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측면은 몹시 그림자가 져 있었다. 처음 얼마간 그는 앞에 놓인 형체를 식별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 형체는 마치 그림자에 빠진 듯, 아니 그림자를 외투처럼 껴입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림자는 조각조각 그림을 내보였다. 맨 처음 하늘색, 리넨 소재의 원피스가 들썩였다. 치맛자락 밑에서 왼쪽 무릎과 대롱거리는 정강이가 나타났다. 갸웃한 뺨과 복숭아씨 같은 턱도 반쯤 드러났다. 새까만 가죽의자는 앉은 이의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높고 큰 것이 분명했다. 오른쪽으로 휘어 보이는 앙상한 발목이 계속해서 공중에 떠 있었다.
앉으세요. 어떻게, 오는 길은 즐거우셨나요? 특별히 스릴까지 제공했는데.
나사를 죄듯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입을 벌리는 순간 혀로 굴리는 옅은 노랑의 사탕이 스쳤다. 그는 물끄러미 몸을 끌어내렸다. 바닥에 짝, 부딪는 신발 밑창 소리와 함께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려온 형체가 그 앞에 솟았다.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번쩍이는 콧등과 눈 하나, 그리고 반쪼가리 입만 비긋이 웃고 있었다. C꼴에 가까운 자세였다. 왼 골반이 암벽 모서리처럼 튀어나오고 실내화 코끝은 양쪽 다 세 시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얼굴의 반 이상을 덮고 목까지 사선을 그으며 쏟아진 머리타래가 발등을 겨냥한 화살들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치 머리와 발을 이어붙일 셈으로 주인이 힘껏 잡아당기다 만 인형 같았다. 초승달 소녀라고 불러도 좋겠어. 그는 바닥에 붙박여 조금도 당겨지지 않는 벤치의자에 연거푸 힘을 실어 보내며 생각했다. 사탕 깨무는 소리가 울렸다. 소녀가 비스듬히 도로 들앉아 가루가 나도록 사탕을 깨물어 삼키는 소리는 쓰게 울렸다.
당신과의 면담을 위해 일정에 없던 기상을 해야 했어요.
그는 흠칫 놀라 소녀에게로 눈을 맞췄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여주인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여주인이 어린 소녀였다니. 더욱이 이토록 뒤틀려 있을 줄은. 그가 잠자코 눈을 내리깔자 소녀가 언짢은 투로 덧붙였다.
원래 햇빛이 좋은 날에만 깨는데요.
그는 그대로 눈을 내리뜨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댁은 오랫동안 잠만 잔 것 같군요. 거의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네요.
곧바로 소녀가 응수했다.
그러는 당신은 어린 시절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데요?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내면의 아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해요. 나는 어렸을 적 엄마랑 시장 다니는 게 좋았어요. 거긴 없는 것 없이 다 있었거든요. 내가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은 죄다 거기에 있었어요. 나는 미친 듯이 시장을 누볐죠. 엄마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허리춤을 탯줄처럼 노끈으로 묶어놓아야 했어요.
아, 그래서 좌석이 그 모양이었던 건가요? 보행기에 앉던 시절을 기억하라고? 그러나 얼른 생각을 누르고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시장에서 살 수 없는 것들도 있어요.
소녀가 다시 받아쳤다.
지금, 시장에서 살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하셨나요? 우리가 왜 불행해졌는데요? 그건 다 시장에서 살 수 없는 것들에 현혹된 탓이에요. 나는 그 형체 없고 무게 없는, 아무 맛도 냄새도 풍기지 않는 것들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싶었어요. 나는 내가 겪은 최고의 기쁨을, 그 오염되지 않은 충만한 세계를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물론 사람들이 그러길 원치 않았다면 나 역시 붙잡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사회는 더 이상 이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 없이도 사회는 잘 돌아가요. 그런데 나는 이 사람들이 필요해요.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전부요. 북적거릴수록 시장은 시장다워지니까요. 누군가 필요로 한다는 게 삶에서 얼마나 큰 동기가 되는 줄 아세요?
