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10장 마텔의 교육

by 수연


한 소년이 있었다. 복도 밖으로 고객들을 겨우 피신시켰는데, 매장 뒤편에서 홀로 불길에 휩싸인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자신의 형이었다. 소년은 그래선 안됐지만,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지배인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생각하는 눈초리로 단상을 노려보더니 다시 고개 들어 입을 열었다.

소년은 무서웠다. 선택 자체가 두려웠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순식간에 모든 이들이, 자신까지도 말이다, 재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괴로웠지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손을 움직여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심리적 거리두기’의 학습 효과가 자신과 모두를 살린 셈이지. 그리고 나머지 소년. 그는 달려갔다. 간신히 형을 붙잡아 돌아섰지만 방화 셔터가 내려간 뒤였다.

지배인의 시선이 정확히 그의 눈에 꽂혔다. 지배인은 물었다.

이 이야기에서 무얼 알 수 있지.

지배인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형은 구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이 점을 알고 나면 네 말대로 상황이 닥쳐봐야 아는 경우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

아니죠.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소년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겁니다. 소년은 선택을 할 수 없어요. 이미 모든 게 결정되어 있어요. 단지 그 순간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그 소년이 아니면 또 다른 소년이 버튼을 누를 거예요. 소년들이 아니면, 고객들 중 누군가 버튼에 손을 대겠죠. 결과적으로 당신 말은 맞아요. 하지만 전제 자체가 틀렸어요.

그는 빠르게 되받아쳤다. 잔뜩 가시 돋친 말투로.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미 지배인 너머에 가 있었다. 마텔은 강력해. 사람들이 죄다 마텔의 논리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있어. 여주인을 만나봐야겠어. 그는 여주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뚱뚱하고 항상 눈이 젖어 있는 나이든 여자겠지. 왜 여주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까. 아무도 묻지 않았다. 모두가 외면하거나 무관심했다. 마텔 주민들은 사생활을 방해받지 않는 한 남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거대한 피로감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피로는 바윗덩이처럼 그들을 짓누르고 있어 갑자기 달려들어 압사할 것 같은 끔찍한 무게를 선사하지 않는 한 주의를 끌기 어려웠다.

내가 탈주를 시도한다면 어떨까! 그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지배인의 눈이 그의 의중을 캐내려 하고 있었다.

웃옷이랑 쟁반은 어쨌지? 내 선에서 덮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지배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착잡해 보였다. 그때 지배인이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소리가 울렸다.

깨어나셨습니다.

무전기를 빼내던 지배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지배인은 급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진료나 받으러 가. 네 예약일을 며칠 앞당겼다.

지배인이 고개만 비틀어 말했다. 그를 흘깃 넘겨다보더니 연거푸 손사래를 쳤다. 그는 발끈했지만 지배인의 등에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내일은 오늘 같아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하고.

지배인의 다그침이 뒷덜미로 날아들었다. 그는 말없이 걷다 목에서 나비를 잡아 뺐다.



진료실은 한 층 위에 있었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 눈을 두고서 친절한 말투로 어서 오세요, 했다.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는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석유냄새가 물씬 났다. 그는 그 냄새를 마셨다. 확 내던지고 튀어나가고픈 충동이 느껴졌다. 자기를 잊고 하나가 되고 싶어지게 만드는 냄새였다. 하지만 막판엔 구역질이 치미는 냄새이기도 했다. 그 냄새는 강렬한 녹색이었다. 여름철 제초작업이 한창인 공원의 화단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 예초기의 날에 잘려나간 풀들이 내지르는 비명 같은 냄새였다. 철근을 가는 소리에서도 묘하게 같은 냄새가 풍겼다. 불꽃을 튀기며 갈리어 건물의 뼈대를 이룰 짙은 초록의 쇠 냄새.

석유냄새는 피를 농축시킨 기억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걸어갔다. 문 가까이, 의사의 책상을 등지고 않도록 배치된 이젤 쪽이었다. 하얗게 젯소칠 된 캔버스가 끼워져 있었다. 쪽창만 한 15호짜리 캔버스였다. 옆에는 냄새의 진원인 금속성의 번쩍이는 석유통과 각기 화려한 이름의 색으로 표시된 크고 작은 용량의 유화물감튜브들, 속을 훤히 내비추며 반쯤 차 있는 기름병들, 대통 위로 뻣뻣하고 부드러운 털들을 곤두세운 서로 다른 두께의 붓,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곡선의 팔레트, 석유통과 마찬가지로 금속성인 미끈하고 아기자기한 기름통들이 탁자에 눕혀 있거나 세워져 있었다. 그는 반듯이 접혀 의자 등에 걸쳐진 까만 작업용 앞치마를 들어 펼쳤다.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앞치마 벨트에 머리를 집어넣고 끌어내리니 끝자락이 거의 발목에 닿았다. 앞치마는 몸에 잘 맞으면서도 품이 넉넉해 벨트를 다시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 군데군데 배인 지난 작업의 흔적이 하늘빛으로 환했다. 그는 폭 넓은 앞주머니에 두 손을 폭 찔러 넣고는 앉았다.

