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22장 흑주

by 수연


흑주는 어딘가를 꿈꾸는 생명을 먹이로 삼는 좀 특이한 장소죠. 마텔이 사람의 마음을 읽도록 설계된 것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흑주를 위해서지. 그래야 먹잇감을 공급해주기 쉽잖아요. 흑주는 그들을 소화시키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발산해요. 그리고 배설물로 카보나도를 내놓죠. 투명한 다이아몬드는 일종의 사리 같은 거죠. 우리 집안 선조께서 흑주로부터 영구히 에너지를 공급받을 완벽한 장치를 고안해내셨죠. 이 건물 말이에요.

소녀는 별안간 그를 보더니 우스워 죽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요. 맞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거. 마텔은 미끼예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탈주를 꿈꾸지 않겠어요? 탈주를 꿈꾸는 사람은 당신 생각보다 많아요. 다만 알려진 사람이 적을 뿐이지. 하지만 마텔은 그들에게 절대 길을 내주지 않아요. 알다시피, 유인하죠.

그럼 제게는 왜 그 길이 허락된 거죠?

그가 토해내듯 묻자 소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처음으로 놀라워하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흥미롭네요.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 근거가 불확실한 믿음 때문이겠죠. 어쨌든 설계가 그렇게 돼있어요. 그런 식으로 마텔이 설계되었다고요. 당신이 나를 만나러오도록 길을 터주게끔.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이 닥쳐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때맞춰 깨어난 거예요. 할 일을 마치러. 마텔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도록 하는 게 관리자로서의 내 책무니까요.

소녀는 느닷없이 웃기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 아니겠어요? 마텔은 그런 사람들 덕분에 굴러가는데? 스스로 자유를 찾겠다는 그런 사람들. 하지만 자유라니.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기만적인 생각이에요? 아직도 자유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죠. 생각해봐요. 아주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인데. 가령, 누구도 제 몸을 거역할 순 없잖아요? 제아무리 수도승일지라도 몸이 원하면 화장실에 가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잠들어야 하잖아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자유낙하라면 모를까. 그래요, 차라리 자유낙하하는 존재라는 게 마땅한 말이겠어요. 마텔이 바로 그 증겁니다. 마텔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그 증거예요.

소녀는 목이 벌게지도록 열을 올리며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해온 걸까. 그는 소녀의 광기가 납득되어졌다. 그럼에도 혼란스러웠다. 소녀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만약 믿는다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좀처럼 판단이 안 섰다. 몰랐던 흑주의 존재가 마텔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 것만은 분명했다. 소녀의 말대로 흑주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면 흑주가 있는 한 마텔은 계속된다. 마텔을 나가도 흑주가 도사린다. 그런데 흑주가 어디에 있지? 흑주를 빠져나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걸까. 그녀와 이신추 일행이 왔다는 건 그들이 그 식충신 같은 흑주를 통과했다는 얘긴데.

'열망을 가진 생명이 못 다 이를 곳은 없다.'

이신추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의 언니가 스스로 연료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는 암담해졌다.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배출하는 그런 마음이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의 언니는 혼신을 다 바쳐 미지의 한계인 흑주를 켰다.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도망가고 싶어졌다. 이게 바로 내 습성이지. 그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생각했다.

그들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또 어떤 역할을 맡기죠? 어딘가에 적응해 살려면 역할이 필요하니까요.

소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임무에 실패한 외지인들 말이에요.

우리는 다 외지인이었어요.

그가 불쑥 말했다. 소녀는 선선히 동의했다.

하지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과 흑주를 통과해 온 것은 차원이 다른 경우죠. 어떤 의미에선 흑주로 던져진 사람들만이 진정한 외지인이에요.

소녀는 추모라도 하듯 자못 숙연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알 듯 모를 듯, 그러나 자꾸만 궁금해지는 얘기였다.

자, 내가 해줄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선택은 당신 몫이에요. 마텔에 남든, 흑주로 가든, 이곳은 변함없이 돌아갈 거예요.

소녀는 지친 기색으로 말을 맺더니 기이하게 틀어진 초승달 몸을 한 번 뒤챘다. 의자가 회전했다. 의자의 등받이는 본래대로 꽉 막힌 창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소녀는 도로 그림자에 삼켜졌다. 그는 여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떠들어댄 기분이 들었다. 허탈한 마음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꾸물대며 넌지시 물었다.

여긴 유리가 없네요?

등 뒤에서 웃는 표정이 고스란히 비치니까.

소녀의 즉답이었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다니……. 의심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모든 끝없음은 쇠약을 부르고 병을 부른다. 소녀의 체형이 원래부터 저랬을까. 의심하는 버릇이 시간을 두고 축적된 결과 뼈대까지 뒤틀어버린 건 아닐까. 형태는 마음이다. 소녀의 마음은 초승달로 비친다. 덜컥, 문 열리는 기척이 났다. 비서로봇이 전동바퀴를 굴리며 다가와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는 기계의 몫인가 보았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었다. 해결을 바라다니. 너무도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드로이드를 따라 방을 나섰다.

무당벌레의 길을 가는 동안, 다시 흑주에 생각이 미쳤다. 흑주가 뭘까? 오, 그 친구는 방을 태워버리고 흑주까지 폭주한 걸까? 흑주가 막대한 에너지 공급원이라느니, 그 에너지가 탈주자를 소화시켜 생긴다느니 하는 피부에 닿지 않는 말보다도 우선은 알고 싶었다. 흑주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 누구한테 들어서 외는 건 아는 게 아니다. 아직은, 소녀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똑같은 사실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이 적용되고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고, 어떤 사람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떤 사람은 거기서 영감을 받고 변화를 일으킬 힘을 얻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가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니야, 인간이 자유낙하하는 존재이기만 하다면 그것을 자각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안드로이드처럼.