하지만 당신은 사람들을 여기 가둬뒀잖아요. 사람들에게는 이제 생존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생존은 동물도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사람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생존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죠. 사람은 의미를 필요로 해요.
나는 이 사람들을 장악한 게 아니에요!
소녀가 별안간 목청을 높였다.
나는 이 사람들을 구조한 거예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마텔은 거대한 방공호예요. 사회에서 방치된 사람들, 관심받지 못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을 데려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원으로 만든 거예요. 마텔은 기존의 사회와는 달리 아무도 내쫓지 않는 운명 공동체예요. 모두가 동등하게 대우받고 동등하게 자기 것을 누린다면 누구도 서로를 물어뜯지 않아요. 괜히 남과 비교해서 불행에 빠지는 일도 없죠. 마텔은 그런 목적으로 설계되었어요. 평화가 실현된 궁극의 세계라고요.
더 이상 이룰 것도 추구해야 할 것도 없는 그런 평화라면 나는 원치 않아요. 차라리 불행을 택할랍니다.
전쟁이 닥쳐와도?
소녀가 쇳소리를 냈다. 그는 바로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한입쿠키를 먹고 나른 사람입니다. 한입쿠키는 당장에 손에 집어 들고 맛볼 수 있는 기분을 선사하지만 그것은 쉽게 얻은 만큼 빠르게 휘발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전쟁을 겪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행복을 원해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행복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오래 지속되는 것이에요. 나는 아주 힘들여 행복을 얻을 거예요. 내게는 결코 가까이 있는 게 행복이 아닙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내뱉어진 행복이란 단어가 숨 막히는 현실을 지우고 잠시 하얗게 멈춰있도록 했다. 지난시절 돌아다니던 길들이 어른거렸다. 길은 좁은 것도 넓은 것도 꺾어진 것도 쭉 뻗은 것도 막다른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나아간다는 느낌, 그것이 중요했고, 계속 걸어가게 했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도착 지점이 필요한 듯 여겨지기도 했다. 매번 걷는 길도 날씨나 기분, 상황에 따라 그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때로는 어수선했고, 때로는 벅차올랐다. 그는 쓰라린 고뇌 속에서 올려다본 길가의 느티나무를 떠올렸다. 가장자리가 붉은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던 가을 햇살은 상처를 태우는 듯한 고통을 줬었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 이 나무를 올려다보았을 때는 신선한 환희를 맛보았다. 그는 그 가벼운 기쁨이 지난날의 고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에 그슬린 듯한 그 나무를 못 보았다면 이 나무가 그리도 찬란하게 빛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소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소녀와 손잡고 자신이 걸었던 길을 또다시 걸어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 길에 그 나무가 아직 있다면 말해주리. 길 가다 마음의 증표 삼을 한 그루 나무를 발견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냐고. 어쩌면 먹먹한 감정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 먹먹함이 소녀에게 얘기해주리. 이제는 햇살이 많은 곳으로 그는 걷고 싶었다. 아득하게 펼쳐진 햇살이 가득한 골목. 걸어감이 설렘이 되고 설렘이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는 그 길을 소녀와 같이 걸어간다면. 나는 비로소 소년이 되겠지. 그는 문득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햇살 좋은 날에 우리, 두 마리 거북처럼 나와 일광욕하는 건 어때요?
그는 함박웃음 지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에서 큐브를 내려놓아요.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난 계속 맞춰가고 싶어요. 아직 다 맞추지 못했단 말이에요. 이대로 멈출 수는 없어요. 내 아버지가 구조 지어놓은 것을 내가 완성시켜야 한단 말이에요.
소녀는 어쩐지 징징거리는 투로 말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걸 원해요? 완성된 큐브를 다시 허물고 싶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당신은 당신의 기분조차 통제하지 못하잖아요. 사람들의 삶은 조종되는 것이 아니에요. 언제나 나 같은 사람이 당신을 만나러 오게 돼 있어요.
