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20장 소환

by 수연


홀 안은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아니, 떠들썩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귓바퀴를 접어 양 구멍을 막았다. 단지 소리가 컸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한꺼번에 울려오는 매미 소리를 듣고 귓구멍을 막은 적이 없었다. 매미 울음은 마음의 크기를 환기시키는 소리였다. 듣고 있으면 서서히 걷히듯 시야가 밝아지며 모든 감각이 일직선으로 펴지는 느낌이었다. 숲이 밀려와 에워싸듯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파의 울림은 답답했다. 지금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누구나가 열띤 소리를 내지를 경우엔 가히 경악스러운 데시벨을 기록할 거였다. 화재라도 난 것일까. 구석구석 숨어있던 사람들이 죄다 몰려나온 것 같은 대단한 인파였다. 오의 방에서 본 재 가루가 퍼뜩 스쳤다. 그는 손가락을 떼어 귀를 열었다.

모든 걸 잃고 말 거야. 알려져선 안 돼.

띄엄띄엄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 듣고 싶었지만 느닷없이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걷다가 남의 뒤꿈치를 밟을 뻔하고 움찔 놀랐지만 멈춰서진 않았다. 그러나 무심코 돌아가는 고개만은 어쩌지 못했다. 습관적인 몸짓이었다. 홀 너머 골목 쪽을 보려던 것이었는데 방화셔터들이 내려와 막혀 있었다. 발목이 저릿했다. 갑자기 구덩이에 처넣어진 기분이었다. 그는 주머니 속 몽돌을 손에 쥐었다. 이번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카운터에 이르자마자 지배인부터 찾았다.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지배인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지배인의 그늘이 그의 낯을 덮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지배인은 나지막한 어조로 캐물었다.

어제, 어디서 뭘 한 거야? 쉬라고 돌려보냈더니만, 그새 사고를 쳐? 바른대로 대. 너, 불장난했지? 속일 생각은 마. 불구경한 사람들이 수두룩해. 여태 너한테 많은 기회를 줬어. 하지만 이젠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주인장이 보잔다. 그렇게 알고 따라와.

지배인은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이렇게 몰아쳤다. 순간 그녀가 떠올랐다. 그는 물끄러미 자문했다. 불구경, 불장난이라니, 대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한 걸까.

모른 척해도 소용없어.

아는 게 있어야 모른 척을 하지요.

저절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없이 지배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겠다? 그럼 내 입으로 들려주지. 어젯밤 캠핑촌 빈방에 불을 지른 게 너잖아.

그가 계속 듣고만 있자 지배인이 표정을 이완하고 어세를 상당히 누그러뜨리고는 고쳐 말했다.

그 구역 담당이 새벽에 무전을 쳤어. 그리고 이걸 내게 전했지.

지배인은 주먹을 들어 그의 코앞까지 들이민 다음 쫙 폈다. 명찰이었다. 그는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지배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잊었나본데, 명찰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거야. 그 말인즉슨, 웬만한 불에는 타지 않는다는 얘기지. 게다가 그 시각 자리를 이탈한 소년은 너밖에 없었어. 너도 알다시피 네 귀가조치는 내가 취했잖니. 발뺌할 생각 마. 더 이상 기회는 없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오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자식이 내 물건으로 위장하고 일을 저질렀다. 그는 심장이 갈라지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어디로 내뺀 거야. 편지는 읽었을까. 읽고도 그랬다면…….

이때 그의 가슴속에서 뜻하지 않은 전환이 일어났다. 다이아몬드의 시간이 온 걸까. 여주인을 만나봐야겠다는 바람이 저절로 이뤄지려고 한다. 그것을 은밀히 품고 키워온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마치 그 바람 자체에 의지가 깃들여 있었던 듯 홀연히 이뤄지려는 시점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어쩐지 이 모든 일들의 주역이 아닌 단순한 대역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에 대해 곧바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의 이기성에 넌더리가 났다. 원하던 역할을 비로소 맡게 됐는데 왜 이렇게 동떨어진 기분이지? 그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몽돌을 꽉 움키었다. 기억해. 줄곧 원해온 일이야. 기꺼이 흐름을 타고 가야지. 끝까지 가서 뭐가 있는지 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멋대로 판단하지 마.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어.

