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11장 오에게로

by 수연


층계를 내려왔다. 홀에서는 감미로운 무도가 펼쳐졌다. 펄럭이는 치맛자락들에서 옅은 아카시아향이 맡아졌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두고 온 물건들도 찾을 겸 다시 방화셔터라인을 넘었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텐트며 불판, 술상 따위가 흔적 없이 치워져 있었다. 불확실한 원근감 외에는 딱히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게 없어 그는 구멍에서 내려오는 소리와 기척, 어둠과 불빛, 그리고 냉기를 맡으며 지나갔다. 그러다 유난히 먼지 낀 기둥이 있기에 붙잡았다. 기둥에 매달려 용쓰던 그의 입가로 실소가 비집고 나왔다.

그는 청년에게 사과하고 새롭게 이야기를 청하고 싶었다. 그런데 뭐라 부르지? 청년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오, 라는 성만 또렷했다. 내가 오, 하면 그쪽에서 아무갭니다, 하고 척 말해오려나. 능청스레 오, 부르려던 목소리는 두 눈이 구멍을 빠져나오는 순간 어둠에 틀어막히고 말았다. 그는 가쁜 숨을 죽이며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방은 빈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마저 끌어올려 기둥에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차츰차츰 사물의 윤곽이 잡혀가자 익숙한 위치에 놓인 침대로 눈이 끌렸다. 구멍에서 두 다리를 접어올려 바닥을 딛고 섰다. 살며시 왼쪽으로 발을 디뎠다. 순간 찰박이는 느낌에 뒤꿈치를 쳐들었다. 벽을 더듬어 전등스위치를 눌렀다. 방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은빛 주전자가 외따로 뚜껑과 분리된 채 엎어져 있었다. 그는 손잡이를 쥐고 들어올렸다. 밑바닥의 둥근 홈에 물방울이 고여 있었다.

아무리 마시고 쏟아내도 밑바닥에 한 방울이 남지. 이 방울물도 바다에 섞이면 바다이겠지. 그는 씁쓸하게 뇌고는 눈을 뗐다. 허리를 구부려 뚜껑을 주웠다. 꽉 닫은 주전자를 탁자 위에 세워놓고 젖은 양말을 벗어 던졌다. 침대에 올라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이 드나 싶었는데 속이 메슥거려 도로 일어나 앉아야 했다. 주변이 덜커덩거리고 있었다. 주전자가 부르르 떨었고 장판에선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아니면 내가 과민한 건가. 그는 명치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한 발짝 떼기도 전에 몸이 기우뚱했다. 간신히 탁자를 붙잡아 버텼지만 속이 울렁거려 숨 쉬기가 힘들었다. 사방에서 가솔린 냄새가 났다. 도저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이 방은 왜 이렇게 멀미가 나! 그는 진저리를 치며 생각했다. 한동안 바닥에 고인 물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고인 물에 비친 건 자신이 아니었다. 턱시도 상의를 걸치고 쟁반을 옆구리에 낀 오가 자신과 두 발을 맞댄 채 저편에서 물끄러미 이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말하기를, 아, 물로 빚은 사람아, 너에게 손을 담가 거두어들이리, 라며 읊은 대로 손가락을 수면 너머 그의 두 무릎께로 쫙 뻗쳐오는 것이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르며 눈을 떴다.

침대였다. 속은 여전히 메스껍고 방도 젖은 그대로였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고인 물로 다가갔다. 눈을 내리뜨고 똑바로 응시했다. 발바닥을 맞댄 오 같은 건 없었다. 거꾸로 서서 집요하게 시선을 맞춰오는 자신의 수면상만 비치었을 뿐이다. 그런데 문득, 시야에 걸리는 게 있었다. 수면 우측의 창밖 풍경이었다. 액자에 담긴 그림 같았다. 뚝 잘라 길이대로 눕힌 통나무 아래 거꾸로 뿌리내린 버섯들을 그려놓은 것 같았는데, 가만 지켜보니 움직임이 느껴졌다. 버섯의 갓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버섯들이 일제히 회전하며 차창 밖 풍경처럼 하나 둘, 끊임없이 틀 밖으로 밀려 달아나고, 또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이 버스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난데없이 울린 소리가 당장에 증명해 보였다. 바닥을 때리며 뚜껑을 도로 날려 보낸 주전자가 어느새 눈앞을 비스듬히 굴러가고 있었다.