그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미소를 띠고서 읊조렸다.
목적지로 보이는 아득한 지점이 나를 불러요.
그건 환상이에요.
소녀가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여기가 그 지점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환상이죠. 하지만 그게 삶의 비밀이에요. 삶에는 환상이 필요하답니다. 환상은 삶의 일부예요. 잠이 꿈을 동반하듯이.
난 꿈을 안 꿔요.
소녀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렇죠, 당신은 기계 수면을 하죠. 몇 세기만에 깨어났을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이 수면기 없이 잠드는 날 제 말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잠부터 제대로 자야 해요. 잠이 올 때 잠을 자세요. 잠을 자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면 잠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자연스런 깨어남도 있을 수 없겠죠.
수면기를 얕잡아보지 말아요.
소녀가 가시 돋친 투로 말했다.
저건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에요.
소녀가 머리를 돌려 정면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시선을 좇아 돌아보았다. 바로 자신이 통과해온 문이 있는 벽면에 또 하나의 문인 양, 보통 문짝보단 폭이 좁고 낮은 검은색 물건이 붙박여 있었다. 세로가 긴 팔각형의 판 중앙에는 바큇살이 두드러진 방향키같이 생긴 것이 돌출되어 있었는데, 손잡이인 모양이었다. 손잡이를 제외한 표면 여기저기에 물결무늬 비슷한 굴곡이 잘게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 그는 호기심과 싸우며 힘겹게 물건을 가리켰다.
저 따위 관 같은 물건을 제일 아낀다고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봐요. 똑바로 세워진 비좁은 관 같잖아요. 어떻게 저런 협소한 공간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수 있죠?
그의 억양이 신경질적으로 변하였다.
그냥 수면기가 아니에요. 외계에서 온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다고요. 카보나도. 검은 다이아몬드. 저건 카보나도 수면기예요. 무엇도 저 안을 부술 순 없어요.
소녀가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다 표변하여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오직 나에게 최적화된 나만의 수면기예요. 누구도 내 수면기에서 잠이 들 수 없어요. 오로지 나만이 거기서 잠들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요. 그렇게 만들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요? 꼬박 한 세기를 투자했어요. 한 세기라고 해서 놀랄 것 없어요. 당신과 나의 속도는 다르니까. 당신이 꿈꿀 동안이 내 한 세기쯤 돼요. 나는 한 세기를 꼬박 새웠지요. 내 꼴을 좀 봐요. 난 제대로 늙어갈 겨를도 없었다고요. 몸이 이렇게 휘도록 오랜 시간 저것 하나만 생각하고 살았다고요. 후회는 없어요. 나는 자발적으로 나를 기형으로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저 문을 여는 순간, 난 되돌아가요. 내 몸이 똑바로 펴져있던 시간으로. 그 시간에 나를 고정하고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다고요.
그는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여주인을 아프게 하고 싶었다. 똑바로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은 기형이 아니라 잠시 가려진 것뿐이야. 하지만 왠지 쑥스러워 입이 열리지가 앉아, 타임머신이라도 되나보죠?, 싱겁게 내뱉고 말았다.
타임머신과는 달라요.
소녀가 단박에 말꼬리를 낚아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건 오로지 나에게만 연동하는 장치예요. 내가 손끝으로 건드리는 순간 나의 내면과 융합하게 돼 있어요. 내 마음이 이끄는 세상으로 가는 거죠. 저 안이 좁아 보이죠? 하지만 내가 눈 감고 마음이 눈 뜨는 순간 실내는 광활해집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요. 꿈이라고요? 지금, 잠잘 때 꾸는 꿈이라고 하셨나요? 아니요. 꿈과도 달라요. 꿈은 깨고 나면 옅어지는 얼룩이지만, 저 세계는 문신처럼 나에게 새겨집니다. 오히려 저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덧없는 꿈이 시작되지요. 기형아의 꿈이. 지금 당신과 대화하는 기형아는 꿈속에 있어요.
