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란 우리가 온 곳에선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낡은 방식일 뿐이다.
어쨌거나 마텔의 주인은 내가 아니에요.
마텔에 주인은 없다. 관련된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여주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있을 뿐이죠.
그가 입가를 비죽이며 되받았다.
여주인을 왜 여주인이라고 생각해?
남자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응수했다.
그는 기가 막혀 한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질문에도 굳이 답을 해줘야 하나? 하지만 남자가 어떻게 나올지 살짝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험 삼아 던져보았다.
여주인이니까 여주인이라고 생각하죠. 어떻게 여주인을 여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어요?
됐다, 됐어.
그는 남자의 대답이 너무 싱겁다고 생각했다. 막 대화에 흥미가 생기려던 참이었는데. 그는 남자가 이대로 끝맺음을 할까 불안해졌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왜 하필 마텔이죠?
이곳은 수많은 감옥들 중 하나다.
감옥이라고요?
넌 죄를 지었다. 죄를 짓지 않으면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무슨 죄요?
넌 자신을 속였다.
기억나지 않아요.
그는 빠르게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초면에 뭘 보고 그렇게 단정 짓는지 황당했지만 어쩐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의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그때 넌 네가 아니었다.
무슨 말이에요? 내가 이성을 잃었단 뜻인가요? 당신들은 누군데요? 어디서 왔어요?
우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에서 왔다. 이곳의 개념으로 우리를 설명할 순 없다. 우린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내 눈엔 보이는데요?
이곳이 말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이지. 여기선 달리 존재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각 세계의 규칙을 따른다. 안 그러면 입장할 수 없다.
마텔에 드나드는 고객들처럼요. 옷을 바꿔 입고 태도를 꾸미고 말이죠.
마텔에 기회를 줘라.
왜 그래야 되죠? 로마 귀족이나 술탄처럼 모든 쾌락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드는 곳인데요. 이곳을 봐요. 거대한 침대식탁이잖아요.
넌 아직 배워야 한다.
이곳에서요? 여긴 감옥이라면서요. 벌 받으러 이곳에 온 거라면 제가 원한다고 함부로 나갈 수도 없을 텐데요.
네가 떠날 생각을 한 뒤부터 마텔의 회전이 느려졌다. 마텔은 자전한다. 그동안은 자전 주기가 충분히 빨라서 못 느꼈겠지만, 한순간도 돌지 않은 적이 없어. 회전은 마텔의 심박과도 같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느껴져야 정상이야. 이렇게 불쑥 지각되리만치 감속하면 마텔이 앞으로 풀가동되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그래도 웬만하면 참을 거야. 이곳이 유지되는 한은. 그러나 그들이 너처럼 내릴 준비까지 되어있을까?
제 마음이 무슨 상관이에요? 전 마텔이 부리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데요. 저 하나 나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여주인의 계약조건, 너도 알잖아. 그 조건의 ‘누구든’에 너는 포함 안 될 거라 생각하냐. 하지만 그보다, 조건에 명시되지 않은 사실이 있어. 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네가 나감과 동시에 이곳은 사라져. 사람들과 함께.
믿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온 거다. 너를 설득하러.
제 유형기간은 언제까진가요? 그쪽 말이 맞다 치고. 제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데요?
넌 여기 배우러 왔다.
벌 받으러 왔겠죠.
넌 삶을 배우기 위해 왔다.
댁들은요?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댁들은 대체 어디서 왔어요? 당신들은 죄가 없어요?
죄 없이 여기로 오는 사람은 없어. 우리도 여기 오기 위해 죄를 지었다. 사람의 목숨을 빚졌다. 이분의 언니였다. 스스로 연료가 되었어. 열망으로 가득 찬 생명이 못 다 이를 곳은 없다. 그분이 던진 생명력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널 살리러.
그는 슬며시 그녀 쪽을 눈으로 더듬었다. 그녀는 여전히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숙인 고개 따라 흘러내린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눈길을 거두고 침묵하다 다시 덤비듯 물었다.
제가 죽나요?
이곳을 나가버린다면 넌 네가 아니게 된다.
동어반복이네요.
그리고 배우지 못하겠지.
당신들이 온 곳이 대체 어딘데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 대체 있을 수 있나요? 내가 미쳤다는 게 더 설득력 있겠어요.
우리가 온 곳에 대해 말로 설명할 순 없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 줄 수 있다. 넌 기억하지 못해도, 네 하늘은 알고 있다는 거다. 네 하늘이 너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참고로, 우리는 무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세계에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지.
당신네들은 다 안다는 거예요?
앎도 우리의 개념이 아니다.
말장난 같은데요.
언어는 빈약한 거다. 말했다시피, 우리 세계에서는 언어가 아주 낙후된 통신수단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어쩔 수 없이 확인시켜주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사망 신고서에 찍는 도장이라고나 할까.
그곳도 행정 절차 같은 게 있는 모양이죠? 어쨌거나 이곳은 아직 말 한마디에 생사가 결정되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가 다른 거다.
당신들은 우주복같이 생긴 걸 입고 있는데요.
