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18장 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by 수연


내가 오의 꿈을 모방했단 얘긴가. 현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벗어놓은 구두만 달랑 보였다. 아니, 시꺼먼 구멍이 함께였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오락가락하는 사이 구멍에 이르렀다. 천장까지 이어진 은빛 기둥이 중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바닥까지의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어쨌든 내려가야 한다. 그는 구두를 꿰어 신고 털썩 주저앉아 두 발을 빠뜨렸다. 기둥을 꽉 잡았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몄다. 그는 기둥에 두 다리를 감고 엉덩이를 펄쩍 뗐다. 좁은 그늘이 밝게 트여오도록 내려갔다. 발이 닿았다. 완전히 내려선 그는 기둥에 달아오른 뺨을 대고 잠시 기대어 있었다. 기둥은 뺨의 열기를 대번에 식혀버렸다. 그러자 불현듯 보였다.

5월 8일이었다. 소년은 화구통을 어깨에 소총처럼 메고 양말코너로 향했다. 소년이 화구통의 뚜껑을 열자 어지럽도록 짙은 석유 냄새가 맡아졌다. 소년은 붓에 빨간 유화물감을 묻히곤 진열대 측면에 세로로 썼다. ‘5월에 책임을 묻는다.’ 알려진 시구와는 달리 소년이 생각하기엔 5월이야말로 잔인한 달이었다. 가진 것이 없고 소외된, 관계에 서툰 인간들에겐 말이다.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5월은 인정사정없고 불공평한, 노골적으로 좌절과 박탈감을 조장해 씨를 말리기로 작정한 듯한, 비참한 달이었다.

마음 같아선 5월의 산타가 되어 가장 길고 폭이 너른 수면 양말에 텍사스행 비행기 표나 당장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을 돈다발을 집어넣어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얼마나 많은 5월이 희생되어야 할까. 그 사이에 어머니는 돌아가실지 몰랐다. 소년은 동무들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5월을 없앨 순 없으니 물건들을 없애기로. 그들은 통을 기울여 안에 든 액체를 쏟았다. 미끈한 석유가 바닥으로 철철 흐르자, 가운데 서 있던 소년이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성냥갑을 꺼냈다. 소년은 성냥 하나를 집어 들고 성냥 대가리가 번쩍 타오를 때까지 유황에 긁어댔다. 성냥에 불이 붙자 소년은 가만히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재촉해대도 그대로 성냥불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소년은 그 순간 자신의 힘을 만끽하고 있었다. 성냥불이 자신의 머리와 심장까지 밝아지게 한 듯했다. 던지느냐 마느냐. 소년의 선택에 모든 게 달려있었다.

뭐하는 거야! 어서 던지지 않고!

옆에서 성냥을 뺏어들고 휘 던질 때까지 소년은 꿈꾸는 눈동자로 물끄러미 서 있기만 했다. 양말들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줄줄이 걸린 그것들이 잿더미로 바뀔 때까지 진열대는 멀쩡했다. 머리 위로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찬 물줄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동무들은 비 맞은 고양이 꼴로 황망히 내빼버렸다. 지배인에게 붙들린 것은 던지려다 만 소년뿐이었다. 지배인은 소년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경찰서로 갈래, 여기 남을래. 내 밑에서 일하면 장래가 보장될 텐데. 넌 다른 녀석들과 다르잖아. 녀석들은 끝내 행동의 노예가 되어버렸지만 넌 극단적인 순간에도 너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어. 마텔엔 너같이 신중한 젊은이가 필요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년은 남았다.


꿈에 어머니는 소년에게 노래를 불러달라셨다. 소년은 시험을 보러 가야 했다. 시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맑고 영롱한, 거의 여자애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가 평소 듣기 좋아하던 동요를 불러드렸다. 어머니는 빈 그네에 앉아 듣고 계셨다. 노을빛이 찬란한 놀이터에는 어머니와 소년, 단 둘뿐이었다. 소년은 유황 같은 해를 보며 ‘엄마 얼굴’이라는 노랫말이 나오는 끝 소절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다 들으시고 한 번 더 불러 달라 말씀하셨다. 소년은 시험 때문에 초조해져 왜 그러느냐고 볼멘소리를 내어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셨다.

