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13장 회전하는 마텔

by 수연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동안 마텔이 움직일까 조마조마했었는데, 막상 움직이니 생각보다 놀랍지 않았다. 너무 많이 상상해서일까. 상상 속에서 이미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 겪어서일까. 그는 그저 궁금했다. 이 골목이 과연 어디까지 가다 멈출지. 만약 돌고 있는 거라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방향을 거스르지만 않으면 바닥에 있는 편이 더 편하고 안전할 거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기둥에 매달려 두 발로 서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2미터 남짓 떨어진 옆 기둥에 아까 호통 친 사내와 팔 긴 여자가 아래위로 매달려 있었다. 나이든 두 남녀는 기둥에 뺨을 댄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어서 지나가려무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기둥마다 한둘씩 매달린 다른 사람들도 꿋꿋이 견디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란도란 이야기까지 나누며 자못 여유롭게 버티는 아줌마, 아저씨도 있었다. 어째서 이들은 내려가지 않는 걸까. 분명 이편이 유리하기에 아직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불편하게 매달려 있는 것 아닐까. 그가 이렇게 생각하며 애써 참고 있는데 사람들이 일제히 또렷함을 잃어가는 순간이 왔다. 이목구비가 죽 찢기더니 이윽고 너덜너덜 색채로만 휘날렸다. 기둥이 핑핑 돌고 있었다. 그는 기둥에 몸을 꽉 얽매고 이를 악물었다.

그만 내려와.

푸르스름한 목소리였다. 새털구름같이 휙, 스쳐지나갔지만 그는 바로 알아들었다. 눈에 띄게 붉은 기운이 다가와 맴돌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붉은 빛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상대 속도가 0이 되기라도 한 걸까. 눈앞에 얼어붙은 듯 정지한 얼굴이 있었다. 자신처럼 발진이 일어난 얼굴. 계단 앞에서 마주친 여자였다. 믿기지 않게도 다시 나타난 그녀가 쫙 펼친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 그는 그 손바닥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녀가 손을 더 가까이 뻗어왔다. 그는 불쑥 내지르고 말았다.

어떡하라고요? 왜 나한테만 이래요?

문득, 그녀의 눈동자가 옅어졌다. 투명한 막이 영글고 있었다.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다시 말해왔다.

그럼, 이번만. 이번 한 번만 내려와 줘.

부풀어 오른 막 안에서 애타게 빛을 보내오는 눈동자였다. 그는 심장이 찌르는 듯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 눈을 하고서도 끝까지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그녀는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온 적이 없었다. 그는 용기 내어 그 손을 쥐었다. 체온이 느껴졌다. 아주 멀리서부터 그를 위해 달려와 준 것 같은 온도였다. 그는 기둥을 붙잡고 있던 팔에 힘줄이 불거지도록 움직였다. 잔뜩 옹그리고 있던 등을 펴고 다리를 천천히 밀어내었다. 기둥 아래로 교차한 두 발이 꼭 지느러미 같아 보였다. 그녀가 손을 놔주었다. 그는 물고기처럼 타고 내려왔다.

지면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회전에 적응이 된 건지, 그새 골목이 멈춘 건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물으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모두들 안심하고 따라 내려올 거야.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궁금하지? 나한테 시간 좀 내줘. 같이 만나러 갈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네 의문을 풀어줄 거야. 어때, 쿠키 한 입 같이 할까?

그녀가 밝게 웃어 보였다. 그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살며시 고갯짓하는 그녀를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보며 걸었다. 등 뒤로 약속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들렸다. 타닥타닥, 바닥을 치는 소리들이었다. 그는 확인하기 위해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석양빛으로 물든 머리가 조용히 나부꼈다. 낙조의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바람결에 넘실대는 금잔화가 피어있는, 가을의 저녁. 셔츠 속으로 살그머니 감겨오는 미풍이 느껴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부드러움이었다.

로마의 폭군 네로에게도 회전하는 방이 있었다던데.