그는 고개 들어 지배인을 향하였다. 지배인은 카운터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스텐 재질의 깔때기에 누런 여과지를 끼우고 갈린 원두를 퍼 넣고 있었다. 그는 조바심이 나는 걸 참으며 지켜보았다. 전기 주전자의 꼭지가 콕 내려가며 증기가 치솟았다. 조건만 제대로 갖추어지면 저 증기도 응결되어 자그마한 구름이 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배인이 주전자를 기울여 갈색의 거품이 솟구쳐 오르도록 둥글게 물을 붓고 있었다. 고소한 향이 엄습했다. 그는 냄새에 취해 잡념들을 잊었다. 사방을 자기 주위로 빽빽이 모아들인 기분이었다. 아니, 공간 자체가 실제로 축소되어 있었다. 어느 틈에 카운터 둘레로 방화셔터가 내려와 있었고 그는 꽉 막힌 공간에서 지배인과 단둘이 마주 서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확 뜨인 시선을 알아챈 지배인이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돌아서서 카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지켜보면 알게 될 거라는 듯 태연한 몸짓이었다. 지배인이 멈춘 곳은 청소도구함 뒤편의 아무 특징이 없는 벽 앞이었다. 지배인은 고개 돌려 어서 따라오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그는 엉겁결에 발을 떼었다. 그저 흰 벽에 둘러싸여 있을 뿐인 구석진 장소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막상 걸어가니 벽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거리가 줄지 않고 자꾸 벌어졌다. 지배인이 돌연 옆으로 비켜섰다. 밑으로 뻗어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갑작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지배인은 손짓으로 그를 앞세웠다. 그는 먼저 나아가 슬며시 발을 내려놓았다. 에스컬레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마가 부시도록 흰 곳이었다. 지독하게 희었다. 바라보이는 것이라곤 삼면을 에워싼 희고 높은 벽뿐이었다. 부딪는 것은 뭐든 지워버릴 듯, 그 어떤 판단도 거부하고 정신의 결벽을 요청하는 하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압박이었다. 역시 만만치 않구나. 그는 벌써부터 여주인에게 현기증을 느꼈다. 내려갈수록 질려갔다. 그만 이 하강을 멈춰버리고 싶은데 오른쪽 아래서 바닥이 나타났다. 지배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뛸 준비해.

그는 처음에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런데 지배인이 되풀이해 말했다. 바닥은 올라올수록 바닥이 아니었다. 어느 매장의 평평한 돌 지붕이었다. 진정으로 한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는 준비 자세를 이미 취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하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무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르는 편이 낫게 여겨졌다. 그래서 뛰어야 할 때가 오자 두말없이 에스컬레이터 손잡이 위로 껑충 올라타 뛰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웃음이 끓어올랐다. 이번엔 해냈다. 울타리를 박차고 뛰어넘어왔다. 그는 황소에게 겁먹은 아이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꿈에라도 나타나 이 순간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고 이게 너야, 속삭이고 싶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이는 다르게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양말 한 켤레를 사들고 제때 나올 수 있는 소년으로.

눈앞이 번득했다. 쿵하고 내리찍은 구둣발소리가 등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넌지시 지나쳐 한 발짝 앞에서 멈춘 지배인은 우두커니 주시하고 있었다. 맞은편 벽 쪽이었다. 그는 몽돌을 쥐려다 말았다. 맨눈으로도 뚜렷이 보였다. 벽의 일부가 차츰 돌출되어 나오는 것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정면은 공중전화부스만 한 크기였는데 측면은 그보다 훨씬 길어 다가올수록 마치 공중空中 열차 같아졌다. 지배인은 좀 전과 마찬가지로 뭐가 어떻게 돼 가는지, 일언반구가 없었다. 닥쳐봐야 알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던 데 대한 일종의 보복조치인 건지. 그는 오기로 지켜봤다. 설마하니 들이받기야 하겠어. 물론 지붕을 타넘어 오진 않았지만 벽이 지붕과 빈틈없이 밀착하여 멎은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못 미친 공중에서 멎었다. 발 하나 길이만 한 간격을 띄운 채였다. 벽의 꽁무니는 뽑혀 나오다 만 가래떡마냥 저편에 계속 맞물려 있었다. 공중열차 맞네. 확신한 순간이었다. 맞닥뜨린 벽면이 옆으로 밀리더니 제 속을 드러냈다.