네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어머니가 다시 못 볼 것처럼, 마치 네가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만 볼 수 있다는 듯이 그 말씀을 하셔서 소년은 문득 정신이 아뜩해졌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놀이터에 가득 차고 넘쳐서 하늘까지 다다라 석양 같이 울려 퍼졌다. 그는 그 목소리에 자신을 붙잡아 매놓고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으려, 깨어나지 않으려 안간힘 썼지만 홀연히 눈이 떠지고 눈물방울처럼 꿈 밖으로 넘쳐흐른 어머니의 그 따뜻한 잔향(響)만이 귓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멈추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불러드렸더라면, 그럴 수 있었다면 깨어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 거기, 그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그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구멍이 된 가슴으로 누워 있었다. 행복의 원천이란 게 있다면 바로 그거였을 무언가를 방금 잃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의 곁을 떠나 이곳에 정말로 시험을 치르러 온 것 같았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온기는 없고 물건들만 가득히 찬 곳에.

그는 진열대 물건들의 밤을 떠올렸다. 이제는 마음대로 선물을 고를 수 있는데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소년은 소년으로 남아있지 못했다. 그가 되어야 했다. 만약 그때 소년이 성냥을 꺼내는 대신 마음을 바꿔 양말을 한 켤레 집어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소년의 수중엔 딱 그만한 액수의 돈이 있었다. 왜 나는 이토록 먼 길을 택했을까. 그는 소년이 몹시도 원망스럽고 그리웠다. 시기가 달랐다면 소년은 무난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소년 일행은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도 자신들이 마텔을 습격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었다. 그들은 반쯤 열린 차창 사이로 하염없이 밖을 내다봤다. 밖은 칠이 한창인 화사한 화폭 같았다. 초록이 근사했다. 염색약을 비닐 손에 듬뿍 묻혀 엄마 머리에 골고루 바르던 토요일 아침이 생각났다. 자기 손길 따라 엄마 머리가 다시 진한 색을 띠어가듯 법칙에 사로잡히지 않는 어떤 즐거운 활기가 나무들을 선명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특히 뿔같이 내뻗친 조팝나무 줄기를 채워가는 흰색에선 용솟음치는 생명력이 길길이 짓쳐 오르고 있었다. 석유에 미끄러지는 붓끝처럼 새가 활강했다. 어두운 회색을 띤 새는 날갯죽지를 쫙 펴고 서에서 동으로 빙그르르 날았다. 그리고 다소 힘겹게 날개를 파닥이며 아파트 옥상 지붕 끝에 가 앉았다.

소년은 이 봄을 완성중인 화폭의 주인이 자신이 아닌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이 모든 게 자기 것이라면 마음껏 선물할 수 있을 텐데. 언제든 기대어 쉴 수 있는 무성한 느티나무 한 그루, 색깔별로 골고루 꺾어 섞은 철쭉 한 다발, 베갯잇으로 쓸 파란 하늘 한 조각, 여름에 덥고 잘 구름 한 겹, 마음이 괴로울 때 켜둘 태양 전구 한 알, 그리고 숨 막힐 때 들이마실 산들바람 한 봉지. 눈에 보이는 풍경이 죄다 물건들로 보였다. 그들은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터덜터덜 일렬로 걸어가 마텔 정문을 지났다. 원래는 카네이션을 파는 곳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커다랗게 써 붙인 가격표의 숫자를 보고는 하나, 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소년이 갑자기 무리를 이탈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년은 양말코너로 직행했다. 동무들은 얼떨결에 방향을 틀어 소년을 뒤따랐다. 소년의 머릿속에 어머니의 갈라지고 바싹 마른 발바닥이 떠올랐다. 소년은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성한 양말을 신고 있는 모습을. 어머니는 늘 구멍이 나거나 발목이 늘어난, 뒤꿈치가 다 해져 속살을 보호받지 못하는 양말을 신고 계셨다. 가끔씩 세일코너에서 웃옷을 하나 집어 들망정 자신의 발을 위해 새 양말을 사 신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자식이 남은 것을 탈탈 털어 선물하는 한 켤레의 양말은 어쩌면 양말 이상의 값어치를 지닌 소중한 의미로 다가올지 몰랐다. 하지만 소년은 막상 진열대에 걸린 수두룩한 양말들을 보자, 그만 심장이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고 동무들에게로 돌아섰다. 마침 양말코너엔 지키고 선 판매원도, 쇼핑객도 없었다. 그야말로 그 물건의 보잘것없음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꼴이었다. 소년은 손짓으로 동무들을 불러 모았다. 계획을 변경하자고 말했다.