묵묵히 걷던 그가 돌연 비틀듯 말하였다.

그런 이유일까요?

아직도 그 생각이야? 우린 지금 걷고 있는데.

그녀가 차분히 응수했다.

나무에서 살던 옛 선조들의 눈에도 세상이 이래보였을까요? 그래서 선뜻 내려올 생각을 못했던 걸까요?

그는 두서없는 말들을 자꾸만 뇌었다.

그냥 걷자, 지금은. 곧 많은 대답들을 듣게 될 거야.

그는 잠자코 뒤따라갔다. 홀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더뎌졌다. 회전이나 회전의 여파와는 상관없이 지배인의 눈에 띌까 불안했다. 다행히 그녀는 지배인의 행동반경을 벗어난 쪽으로 걸었다. 그는 그제야 무전기에 생각이 미쳐 얼른 스위치를 껐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이쪽에선 지배인이 맡은 카운터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배인이 카운터나 카운터 주변이 아닌 다른 곳을 왔다 갔다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원칙에 충실한 지배인은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한자리에 오래 서 있는, 그래서 이따금 변칙적인 그의 행보를 못마땅히 여길망정 지배인 자신이 함부로 자리를 박찰 리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시야 어디로도 그 모습은 비치지 않고 점차 고조되는 홀 이쪽의 분위기에 젖어 그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홀 이쪽은 회전하지 않은 듯 보였다. 적어도 그 흔적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춤을 췄고 그 색색의 너울거림 뒤론 악단이 연주하는 무대가 있었다.

아코디언 주자가 앞으로 나와 악기를 주무르며 신명나게 건반을 눌러댔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동작을 멈췄다. 음악은 신났는데, 사람들은 흥을 잃고 갑자기 시무룩해져 있었다. 요란한 차림새로 고개를 떨군 남녀가 무대 가까이 서성였다. 주변에 띄엄띄엄 선 남녀들도 침울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돌연 샴페인 잔을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뱉는 사내도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샴페인담당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샴페인을 나르는 소년들을 볼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쟁반에 실린 다리가 가느다란 샴페인 잔은 대재앙과도 같았다. 까딱하면 잔끼리 부딪쳐 위험천만한 소리를 내고, 실수로 잔 하나가 기울어졌다가는 금세 와장창 깨지고 튀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한입쿠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위험 부담이 컸다. 한입쿠키는 쏟아져도 조용히 부스러기만 날릴 뿐이지만, 샴페인은 쏟아지는 즉시 시끄럽게 피를 내었다. 그는 한번 피를 본 군중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본 일이 있었다. 축제가 아수라장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순간의 어긋남. 삐끗, 해버리는 순간. 그는 거기서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일단 뒤집히고 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버린다. 기쁨에 취해 있던 사람들이 한입쿠키에 별안간 맞은 사내처럼 괴성을 지르며 난폭해지고 길길이 날뛰는 모습들. 극단은 극단으로 통했다. 폭등하면 반드시 폭락한다. 그는 정확히 그 교차점에 서 있고 싶었다. 교차점은 0과 같았고, 갈라진 바다 사이 물보라가 튀지 않는 영역이었고, 하얀색이었다. 오직 교차점만이 오르내리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나 한꺼번에 내리치는 시간은 번번이 교차점을 삼켜 달아났고 자신은 퍼렇게 남겨져 홀로 자맥질 치고 있기 일쑤였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년들이 투입됐다. 소년들은 차를 나르고 티백을 받아내기 바빴다. 아코디언 소리는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홀짝이며 잊어갔다. 간혹 차가 식는다고 아우성치며 발을 구르고 찻잔을 깔짝깔짝 흔드는 어르신도 있었다. 그는 허기를 느꼈다. 마침 자기 쪽으로 한입쿠키쟁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쿠키를 한 주먹 집었다. 소년이 흘깃 쳐다봤다. 줄곧 교대해 왔지만 서로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주고받은 적은 없는 관계였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소년의 시선을 맞받았다. 소년은 야릇하게 입술을 실룩이더니 그대로 지나갔다. 그는 와자작 쿠키를 깨물었다. 지배인에게 일러바친대도 이제는 상관없다.