너희 세계의 개념으로는 이 옷이 살아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을 상징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아니 생각은커녕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온 곳이 빅뱅의 시발점 혹은 도착점처럼 멀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건가요?
그 정도라면 오히려 가깝지.
뭐든 분명히 말해주는 법이 없군요. 네, 네. 무슨 말 할지 알아요. 말이란 빈약한 거다, 맞죠?
네가 이곳을 나가면 이곳은 폭발해. 산산조각이 나. 너 때문에 얽혀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아무렇지 않다는 거냐?
지금 화내시는 거예요? 그쪽도 감정이 있긴 하네요.
말 돌리지 말고 들어. 이 사람들은 너를 가르치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역할을 수행중이야. 이 사람들도 각자의 세계에서 저마다 주인공이야. 단지 이 세계에서의 주인공이 너일 뿐이지.
그렇다면 이들 모두 죄인이군요. 형기를 저 때문에 빨리 마치게 된다면 오히려 이득이죠.
아직 네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못 보는구나. 죄가 있다는 건 배울 게 있다는 뜻이야.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끝나버린다면 그 상태로 또다시 죄를 짓게 돼.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해 봐. 여기서 나간다고 끝이 아니야. 그리고 너 때문에 동원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의 끝장으로 각기 영향을 받아. 각자의 세계에서 흔들리게 돼. 너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단 말이야. 우리는 그걸 막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다. 너한테 우리가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우리 같은 존재가 있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할 때 목숨까지 바쳐가며 말리러 가. 닿을 수 없는 저 끝에서도 말이야.
언제까지 갇혀있어야 되는데요? 제가 자살하길 바라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살 수 있을 거라 여기시나 본데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맞아요, 말이 모든 걸 표현할 순 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보다 나은 수단은 몰라요. 그래서 말하는데요, 전 죽을 거예요. 못 가게 하면 죽는다고요. 까짓, 제 목숨 하나가 뭐 대수냐 싶겠지만 그렇다고요.
너를 죽이는 것도 저들을 죽이는 거다.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거예요?
맘대로 태어난 게 아니잖니.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네. 이봐요, 말장난은 그만둬요. 사람 잘못 봤어요. 난, 인류의 목숨을 내 목숨 위에 두는 사람이 아니에요. 인류의 목숨 따위 이 과자 한 조각이 부서지는 것만큼도 신경 안 쓰인다고요. 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어요. 지금도 저 사람들 실감 안 나요. 아마 저 사람들도 나에 대해 같은 느낌일 걸요?
쉿. 주변을 살펴. 벌써 변화가 시작됐다.
그는 홱 돌아보는 시선들을 의식했다. 남자가 슬그머니 일어서며 속삭였다.
네가 이들을 거스르려 하니까 난데없이 시선이 몰리는 거야. 사단이 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 내가 해줄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이분이 마저 하실 거다.
남자가 입을 다물고 주시했다. 그를 향해 눈썹을 올렸다 내려보이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묵연히 의자 꽁무니만 붙들고 서 있던 그녀는 잠깐만, 하고는 총총히 따라나섰다. 그는 혼자 남겨지는 일이 처음인 양 안절부절못했다. 머리를 깨부술 것 같은 시선의 압박이 느껴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죽은 듯 멈춰 눈을 내리깔았다. 찻잔이 보였다. 마술 같은 찻잔이 자기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어 붙잡아 당겼다.
쟤가 믿을 거라고 생각해?
단숨에 이신추와 나란히 선 그녀가 속삭였다.
그앤 이미 믿고 있어. 나는 그애가 믿고 싶어 하는 쪽으로 이야기해줬을 뿐이야. 그앤 여길 나가고 싶어 해. 그건 다른 곳이 있다고 믿는단 얘기지. 거기 장단을 좀 맞춰 이야기를 용이하게 풀어나갔을 뿐이야. 이제 네가 나설 차례야. 네가 읽어낸 이야기를 그애한테 해. 그앤 설득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왜 하필 나야?
그녀가 이신추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라고? 논리를 따지다가 마음을 놓치는 수가 있어. 마음은 항상 논리의 그물을 빠져나간다는 거, 알고 있잖아.
이신추는 단 한 순간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피로해진 듯 엷은 웃음기를 띄우며 말하였다.
인간은 극적인 데 몰두하는 경향이 있어. 겉으로야 어떻든 속으론 저마다 극적인 감정에 젖어있기 일쑤지. 내면의 비참함이 피부로 배어나와 눈 밑을 짙게 물들여놓도록 말이야. 저앤 얼굴 가득 분화구를 일으켜놨더군. 너랑 잘 통하겠어. 김서.
그랬군. 그래서 나한테 임무를 맡긴 거로군.
이신추는 싱긋이 웃기만 했다. 그녀는 미간을 조이며 외면했다. 이신추는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눈동자를 맞춰왔을 때, 이신추는 절도 있게 오른손을 같은 쪽 이마 옆에 갖다 붙였다. 그녀는 간신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손을 올려 마주 경례했다. 우아하게 되돌아섰다. 그러나 몇 발짝 떼지 않아 보폭이 졸아들며 밧줄에 잡아 채인 듯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