이었어요.
그는 환희에 차 있었다. 신이 나서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봇물이 터지듯 말들이 쏟아졌다. 청년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다.
난 여길 나갈 거예요.
청년은 눈을 내리뜨고 말했다.
그들에겐 비행선이 있어요. 긴파람 호라고 부르는 비행선이죠. 이륙할 때 긴 휘파람 소리 같은 가늘고 청량한 소리를 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들 해요. 아마 불시착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곳에 들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들은 멈추지 않는 여행자들로 유명해요. 조종사 별명이 뭔지 알아요? 비행소년이에요. 소년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비행을 멈춘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났다. 비행은 그의 가슴 속에서 줄곧 자유와 연결되는 심상이었다. 해방감과 정열이 뒤섞인, 기쁨에 가득 찬 감정으로 체험되는 것이었다. 청년이 불쑥 내뱉은 이름, 비행소년은 사실 그가 되고 싶어 하던 것, 즉 자기 닉네임으로 삼고 싶은 것이었다. 드러내기가 차마 두렵고 숫저워 속으로만 품고 있던 비밀한 바람이었다. 그러한 바람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마치 그 사람의 것인 양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장이 물어뜯기듯 쓰라렸다.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고집스레 말하는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청년이 다가와 만류하듯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무전기를 빼내 치켜들었다.
스위치를 켤 거예요. 그럼 우리 목소리가 들릴지 몰라요. 여주인은 그냥 두겠지만 지배인은 짚고 넘어갈 겁니다.
푸르게 물든 청년의 이마가 한순간 길게 주름졌다. 좀 전엔 들어도 괜찮을 거라면서? 청년은 이렇게 따져 묻지 않았다. 다만 부탁했다.
밤에라도 볼 수 있을까요? 당신 일 끝나고 아무 때나, 자정이 지나도 상관없어요. 이리로 오실 순 없나요? 아님 제가 그리로 갈까요? 머무는 곳이 어딘지 말해 봐요. 우리 같이 출구를 찾읍시다.
청년의 어조는 자상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만남은 없을 겁니다.
이봐요,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단 겁니까? 당신도 나가고 싶잖아! 나는 알아. 분명히 읽었어.
청년이 그에게로 얼굴을 가져가 소리 죽여 외쳤다. 코끝이 닿을락말락한 거리였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리고, 서로의 눈에 담긴 자화상이 희미하게 마주보이는 거리였다. 그가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죠. 다이아몬드에 관해서요. 다이아몬드의 투명한 빛에 대해서요.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이유를 알아요? 다이아몬드는 주변의 빛을 투과시켜 사방으로 내보내죠. 우리는 그 빛을 다이아몬드의 것이라 착각해요. 하지만 그 빛은 다이아몬드의 것이 아닙니다. 다이아몬드가 잠시 수용한 것에 불과해요. 나를 믿지 마세요. 당신의 믿음이 나를 달리 보이게 한다 해도 그건 잠시뿐이에요. 빛은 지나갔어요.
청년의 얼굴은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무전기를 켰다. 지배인의 새된 음성이 날아들었다. 긴급 교육이 있으니 즉각 튀어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는 어깨를 굽히고 천천히 구멍 쪽으로 내딛었다. 주저앉아 다리를 빠뜨리고 기둥을 잡는데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로 사는 것도 참 힘들겠다.
캠핑촌을 벗어난 그는 홀 가장자리로 빙 돌아나갔다. 춥고,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그 방에 두고 온 재킷이나 쟁반 때문은 아니었다. 청년의 첫인상이 뇌리를 맴돌았다. 느긋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다. 다시 떠올리니 마음이 가라앉으면서도 잔잔히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불붙은 돌멩이에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네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참 좋았는데. 청년의 말들은 그에게 고통을 줬다. 그는 청년의 입에서보다 눈매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조용한 눈매는 강했다. 어둠이 닿아도 끝까지 둥글고 자상한 선을 그리며 뜨여 있었다.
돌다보니 어느덧 숙소로 올라가는 층계였다. 길고 널따란 층계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말려 올라간 호박색 난간이 까마득히 올려다보였다. 이대로 무전기를 끄고 방으로 올라가버린다면 내일의 전망이 달라질까. 지배인의 눈총과 빼먹은 시간만큼의 벌충이야 감수해야겠지만, 큰 줄기에선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일이 되어도 창밖으론 무동력환풍기가 바람의 힘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돌고 돌 것이고, 해가 질 것이다. 그리고 해질 무렵이면 그는 또다시 한입쿠키소년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오늘과 어제처럼 이어질 것이다. 바람이 부는 한은. 그는 망연히 층계를 향해 걸어갔다. 고개를 들었을 때 계단을 내려오는 무리가 보였다. 우주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행렬의 끝에 자신처럼 발진이 도드라진 얼굴 하나가 있었다. 그는 우뚝 멈춰 섰다. 그 얼굴도 그의 시선을 알아챈 것 같았다. 표정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머뭇거리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꾸준히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로 점점 가까워져 왔고, 서서히 옆얼굴로, 뒤통수로 바뀌어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