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헌은 별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막 자신의 두 눈에 도달한 별빛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이제야 자신에게 배달된 편지 같은 빛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남이 약속된 빛이었다. 다만 시차가 있었다. 저 빛은 너무 늦게 왔다. 어긋나고 어긋나온 결과 더 이상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된 연후에. 시절을 잘못 찾아온 빛이었다. 다른 시절에, 아, 좀 더 일찍 나타나주었다면.
오귀헌은 낙심하여 생각했다. 자신이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지나간 뒤에야 볼 수 있는 빛이었다. 일종의 메아리였다. 하지만 지금 이 무성한 어둠을 사위고 있는 건 그 오래된 청춘, 뿐이었다. 오귀헌은 기억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형형한 눈빛. 나지막하게 외치던 목소리. 홀로 뒤돌아 나아가던 오만하고 쓸쓸한 뒷모습. 그들은 한창 산허리의 에움길을 걷고 있었다. 밤꽃 냄새와 땀이 뒤섞인 길이었고 앞뒤로 걷고 있는 그들 맞은편으로 서로 엇갈린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다가왔다. 반환점이었다. 오귀헌은 반환점을 그대로 지나쳐 계속 앞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느닷없이 멈춰 섰다. 담담하게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얇은 회색 띠가 리본 모양으로 교차하는 눈에 익은 잿빛 중절모였다. 아무리 다가서도 모자챙만큼의 거리가 남게 되는. 이른바 모자챙의 거리감각을 가진 여자였다. 오귀헌은 그 거리를 다르게 인식했었다. 손을 뻗으면 뺨을 만질 수 있는 거리. 다정함의 거리로. 여자는 봄날의 미풍 같았다. 마주침이 그랬듯, 떠남도 갑작스러웠다. 오귀헌은 연락처를 묻지 못했다.
‘자유는 고독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아무것도 없음 속에 미혹덩어리 하나 굴러간다.’
‘미혹 속에서도 지혜의 하늘이 비춘다.’
여자의 공책엔 이런 문장이 수두룩했다.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이 포개진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포개 넣을 순 없다.’
오귀헌이 읽어낸 마지막 문장이었다. 오귀헌은 말해주고 싶었다. 만약 깨진다면, 스스로 깨버린다면, 작은 그릇이 큰 그릇을 덮는다. 그러나 자신에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지금껏 깨지지 못하고 있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오귀헌의 의지는 줄곧 한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 생각에 지배당해 어떻게든 화살표가 끝나는 지점까지 다다르지 않고선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스쳐지나가던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의지를 거슬러 팔을 뻗었다. 끌어당겨 모자챙이 구겨지도록 맞닿아 있으려고 했다. 피어오르는 먼지마저 어느새 손아귀를 휘돌아나간 뒤였지만.
묘하게 일렁이며 여자를 닮아가는 먼지들이었다. 오귀헌은 그 먼지들이 전해주는 빛을 따라 다시 무거운 발짝을 떼어갔다. 그 빛은 절망적이었다. 바람에 뭉개졌다 바람에 일으켜져 뭉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바람이 불어오면, 너를 스친 바람이 내 살에 닿는구나, 싶어 흠뻑 감미로워졌다. 봄은 그러나 인간을 위한 계절이 아니었다. 나는 새들이 꽃 핀 가지 위에 내려앉아 머무르고 낯선 얼굴의 두 눈이 아는 영혼이 와 씐 듯 그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쿡, 쑤셔오는 기억에 무릎을 짚고 서버렸다. 스며들어온 파란 춤이 심장을 휘갈기고 있었다. 오귀헌은 가슴뼈를 손으로 잡아 눌렀다. 응어리 같은 뭔가가 그때 만져졌다. 심장이 있는 쪽 안주머니였다. 납작하고 각진 것이었다. 오귀헌은 난폭하게 주머니를 헤집었다. 딱지 모양으로 접힌 종이가 손에 잡혔다. 서둘러 펼쳐보았다. 필적이 요란했다. 오귀헌은 읽을수록 머리가 띵해졌다. 여자는 편지의 대부분을 스스로의 감정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고 있었다.
