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연필심으로 웜홀을 팠다. 김서는 먹먹히 노란 터널과도 같은 언니의 문장들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더는 가만히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없었다. 다시 발을 들어 밀었다. 자신을 포함하며 자신에게 깃들인 생명력 전체로 밀었다. 언니 몫까지 밀었다. 이것이 최선이었다. 김서는 그대로 밀고 나갔다. 잠시도 멈추거나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찻잔에 몰두해 있었다. 도대체 뭘까. 잔을 들어 거꾸로 뒤집어도 안에 든 물질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찔러 보았더니 끈적이기는커녕 속이 빈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밑바닥까지 가 닿았다. 그는 턱을 받치고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히 보이는데. 네온 같은 걸까. 아니면 공기 입자조차도 아닌 걸까. 이신추라는 남자 말대로 이 세계에선 달리 존재할 방법이 없어서일까.
꿈 깨.
그녀가 불쑥 다가와 말했다. 그는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잔을 낚아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물건이 박살났다. 아쉬워할 겨를도 없었다. 너무나 돌발적이어서 무감각했다. 그는 어물쩍 눈을 돌렸다. 그녀를 비껴 시선을 휘 던졌다. 사람들은 아직 춤을 추고 있었다. 멀리 내쳐진 것처럼 작은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흐느적거리고들 있었다. 그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카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그냥 달라고 하면 될 걸. 굳이 깨부술 것까진 없잖아. 그는 뒤늦게 올라온 쓴 감정을 삼키며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거머쥐고 나왔다. 쓸려고 보니 깨진 도기 조각밖에 없었다. 찻잔이 깨짐과 동시, 안에 담겨 있던 진기한 현상들까지 전부 깨져버린 것 같았다. 꿈에서 강제로 끌려나온 것처럼. 그는 쓸어 담은 파편들을 비우고도 쓰레기통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이거 찾아?
그녀가 물어왔다. 가까이 쳐든 양손바닥 위에 바짝 응고된 물건이 있었다. 그는 뭐예요, 눈으로 물었다.
이게 그거야. 네가 뚫어져라 보던 그거. 난 꺼낸 것뿐이야.
그는 얼른 와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호기심에 저절로 눈이 가 방금까지의 낙담을 잊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알쏭달쏭했다. 깨지기 전만 해도 비어있는 색채였던 물질이었다. 그런데 깨지고 보니 형태를 단단히 유지하고 있는 결정체로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딱딱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물로 빚은 것 같았다. 표면에 잔잔한 파동이 느껴졌다. 톡 건드리면 형체를 부드럽게 허물고 동심원을 그릴 것 같았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해 보였다. 알맹이다웠다. 중심에서 반짝반짝하는 무늬까지 내비추고 있었다. 눈송이를 닮은 무늬였다. 그는 몹시도 만져보고 싶었다. 그녀가 때마침 허락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눈송이가 아른아른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멈췄다. 눈송이가 제자리로 모여왔다. 그는 신나게 흔들며 물건에 걸맞은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녀가 물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몽돌. 어때요?
몽돌? 같은 이름의 돌멩이를 알고 있긴 한데….
글자나 소리가 같다고 같은 이름이랄 수 있나요? 이 몽돌의 몽은 뜻도 다른데요.
그는 조금 주눅이 들어 소심하게 반박했다. 그녀는 선선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꿈꾸는 돌멩이?
맞아요. 꼭 꿈꾸는 돌멩이 같잖아요.
음, 네가 그렇게 보니까. 물건 자체엔 이렇다 할 특성이 없어. 그만 나가자.
이거 저, 주는 거예요?
그가 굉장히 들떠하며 말했다.
응, 이름까지 지어 붙였는데. 네가 주인이지. 그러니까 지금은 나갈까.
그는 그제야 몽돌에서 주의를 돌리고 물었다.
어디로요.
무대로.
예?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약간 웃었다.
나랑 한 곡 추자고.
그는 긴가민가하여 그녀의 표정만 살피었다.
너 퇴근했잖아. 귀한 시간, 제대로 써야지. 어서 나가자.
그녀가 이렇게 재촉하며 그에게 미소 지었다. 그는 홀의 분위기가 바뀐 걸 감지했다. 울려 퍼지는 음악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몽돌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홀에서는 남녀가 짝을 지어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나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섰다. 몸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큐가 되어 털끝을 이루는 쿼크의 구조를 흔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몽롱해졌네.