그는 벽이 열리자 작심하고 공중열차에서 지붕으로 건너뛰었다. 건너와 보니 에스컬레이터 손잡이가 너무 위에 있었다. 발돋움을 하고 팔을 쭉 뻗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무릎을 굽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손끝이 간신히 손잡이 표면에 닿았지만 바로 낙하하고 말았다. 그는 기우뚱하며 방금 전 생각을 철회해야 하나 잠시 갈등했다. 이때 손잡이의 높이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아니, 지붕이 올라가고 있었다. 지붕의 상승은 손잡이와 예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멎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정지한 상태였다. 그는 재빨리 손잡이를 밟고 건넜다. 계단과 다름없어진 자동계단을 쉬지 않고 걸어 올라갔다.

층고가 까마득한 새하얀 전망으로 불쑥 검은 형체가 솟았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지배인이었다. 격앙된 표정이었다. 목이 뻣뻣해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는 눈빛이었다. 지배인은 한 손에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가 끝까지 올라서자마자 쟁반을 넘기며 룸서비스니 서두르라고 그의 등을 또 떠다밀다시피 했다. 언제부터 한쿡소년이 룸서비스까지 담당했지요? 물으려는데 지배인이 느닷없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설계도가 궁금하지 않아?

그는 너무 놀라 한순간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고분고분 쟁반을 받쳐 들었다. 쟁반 가장자리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는 떼어서 읽었다.

이 층이 맞나요?

그는 부득불 물어 지배인에게 확인받아야 했다.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층이었다. 굉장히 높은 층이었다. 그런 높은 층에 사람이 살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몇 호인지는 모른다고 적혀 있는 점이었다. 정확한 정보 대신 수수께끼처럼 단서를 제공하고 있었다. ‘비록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보게 되면 직관적으로 그 방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문패와는 달리 변칙적이다.’

이게 다 뭐죠? 왜 똑바로 말해주지 않나요? 무슨 양자역학적 방이라도 되나요? 그는 이렇게 물으려다 말았다. 양자역학적인 방.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의 원리대로 관측행위가 이전까지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채 행방이 묘연했던 방을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나게 할는지 모른다. 시선은 무섭다. 본다는 것, 그 행위. 단지 보는 행위 하나만으로 상대를 비좁은 문설주 안으로 몰아넣어 가둬버리는 건 아닐까. 누구도 누구의 전체를 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부분조차 자기도 모르게 덮씌운 스크린에 나타나는 대로가 아니라고 그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소녀도 그것을 알아 작정하고 초승달 자세를 취한 것 아닐까. 위태롭고 자학적이기까지 한 각도로 뒤틀려 연막처럼 다른 면은 보이지도 않게 하던 그 몸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기를 포기한 듯, 아니 거부하는 듯 보였었다. 하지만 그 또한 덮어놓고 본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찌됐든 그러한 첫인상도 대번에 덮씌워져 의식에서 멀어졌다. 대화에 몰두하고부턴 뒤틀린 이야기 속 풍경이 눈앞의 뒤틀림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화마저 지나간 지금 소녀의 무엇이 자신에게 남아있는가. 그는 소녀를 면전에서 줄곧 놓쳐버리기만 하다 돌아왔음을 알았다.

일단 보려고 해야 나타나는 거야. 이름을 부르면, 저절로 돌아보게 되듯. 이걸까 저걸까 궁리하기보다 먼저 그쪽으로 향해야 해. 이쪽으로 얼굴을 돌려오도록 말이야.

지배인이 다시 한 번 뜬금없이 말해왔다. 묘한 비유였다. 자신의 생각을 읽고 말한 것같이 들리는.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설계도에 대해 토씨 하나 입 밖에 낸 적이 없는데. 그 문제로 생각이 후퇴하자 내부에서 돌아가던 프로젝터가 갑자기 꺼진 듯 머릿속이 하얘왔다. 들켜버린 이상, 아니라고 잡아떼도 소용없을 거였다. 이 시점에서 질문은 무의미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었다. 상대의 뜻대로가 아니면 돌아나가기조차 불가능한 외통수.

그는 미끼를 물었다. 문 뒤에 뭐가 도사리고 있든 기꺼이 물어 자진해서 속아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이번엔 적어도 알아내게는 될 것이었다. 그는 춤추는 심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지켜보는 두 눈이 있었다. 좀 의외의 눈빛이었다. 오랫동안 본 적이 없는……. 그 눈이 이렇게 말해왔다. 약은 눈으로 보면 뭐든 약게 보이는 법이지. 지나치게 머리 굴리지 마. 그는 놀라서 눈을 끔뻑, 다시 떴다. 방금 본 그 눈에 적의는 없었다. 지배인은 어떤 사람이지? 그는 새삼스레 자문했다. 여태 쪽문 하나를 열어놓고 그 안에 끼인 지배인을 감상하듯 마주보아왔던 건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얼음조각 하나가 덜그럭, 잔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뜻밖에도 시야가 밝아지고 확장되며 의욕이 생겼다. 매미소리가 귀에 쟁쟁하여오듯. 그는 걸어갔다. 지배인을 뒤로하고 승강기 쪽으로 발부리를 틀었다. 승강기 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天’층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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