강제 소환치고는 퍽 재미난 방식이었다. 초대받아 가는 길인 양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재미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그는 주의력을 끌어 모아 내부를 관찰했다. 빠져나온 길이가 무색하게 뚫린 공간은 좁고 여유라고는 없어보였다. 왼쪽 벽면을 마주하고 나란히 설치된 두 좌석만으로도 거의 차는 크기였다. 평범한 좌석이 아니었다. 좌석은 매달려 있었다. 가느다란 세 개의 기둥에 같은 수의 조정 끈으로 연결되어 떠 있었다. 지배인은 무던히도 말없이 성큼 건너갔다. 안쪽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좌석 꽁무니를 마주보고 서서는 자세를 잡는데 그 앉는 방식이 또한 볼 만했다. 팔을 벌려 좌우 기둥을 붙잡더니 좌석 위로 한 다리씩 들어 올리고 손가마에 올라타듯 번갈아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도 숙인 채 계속해서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마침내 고개 든 지배인이 그네를 움직이듯 발을 구르고 상체를 이리저리 구부렸다. 좌석은 미동도 안 하였다. 그때까지 멈춰 서 있던 그는 의자 대신 저 요상한 기구를 딸려 보낸 여주인의 저의가 빤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걸음마도 못 뗀 젖먹이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배인의 눈총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걸어 나갔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크레바스, 그곳에다 발을 놓고픈 충동이 잠깐 뱃속을 휘저었다. 뒤이어 열차 쪽에서 먼저 출발하여 발밑이 푹 꺼져버리는 상상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는 훌쩍 발을 떼어 열차 바닥으로 옮겨갔다. 과연 위에서 내려다본 좌석은 아기들의 보행기마냥 가랑이진 구조였다. 하지만 직접 양다리를 끼워 앉으니 기능적으로 그것은 죄고 조이는 데 더 특화된 성싶었다. 빠져나갈 수 없이 복부와 사타구니를 옥죄는 붉은 천이며 거기 달린 허리둘레와 허벅지에까지 채우게끔 돼있는 벨트들이 그랬다. 그런데 막상 이것들을 지탱하며 바닥으로 뿌리내린 기둥들은 잡아보니 쇠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공기를 가득 넣은 듯 폭신했다. 기둥 둘레를 완충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는 이렇듯 전혀 예기치 못한 소재의 조합들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불안해졌다. 머리를 사방으로 최대한 기울여 보았다. 끈은 질기고 팽팽한 데다 좌석과 기둥 사이에 충분한 간격을 띄우고 있어 적어도 완충 장치 덕은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주섬주섬 벨트를 끼워 맞추고 앉은 채 뛰어올라보았다. 요지부동이었다.

이때 벽이 닫혔다. 안은 그대로 밝았다. 숨도 여전히 쉬어졌다. 공간이 저절로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각도가 비스듬히 꺾였다. 그는 재빨리 좌우 기둥을 거머쥐었다. 붙잡을 것이 있어 일단 다행이었는데 별안간 몸이 붕 떴다. 공기가 골수를 긁으며 일제히 역주행하는 듯한 감각. 그는 롤러코스터의 질주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행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다리를 앉은걸음으로 쉴 새 없이 제자리에 옮겨놓는 그의 모습은 마치 줄을 치는 한 마리 거미 같았다. 울렁거렸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감각들에 부추겨진 치명적인 상상이 심장을 두들기고 속을 뒤흔들며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을 엎지르려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가하게 잔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지배인의 정신 상태가 그는 놀라웠다.

너는 몰랐겠지만, 하고 지배인은 운을 뗐다.

어제 하루만 해도 너에 대한 민원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알아? 쿠키를 쏟는 걸 봤다는 사람, 외지인과 엮인 것을 봤다는 사람, 외지인을 발견했으면 즉각 보고를 해야지! 너는 마텔에서 가장 중요한 규율을 어겼어. 그것만 해도 상당한데, 방화까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나는 너한테 제대로 살 기회를 줬어. 네 장점을 인정해 벌 대신 치료를 받게 하고 마땅한 일자리까지 줘가며 보호해왔다고. 그 의미를 알기나 하니?

지배인은 몸이 뒤집혀 머리칼이 거꾸로 치솟는 와중에도 시시콜콜 비난하고 투덜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시네요.