그녀는 재밌어하며 말했다.
몽상가 같아. 내가 읽으려던 소설에 나오는…….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문득 다가섰다. 그의 어깨에 살포시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은 든 채로 가만 기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맞잡았다. 남은 손을 그녀의 허리에 대고 오므렸다. 둘은 느리게 발을 뗐다. 손바닥에서 핏줄 뛰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웃었다. 그의 두 귀가 잎사귀처럼 물들어 있었다.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닿은 것은. 그는 몇 번이고 발을 헛디뎌 그녀를 휘청거리게 했다.
괜찮아. 집중해. 봐, 집중하니까 사람들 속에서도 문제없잖아. 사람들도 널 의심스런 눈으로 보지 않고.
그녀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는 이번에도 확인하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발 맞추어 느릿느릿 작은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 그저 너무나 즐겁고 자연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제 보니 많이 닮았어요.
누굴?
그는 묻는 말엔 대답 않고 계속 말했다.
끝머리가 잔뜩 삐친 거하며 그 눈동자.
눈동자?
네. 그애는 달리기를 잘해요.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즉각 튀어나가 전속력으로 달려요. 그런데 멈출 줄을 몰라요. 도착지의 흰 천이 배꼽을 휘감아 끊어져도 모르고 계속 달려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말려도 몰라요. 바람과 속도와 열망에 취해 한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만 하죠. 그러다 딱 경기장 담벼락에 부딪치는 거예요.
그는 거기서 말을 쉬었다.
그래서 멈췄니?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렇담 그앤 나랑 안 닮았네. 벽은 나를 더 달려 나가게 자극하거든. 벽은 그러라고 있는 거야.
유쾌하게 말하던 그녀의 시선이 홀연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의 오른쪽 귓가 어디쯤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잠시 자신에게만 익숙한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그의 존재와 주고받던 말들, 이 장소와 흐르는 시간과도 상관없는 곳에서 어둡게 떨렸다.
내 최대의 벽은 언니였어.
그녀가 말하였다.
그, 연료가 되었다는 사람 말인가요?
응. 우린 거의 모든 면에서 안 맞았어. 언니는 나에게, 나는 언니에게, 무수히 죄를 지었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돼요.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산다는 것 자체가 혐의를 짊어지는 일이니까.
그럼 인정하는 거네.
그럼요. 인정했으니까 여기 있죠.
그녀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눈동자를 다시 그에게로 맞추었다.
왜 그 옷만 입어요?
너는 왜 그 옷만 입니?
유니폼이잖아요.
이것도 유니폼이지. 왜, 매일 같은 옷이어서 신물 나?
내가 고른 옷이 아니잖아요.
여기 고객들처럼 파티복을 골라 입을래?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솟아나는 미소가 입가를 간질였다.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입을 열면 목소리마저 간질거려 이 미소를 들킬 것 같았다. 그는 푸른 연둣빛을 잔뜩 칠하고 싶었다. 이 대화의 색조가 바래기 전에. 순간 그녀의 말투가 회색조로 달라졌다.
인간관계란 큐브 돌리기와 같아. 어지간히 한 면을 맞춰 놓으면 다른 면이 엉망으로 틀어져버리기 일쑤지. 옷에까지 나를 맞추려고 진을 빼고 싶진 않아. 유니폼의 장점은 그거야. 입기 전에도 입고 나서도 신경 쓰이게 하지 않거든. 안전하게 묻혀 있을 수 있지. 유니폼과 나 사이엔 여간해서 갈등이란 게 없어. 내가 그걸 헐뜯거나 더럽히지 않는 한. 뭐, 세탁도 꼼꼼히 해야겠지만.
유니폼을 입는 대가로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잖아요.
그가 의혹에 찬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자유와 개성을 말하는 거니? 나와 관점이 다르구나. 나는 유니폼이 그것들을 지켜준다고 믿어. 익명성같이. 난 공원을 거니는 것이 좋아. 사람들에 둘러싸여 걷다보면 나를 잊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찾아져. 안팎이 통해서 뭐랄까, 자연통풍이 되는, 저절로 환기가 되는 기분이랄까.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또다시 숨겨진 딴 세계에 가 있는 눈동자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눈에 띄지 않을 때 나는 나로 숨 쉴 수 있어.
하지만 당신 얼굴의 발진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는 갑자기 이렇게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돌아봤다. 그는 별안간 입속말했다.