본보기로 삼을 것이 필요해. 그냥 우발적인 충동으로 보이는 건 곤란해. 우리는 어디까지나 의식을 갖고 분명히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야. 우리는 양말을 선물할 수도 있어. 하지만 고작 양말 두 짝 안에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게 뭐지?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라곤 양말뿐이지만 그건 사회가 우리를 덕장에 매달아 놓은 황태마냥 말렸다 얼렸다를 반복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지금 그 덕장의 한복판에 와있어. 어떡해야겠니? 덕장의 논리에 굴복하고 순순히 양말을 사들고 물러날래, 아님 이 덕장에 불을 지를래? 난 더 이상 황태처럼 그들이 먹기 좋게 꾸덕꾸덕 말라가기 싫어. 밑바닥까지 추락해 왕창 부서질망정 더 이상 이대로 매달려 있고 싶지 않아!

소년의 외침에 동무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화구통 안에 든 석유통을 꺼내 그 뚜껑을 열었다. 동무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부추긴 소년의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는지.

소년은 성냥 켜는 것을 좋아했다. 가느다란 성냥 대가리가 타악, 찢겨 황홀하게 솟구치는 순간을 좋아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기 전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면 불붙은 성냥을 들고 담벼락의 쓰레기를 응시하곤 했다. 그때마다 쓰레기 쪽에서도 마주 비춰왔다. 화살촉처럼 박히어오는 투시였다. 너는 뭐가 달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한테도 유통기한이 있잖아. 시일 내 처릴 못하면 네 안의 것들도 이렇게 썩어 문드러지고 말거야. 소년은 확 던져버리고 싶었다. 비닐에 메워져 묶인 쓰레기더미를, 그 뚫어지게 응시하는 양심을 모조리 태워 없앤다면 편해질까. 소년은 핏 웃었다. 그래봤자 허영이었다. 밀려나온 콧바람에도 꺼져버리는 허영. 양말코너에서라고 얼마나 달랐을까. 소년은 던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잡아 켜는 허영이었기에 던지지 못한 것이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허영 이전에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이 말해왔다. 자신이 그 어떤 짓도 저지르지 못할 거라고. 불을 삼키러 올까봐. 황소가 불을…….

그 옛날 황소에게서 도망친 아이가 있었다. 이웃집 누이였던 금주, 은주 두 자매가 집에서 기르던 황소를 보여주었었다. 황소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육중한 몸집을 한 동물이었다. 석양빛을 받아 털들에 불이 이는 것 같았다. 그런 황소가 울 가까이 다가와 아이의 눈을 마주보았다. 아이는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서 자매 둘이 자꾸만 내기를 걸어왔다. 아이는 억지로 울짱에 매달렸다. 가로대를 층층이 딛고 올라 꼭대기에 둘러친 통나무를 끼고 앉았다. 자매는 노련했다. 통나무를 거뜬히 넘어가 한 발은 가로대에 다른 발은 공중으로 내뻗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황소가 한 마리씩 뿔을 틀어 다가왔다. 금주는 황소가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버티다 적시에 오른손을 뻗어 소의 뒷덜미를 붙잡고 오른다리부터 힘껏 소 등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도록 황소가 가만히 등을 대주고 있는 것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못 본 사이 은주도 훌쩍 소 등을 타고 가버렸다. 아이는 처음이었다. 소가 움직일까 무서워 울타리에서 엉덩이를 떼기조차 어려웠다. 기다란 소의 등짝은 아주 가까이, 통나무와 평행하게 놓여 있었다. 자매가 올라탄 황소 두 마리는 마침 꼬리를 보이고 있었다. 아이는 거짓말을 했다. 나무 소에 타고서 황소에 올라탔다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소리 내기 무섭게 통나무에서 미끄러져 굴렀다. 자매는 소똥에 처박힌 아이를 보고야 말았다. 해거름이었다. 흠씬 얻어맞은 것 같은 아이의 두 뺨처럼 구름이 시뻘겠다. 아이는 수돗가로 뛰어가 씻어 문대며 엉엉 울었다.

그날의 낙조가 아직까지 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약에 빠지게 만드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그 모든 걸 태워 없애고 싶었다. 의식을 치르듯 성냥을 켰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다 켜는 것마저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왔다. 어차피 불에 타는 건 물건이나 사람일 뿐, 마텔의 뼈대를 이루는 것들은 하나도 태울 수 없다는 생각, 그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기도 지겨웠다. 네가 불을 붙여 태워야 할 것은 그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문득 되울렸다. 그는 기둥에서 뺨을 뗐다. 그래, 그거야. 그 생각이야. 내가 남김없이 살라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거야. 그는 앞을 봤다. 차곡차곡 쌓여 올라간 계단이 짤막한 통로를 메우고 연이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계단이었다. 원래 위치라면 내려가는 계단이 나올 방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따져 묻지 않고 나아갔다. 바닥을 밀어 첫 계단을 딛고 떼고 다시 딛고 떼고 꼭대기에 이르도록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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