소녀는 말을 맺으며 씩 웃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소녀의 두 눈만 쳐다봤다. 진정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너무 오랜 시간 외톨박이 아이로 지내느라 그만 미쳐버린 걸까. 그가 자기도 모르는 새 걱정스런 눈빛을 한 모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달아났다. 소녀는 표독스럽게 입꼬리를 내리고 즉시 해명했다.
내가 이걸 고안해낸 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어요. 이것 덕분에 시끄러운 시절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어요. 곧 나를 깨운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수면기 안에 있는 편이 당신네들한테 더 나았을 거예요. 내가 깨어났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에요. 내가 깨어날 때마다 전쟁이 일어났어요. 내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게, 꿈 없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게 당신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당신은 우리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이다지도 희생합니까?
소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침울해진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소곤소곤했다. 왜냐하면…….
소녀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내뱉었다.
왜냐하면, 나는 구덩이거든요. 커다란. 어느 날 폭격으로 파여 시체들로 메워진 구덩이요. 이렇게 살지 않으면 당신네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 거예요. 내가 전쟁입니다. 나를 깨우지 마세요. 나는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껏 살아있을 수도 없어요. 곤히 잠드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다. 홀에서 방화셔터가 내려진 걸 보고 연상한 것과 지금 막 소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이 묘하게 일치했다. 구덩이. 강하게 솟구친 감정이 별개의 두 구덩이 사이를 자꾸만 오갔다. 그는 간신히 포문을 열었다.
이제 힘으로 쓰러뜨리는 시대는 지났어요. 너무 오래 잠들어 계셨군요.
지금이 대화하고 토론하는 시대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그러니까 댁을 불렀죠.
소녀는 약이 오른 듯 서둘러 대꾸했다.
하지만 토론만으론 안 됩니다.
그는 싱긋이 웃고는 말했다. 인간이 왜들 그렇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지 알아요? 따지고 보면, 인간이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들이란 게 죄다 편 가르기에서 나온 거거든요. 상대를 보자마자 자기와 다른 점부터 찾죠.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 인간들끼리는 닮은 점이 더 많습니다. 이 점에 주목해야 돼요. 다음이 있으려면. 다 같이 살던가, 다 같이 죽던가. 더 이상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국소전 양상에서 그치지 않을 겁니다. 어떤 게 다음이 될까요? 아니, 다음이 있기를 기대하시나요?
그는 끈기 있게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떠올랐다. 그는 태연히 어조를 바꿔 말했다.
우리 한번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볼래요?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네요. 우리 부모님 세대들 이야기예요. 그들은 아코디언 소리를 듣고 자랐대요. 전쟁이 멎고, 한동안 실향민들을 달래기 위해 유랑 악단들이 동네를 찾는 일이 잦았었다고 해요. 유랑 악단 중에는 꼭 아코디언 주자가 한 사람 끼어 있었는데, 그 연주가 어찌나 심금을 울리는지 실향민들은 그 소리를 제 심장이 내는 소리로 착각해 멈추려고 가슴팍을 쥐어뜯기까지 했다나 봐요. 아코디언이라는 게 본래 쥐어짜듯 양손으로 압박해야 비로소 소리를 자아내잖아요. 악기의 그런 특성 때문이겠죠. 내게도 아코디언은 심장을 닮은 악기예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들을 주워섬겼다. 말을 한다기보다 속에서 저절로 울려나오듯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소리들을 그저 내지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소녀는 짐짓 연민을 담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방화를 저지르지 않은 건 알아요. 당신 또래 외지인이 그랬죠. 그 사람은 헛된 시도를 했어요. 마텔에 출구는 없어요. 나가는 시늉만 있을 뿐이죠. 모르겠어요?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밖을 포기한 거예요. 주민들이 밖을 원할 것 같아요? 당신보다 이곳에 오래 머문 이들이에요. 다른 곳이 있다는 사실에 환호하기보다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라고요. 외지인들은 못 나가요. 그건 최악의 공포거든요. 방금 전쟁을 말하셨죠? 바로 그래요.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외부로부터의 침략입니다. 외지인들이 전쟁을 몰고 올 거라 믿는 사람들인데 순순히 마텔을 뜨도록 내버려두겠어요? 한 덩어리가 되어 감시할 겁니다. 안 그래도 당신들은 이미 철저한 보호관찰 대상인데요. 단념하세요. 공포를 조장할 생각이 아니라면. 발 들인 이상 나갈 길은 없어요. 나가는 건 곧 전쟁을 의미해요. 주민들은 공황에 빠질 거예요. 그들의 안식이 하루아침에 공포로 바뀔 겁니다. 평생 그들의 감시와 원망 속에서 살래요? 겁내야 할 건 내가 아녜요. 서슬 퍼렇게 눈 뜨고 있는 주민들이지.