뭐?

지배인이 잔뜩 피 몰린 얼굴로 쳐다봤다.

당신이 안드로이드일지도 모른단 의심이 막 들던 참이거든요.

그가 마침내 내뱉었다. 지배인이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당신이 생각하는 삶이랑 제가 생각하는 삶이랑은 좀 다른 것 같군요. 때문에 실망시켜드린 점에 대해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처 말해버렸다. 끄응, 소리를 내며 몰아쉬는 지배인의 한숨이 그의 콧구멍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갑자기 우스웠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쿡 터졌다. 양발로 바닥을 떠받친 상태에서도 웃음은 터무니없이 잘만 비집고 나왔다. 완강히 버티는가 싶던 지배인의 입가도 금세 허물어져 실룩실룩했다. 그것이 그들을 더 우습게 만들었다. 공간이 도로 돌아 강제로 웃음을 그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내부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끊어질 때까지 계속됐을지 몰랐다. 그들은 황급히 각자의 현실을 되찾았다. 다시 바로잡힌 자세가 영 어색해 그는 몇 번이고 눈을 깜짝였다. 지배인도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공간은 이제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갈 바를 모르겠다는 듯. 목적지로 가기가 주저된다는 듯. 무당벌레의 길이란 게 있다. 창문이 잠겨 있고 방충망도 닫혀 있는데 어느새 무당벌레가 안으로 들어와 유리표면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공간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감쪽같이 찾아들어와 있었다.

벽이 열렸을 때 그는 환하고 텅 빈 복도를 마주하였다. 지배인을 따라 벨트를 풀 때까지도 멍해있던 그는 기둥을 잡고 일어선 순간 돌연 한 번에 두 다리를 올려 펄쩍 뛰었다. 좌석 밖으로 착지한 그는 몸을 바로 세울 틈도 없이 와락 등 떠밀렸다. 고꾸라질 듯 열린 벽 밖으로 튕겨져 나간 그는 도로 잽싸게 벨트를 채우는 지배인의 손놀림이 멎기도 전 벽이 닫히며 급속도로 차단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배인을 실은 벽이 안으로 쑥 당겨지기 무섭게 어디서 어떻게 밀려나왔는지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기존의 벽이 빈틈없이 끼워 맞춰져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 원래 자리로 돌아온 그 낯선 벽을 쳐다보았다. 벽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시치미를 떼고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뒤통수를 싸쥐었다.

환영합니다.

지배인의 무전기에서 엿들었던 음성이었다. 그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강철로 빚은 안내자, 로봇비서의 파란빛이 그에게로 내쏘였다. 그는 그 잡아끄는 것 같은 빛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오른 벽에 닫힌 문이 하나 있었다. 로봇비서는 우측 상단의 감지기를 건드려 문을 열더니 철골 마디마디를 구부려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등 뒤에서 철컥, 문이 닫혔다. 눈앞이 써늘했다. 벽과 카펫, 사무용 가구와 탁자, 책장에 꽂힌 책들, 의자들 할 것 없이 전부 무채색으로 통일되어 마치 흑백 사진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일었다. 너르고 적막한 곳이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존재가 사방에 자신뿐인 듯 여겨졌다. 그는 창문을 찾았다. 맞은편 벽 오른쪽 가장자리에 창문이 셋 있었다. 꼭대기가 아치형에 제법 길쭉하고 폭이 넓었으나 자세히 보니, 밖을 비추고 있지 않았다. 격자무늬 창살 사이 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어야 할 부분이 온통 꺼진 듯 깜깜했다. 깜깜한 채로도 눈이 부시어 오래 쳐다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순도 백 퍼센트의 카보나도를 깎아 만든 판을 끼웠나. 이런 식의 의도적으로 밖을 차단한 창은 방패처럼 보였다. 육중한 책상이 그 방패 창을 등지고 놓여 있었다. 책상 뒤의 등받이가 높은 의자는 창 쪽을 향한 채였다. 갑작스럽게 의자가 돌아가고, 그는 번쩍 튀기는 시선과 마주쳤다.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시선의 주인이 팔을 뻗어 책상 측면과 우측 벽면 사이에 놓인 벤치의자를 가리키곤 그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는 몽돌을 움켰다 놨다. 소리 나지 않게 옮겨가 멈추어 서서는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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