나는 나를 석방할 거예요.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 옷을 입기 전에는 어땠는데?
그는 도도하게 말하였다.
그림을 그렸어요.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인상적인 것들을 낚아 가뒀죠. 그리고 내 맘대로 칠을 했죠.
다가가진 않고?
다가가진 않고.
그는 따라 읊조리고는 말했다.
구름을 주로 그렸어요. 너무 맑은 하늘은 가슴이 시려서요. 구름이 좀 껴야 붓이라도 잡아볼 마음이 생기지요. 한번 그리면, 되풀이해 그렸어요. 나름의 변주 기법이었죠. 휴일에는 더러 사생도 했어요. 네덜란드의 화가 라위스달이나 영국의 컨스터블이 그린 풍경화 속 구름을 따라 그려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역시 보지 않고 그리는 구름이 제일 구름다웠어요. 구름이란 원래 없는 거잖아요. 형태가 없는 것들이 모여 형태를 이룬 거잖아요. 칠을 거듭해야 비로소 형태가 잡히듯. 맞아요. 내가 그린 모든 것들은 구름이었어요.
그의 눈빛이 표변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린다는 건, 성냥을 켜고 내던지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래?
그녀는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던져보려고요.
그의 어조는 의미심장했다. 그녀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삶을 되찾겠다, 이거니? 나도 우리가 꿈꾼 별이 이런 곳일 줄 몰랐어. 이상과 현실은 무참하게 어긋나버리지. 그렇다고 현실을 박살내야 되겠니? 여긴 사람들이 있어. 서로 대위법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앞서 달려 나가던 사람이 멈춰버리면 뒤따라가던 사람도 덩달아 흔들리게 돼. 변주 기법 운운했으니 잘 알겠지. 차라리 그 이상이란 것을 종잇장처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라지. 네가 불을 붙여 태워야 할 것은 그거야.
그녀가 마지막 말을 씹어뱉고는 그를 놓았다. 성난 얼굴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멀뚱히 작아져가는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아련히 파닥이는 날개 뼈 뒤로 여전히 푸른 연둣빛 공기가 솔음으로 미끄러져 다가왔다. 곡조가 바뀌었다. 자연스런 왈츠가 끝나고 사람들은 이제 뿔뿔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그들의 고독한 춤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오에게 가고 싶었다. 그녀를 아느냐고 맞대놓고 물어 중단된 이야기를 거기서부터 새로 이어나가고 싶었다. 오가 무사히 돌아와만 있다면. 혹 편지를 읽었을까.
오의 방은 그의 방 건너편에 있었다. 홀은 둘을 잇는 다리 격의 장소였다. 물건들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찾아올 것이다. 그는 사방을 뒤지듯 살피며 빈 카운터 좌석 쪽으로 걸었다. 탁자에 등을 기대고 지켜보다 이내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누군가 이토록 필요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홀을 단숨에 가로질러 캠핑촌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로등 밑처럼 드문드문 불 밝혀진 골목은 정지해 있었다. 회전에 시달린 사람들 모두가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대략적인 원근감마저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골목은 적요했고 자신의 헉헉거리는 숨소리만 크게 울리었다. 그래도 나아갔다. 어둠이 내리든 빛이 내리든 팔을 뻗어 기둥을 어루만지다시피 세며 나아가다 넷에서 멈췄다. 삽삽한 먼지가 손가락에 느껴졌다. 그는 붙잡아 매달렸다. 덜덜거리는 사지를 끌어올리고 올려 바닥에 걸터앉았다. 포스트잇이 한 장도 잡히지 않았다. 인기척은 없었다. 그는 주저 없이 움직여 불을 켰다. 천장의 모양새며 나뭇결로 보아 틀림없는 오의 방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지 몰라보게 살풍경해져 있었다. 물기가 없어진 것까진 좋았는데 커튼도 사라지고 침대도 어디론가 치워져 휑한 상태였다. 그대로인 것은 냉장고와 뚜껑이 달아난 주전자뿐이었다. 그는 숨을 내쉬며 허리를 구부렸다. 주전자 손잡이를 드는데 검은 것이 눈에 띄었다. 좌측 만곡부에 도장 크기만 한, 시꺼멓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그는 슬며시 손가락을 갖다 대 문질러봤다. 곱고 차가웠다. 희미하게 탄내가 맡아졌다. 그는 후, 불었다. 검은 새처럼 날아간 그것은 잠시 공중에 휘청이다 머뭇머뭇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