소녀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이렇게 웃던 소녀의 눈빛이 한순간 낫같이 번득였다.
외지인들이 당신에게 왜 접근했는지 알아요? 당신한테 뭔가 있는 듯 보여서? 당신이 가여워서 도와주려고?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죠. 착각하지 말아요.
소녀는 안됐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더니 나직하게 덧붙였다.
당신은 속고 있어요.
소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마주보는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소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죄의 근본은 연관 짓기에 있다. 아무 관계없는 두 사건을 감정 때문에 무리하게 연결시켜 생각하는 데서 죄가 발생한다. 두 사건은 본래 나란한 볏짚처럼 평화로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공연히 얽어 짜 거대한 망태기를 만들어 놓는 것이 지금 네가 하려는 짓이다. 도대체 왜 망태기 따위를 만들어 애꿎은 사람들까지 연루시키려 드느냐. 왜 두 볏짚을 가만 놔두지 않느냐. 그 망태기를 최종적으로 덮어쓸 사람은 너다. 그 망태기 속에 갇혀 숨통이 끊어질 사람은 바로 너란 말이다. 그런데도 부질없이 손을 놀릴 참이냐. 대체 그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지나치게 번거로운 짓 아닌가. 소녀는 대강 이런 취지의 말들을 늘어놓고는 딱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면서 거듭 확인시켰다.
아시겠어요? 결국엔 당신이 부르고 쓰고 다 하는 거라고요. 멋대로 편집해서 주변에 폐 끼치지 말고 이쯤에서 관둬요.
그는 듣고 싶지 않았다.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소녀를 설득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마텔의 속박이 인간성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소녀가 인정하게끔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속박을 제거하는 쪽으로 합의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만 했다. 그러나 소녀는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기어이 회심에 찬 일격을 날려 그의 정신을 흩뜨려놓고야 말았다.
긴파람호 대원들은 내 지시를 받고 움직였어요. 나는 그들과 거래를 했어요. 하지만 거래는 이걸로 깨졌어요. 당신을 설득하지 못했으니까. 그들에게 설득이 되었다면, 이렇게 나를 만나러 오진 않았겠죠. 거래가 성사되었다면, 그들만은 내보내주었을 거예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탈주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녀는 나른한 어조로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탈주자는 필요해요. 없으면, 오히려 곤란하죠. 마텔이 어떻게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아직 당신이 모르는 게 많아요. 이곳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나요? 죄다 들려오는 소문들을 가지고 멋대로 짜 맞춘 내용들뿐이겠죠. 이곳이 속해 있는 우주는 평범하지 않아요. 일단 이곳에 하루라도 머물게 되면 마텔을 싸고도는 영향권 내에서 벗어날 길이란 없어요. 탈주자들은 자신이 마침내 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겠어요? 밖일까요? 거기서부턴 영영 밖인 걸까요? 출구라고 여겨지는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밖은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안으로 뒤바뀌는 거라고요. 그것이 흑주예요. 나, 그리고 당신을 에워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소녀가 읊조리듯 말하였다. 그는 눈에 핏발이 서도록 깜빡이지 않고 듣고 있었다. 너무나 몰입해 질문하는 것도 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