그는 고인 물을 등지고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지금 이 순간 붙잡을 것은 하나였다. 그는 기둥에 팔을 둘러 깍지를 끼고 턱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며 몸을 추슬렀다. 오는 어디로 갔을까. 오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멀미 때문에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방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설령 그친대도 돌아올까. 나가겠단 의지가 확고했는데. 우주복을 찾으러 간다고도 했잖아. 더욱이 손님 아닌가. 언제든지 떠나 다른 방에 묵어도 아쉬울 게 없는 손님. 자신의 방문에 아직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한 오가 이 방에 있을 이유란 현재로선 없는 셈이었다. 그는 바지주머니를 뒤적여 펜과 포스트잇을 꺼냈다. 여남은 장을 떼어 기둥에 붙이고 썼다.


새로이 이 방의 주인 된 사람에게.

방금 이 방이 움직였습니다. 저로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치 버스처럼요. 저는 허우적거리며 멀미까지 했습니다. 직접 겪지 않고선 제 말을 믿기 어렵겠지요. 당신이 만약 현실주의자라면 겪고서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 당신의 허한 기운을 탓하고 애써 넘기려 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과학도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 현상을 파고들어 원인을 밝혀내려 하겠죠. 여러 가지 조건과 경우의 수를 따져 그럴듯한 가설을 세우고 연구에 돌입하겠죠.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판단이 안 섭니다. 어쩌면 저는 몽상가에 가까운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장은, 이 갑작스런 경계, 라기보다 첫 체험을 고스란히 기억코자 합니다. 기억하고 음미하다 보면 다음이 생기겠죠. 혹 당신은 저 같은 사람인가요? 오, 당신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겪었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잠깐 방을 비웠던 거라면, 지금쯤 무언가를 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누구시든, 이 글을 읽는다면, 미리 염두에 두십시오. 이 방은 움직였고,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멀미가 나는군요. 버스를 탔던 기억이 나요. 비 내리는 날이었어요. 버스 바닥에 빗물이 고여 지나가는 풍경을 비추고 있었지요. 좌석 버스라 버스 냄새가 유난히 심했답니다. 저는 창가에 옹그리고 운전석 옆 통로에 고인 빗물만 주시했어요. 거꾸로 뿌리내린 나무들에 온 정신을 집중했어요.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이 몰두하게 했어요. 빗물에 비친 세상에요. 고통스러울 때 보이는 풍경이 있잖아요. 그 세계는 너무나 고요하고 안정되어 고통이 도리어 팔 긴 여자처럼 저를 붙들어 가라앉혀주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이 덜컹거리고 멀미나는 세상 속에서요. 그만 내려가렵니다. 멀미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네요. 당신이 이 방에서 얼마나 버틸지 궁금합니다. 다른 방들도 이럴까요? 제 방은 아직 이런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그것도 모르는 일이겠죠. 잠든 사이에 방 전체가 돌고 돌아 원점에서 멈추었다면 움직였대도 달라진 걸 감지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직은 진실이 뭔지 모릅니다. 내려가 보면, 차차 보이겠죠. 그런데… 방을 찾지 못하면 어쩌죠? 여기 오기 전에는 방으로 가기가 싫었는데, 이제는 무척 원합니다. 돌아가기를요.


추신.

제 이름은 신우휘,

오, 당신이라면

부탁입니다. 여기 있어요. 퇴근하고 찾아가겠습니다. 할 얘기가 있어요.


그는 미적미적 기둥에 매달렸다. 방 그늘을 빠져나오자 볼 수 있었다. 쏟아지는 불빛 아래 회전목마처럼 움직이는 캠핑촌 골목을. 사람들이 나무늘보처럼 기둥을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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