그는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어느새 엄지와 검지 사이에 쏙 들어갈 만치 멀어져 있었다. 소년들이 차를 내오는 맞은편의 기다란 카운터 좌석 쪽이었다. 그녀는 표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숨 가쁘게 따라잡았다. 오른편 끝에 등을 보이고 앉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녀와 옷차림이 같았다.

이신추!

그녀가 부르자 남자가 자전거 안장 같은 의자를 돌려 눈을 맞춰왔다. 서늘한 눈매였다. 부동의 눈동자가 우물물처럼 깊었다. 눈썹은 기러기가 나는 듯했고 얼굴선은 기름했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인상이었다. 면전으로 참새가 부리를 앞세우고 날아와도 나근나근 두 팔을 흔들며 즐거워할 것 같았다. 남자는 손가락을 찻잔 귀에 걸며 안녕, 했다. 그는 바늘귀만큼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남자가 바로 옆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는 얼결에 앉았다.

지금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 해.

그녀가 그의 왼편 의자를 붙잡고서 이렇게 부추겼다. 그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눈을 맞춰오자 대뜸 말해버렸다.

방이 움직였어요.

남자는 듣고도 반응이 없었다. 비웃는다거나 의심하는 기색은커녕 아예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그를 보고 있다가 딱 한마디 했다.

아직 어리네.

네?

내 나이쯤 되면 방은 그저 방이고 움직이는 일이란 없지.

방을 움직인다면 모를까.

그녀가 태연하게 한술 더 떴다. 그는 이들이 보기보다 나이가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엔 형, 누나뻘인 듯한데. 남자가 그에게로 찻잔을 밀었다. 우윳빛 도기 안은 물기 없이 비어 있었다.

하나만 부탁해. 손에 쥔 그거.

뜻밖이었다. 그는 퍼뜩 손안에 남아있는 쿠키를 의식하고 잔 바닥에 놓았다. 화이트와 다크 초콜릿칩이 촘촘히 박힌 쿠키였다.

안 그래도 드리려고 했는데.

그는 다소 멋쩍게 얼버무리며 남자의 옆얼굴을 살폈다. 남자가 예의바른 미소를 떠올려보이곤 모로 고개를 틀었다. 옆구리 쪽 지퍼를 열고 뭔가 끄집어냈다. 그는 부러 긴 탁자의 물결무늬에 눈길을 주다 지퍼가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돌아봤다. 남자가 손에 투명한 빨대를 든 채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남자가 빨대를 찻잔에 넣더니 쿠키에 닿지 않게 휘휘 저었다. 눈앞에서 쿠키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젓는 방향대로 같이 휘말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쿠키는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무르고 걸쭉한, 끈끈하게 밀도 높은, 점성을 띤 물질로 변해갔다. 단조롭던 색깔도 오묘해졌다. 빨간가 하면 노랗고, 푸른가 하면 연보랏빛을 띤 색조로 반짝반짝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알갱이 없이 녹아들어 남자가 빨대를 뽑았을 땐 완전히 안정화되어 있었다. 쿠키는 신비로운 빛으로 일렁이는 한 잔의 추상화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마텔에 온 뒤로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만큼은 아니었다.

도대체, 뭐지요? 마술 같은 건가요? 멀쩡한 쿠키가…….

그는 말문이 막혀 입을 헤, 벌리고만 있었다. 남자는 빨대를 도로 집어넣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글쎄. 달아서 그런가. 내가 온 곳에선 이걸 달고나 기법이라 부르지.

남자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옆에서 그녀가 나직이 귀띔해줬다.

쿠키를 녹이는 건 차라리 쉽지. 다른 걸 녹이는 게 어렵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좀 더 설명해주기를 바라는데 남자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자, 그럼 변죽은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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