가까이에 석유통이 있었다. 그는 잠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석유는 우물물같이 깊어 보였고 진한 광택을 띠었다. 그는 대통에서 제일 숱 많은 바탕붓을 골라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런 다음 투명하거나 황금빛인 기름병들로 손을 뻗었다. 마개를 열자마자 송진 특유의 화하고 서늘한 기운이 콧속을 자극했다. 재빨리 기름통을 잡아 열었다. 통의 절반 남짓 투명한 송지유를 붓고는 별 냄새를 풍기지 않는 황금빛 아마씨유와 섞었다.

첫 번째 색깔을 선택했다. 아이보리 블랙. 기름을 먹어 반지르르한 나무 팔레트가 금방 꺼질듯 묵직해졌다. 그는 혼합된 기름을 부어 개었다. 질퍽해진 블랙에 붓을 누르니 털 새마다 검정이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쳐 올랐다. 그는 그대로 캔버스에 찍어 내렸다. 온몸의 세포가 순식간에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밤을 칠했다. 붓을 밀어 별들에게로까지 소급해 올라갈 듯 뿜었다. 그가 밤이었다. 밤이 되니 알아졌다. 밤은 4월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붓을 석유에 흔들어 씻었다. 석유가 금방 쇳빛으로 탁해졌다. 그의 손동작이 빨라졌다. 대통에서 굵고 가는 여섯 자루의 납작붓과 쫙 펼친 부채꼴의 팬붓을 뽑아 챙겨 넣고, 티타늄 화이트를 끄집어내 짰다. 코발트블루와 레몬옐로우, 한층 밝은 향긋하고 상쾌한 이름의 색들도 짰다. 이것이 밤의 내면이었다. 그는 쉼 없이 붓 자국을 포개었다. 쌓인 색 더미가 차츰 형태로 엉키어 갔다.

검음 안에서 황색의 아치꼴 다리가 나타났다. 파란 구름이 스치고 흰 꽃이 터졌다. 붓을 따라 회색이 검음을 뚫고 흘렀다. 홀연히 피어오르듯 탑이 하나 솟았다.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의사가 돌연 말했다.

동굴 밖으로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네요.

그는 동굴과 바다를 그린 것이 아니었지만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데 교각도, 구름이며 꽃들도 다 동굴 안에 있네요.

의사는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눈알만 굴려 분석했다. 그는 막 새털구름의 갈기를 도드라지게 하던 참이었다. 좀 더 실감나게 조형적으로 살려내고 싶은 질감이었는데 의사의 지적에 김이 샜다. 그는 갈기의 흰 끝에서 팬붓을 떼고 상체를 젖혔다.

조금 떨어져 보니 의사의 관점에도 일리는 있었다. 자신이 그린 것들은 죄다 동굴 안에 쟁여진 물건들처럼 보였다. 그는 팬붓을 놓고 의자를 돌려 마주앉았다.

처음으로 시선이 밖을 향했네요. 지난번까지는 쭉 안에 집중돼 있었는데.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왜요? 생경한가요? 하지만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자기 안에 없는 걸 볼 수가 있는 걸까요?

그가 되물었다. 의사는 눈을 맞추며 지그시 주시하나 싶더니 문득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잔뜩 경색된, 마치 갈비뼈 속의 작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의사도 자신만큼이나 참고 있는 게 역력했다. 석 달에 한 번, 상담을 위해 마주앉는 의사의 시선은 매번 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조차 억눌린 말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도리어 자기 쪽에서 묻고 싶어졌다. 요즘 지내기 어떠신가요? 기분은 괜찮나요? 그러나 의사는 역할을 바꿀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의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마텔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한시도 자기 역할을 놓치려 들지 않았다.

그림에서 누적된 피로가 관찰되네요.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네요.

의사가 다시 온화한 투로 말했다.

쉬라니요. 계속 휴가를 보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진데요. 저녁에 한입쿠키 나르는 게 전분데 이게 쉬는 게 아니고 뭔가요.

그는 이번엔 참지 못하였다. 늘 그랬다. 말을 참기가 제일 어려웠다. 의사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전과 다르게 민감하네요. 정말 무슨 일 없어요?

그는 뭐라고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것이 있었다. 발진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었다. 눈이 여러 번 마주쳤음에도 그랬다. 그는 끝까지 함구하다 엇갈린 모양의 앞치마 벨트에서 머리를 빼내고 진료실을 나왔다.

keyword
이전 09화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