(…)내가 독립된 유기체로 세상에 분리되어 나오기 이전의, 태 속에 갇힌 상태로 퇴행될 듯한, 다시 말해 격렬한 파도와도 같이 덮쳐오는 감정 때문에 내가 너에게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 것만 같은 두려운 상태. 나를 유지하기 위해선 나를 독립된 개체로 떨어져 있게 만드는 나다운 개인적 테두리와 그 테두리를 침범당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너와 나 사이를 오고가는 것은 급격히 밀착시키는 감정이다. 나를 너에게 함몰시키려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언젠가 네가 잔뜩 풀죽어 지나가던 옆모습을 봤을 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되돌아가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멀어질수록 가까이 보였다. 망연자실해서 수그린 목덜미와 부은 뺨이, 희고 푸석한 너의 안색이. 차갑게 내뱉어진 반어적인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모든 표정을 잃고 빙상같이 변하던 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 네 손목을 붙들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손을 들어 너의 뺨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잠자코 있었다. 끝끝내 참고 있었다. 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남은 힘을 오로지 나를 멈추는 데 소진했다. 온 힘을 다해 움직임을 막았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연민이었다. 그래, 그것은 연민이었다. 비열하게도 나는 그것을 즐겼다.
그리고 추신.
뭍에 오른 생선처럼 숨통이 조여 왔다. 나는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나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내가 너를 밀어낸 건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다. 너에게 붙들려 얽매일 자신이 싫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한정지으려는 너라는 존재를 그만 끊어내고 싶었다. 왜 너는 기분 좋은 거리감을 지키려 들지 않는 거지? 그래, 나는 도망자다. 나는 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다. 아직은. 담쟁이덩굴처럼 시나브로 얽매여오는 너에 휘감기고 싶지 않아. 숨통이 조여 온다. 찢어발기고 싶다. 너를 토해내고 싶다. 너는 내게 치명상을 입혔다. 껍질이 뜯겨나간 거북의 속살처럼 가녀려져서 수치와 통증을 느끼고 있다. 자꾸만 그리움이 재발한다.
끝으로.
내가 싫으니까 네가 싫은 거다. 너와 가까워진다는 건 나와 가까워지는 일이었다. 너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 자신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네가 다가올 때마다 상처가 건드려졌다. 지긋지긋하게 떨쳐내고 싶었다. 사랑은 지독한 압박이다. 자유로부터의 소외다. 나에게로의 붙들림. 포박.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할까. 그리움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처음이었다. 타인이 이토록 깊숙이 스며들어왔던 적은. 이것을 자각하니 웃음이 났다. 나를 놓기 위해 너를 떠나간다. 다가오지 마!
마지막의 외침이 끝나지 않고 있었다. 오귀헌은 여자의 글씨를 찢어 한 입 한 입 씹어 먹었다. 꽉 목이 메도록. 조각난 여백에 먼지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뼛가룬가. 가만 그 먼지를 주시했다. 꿈틀, 살아 움직였다. 쏜살같이 2차원의 세계 뒷면으로 넘어가 종횡무진 달렸다. 생명! 여자가 남긴 것은 생명이었다. 벌레라는 이름의 시간여행자. 언제라도 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버릴 동행…….
그때 밤거리를 비추던 것은 청사과빛 가로등과 낯모르는 사람 둘이 입고 가던 여름옷이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은 젊은 아버지의 야광반바지와 또 다른 젊은 아버지의 아들이 입은 야광티셔츠. 그런 것들이 어둠을 깃발처럼 흔들고 있었다. 가로수 옆 공중화장실 앞에는 누군가 세워놓은 자전거가 쉬지 않고 헐떡이며 빨간 불빛을 보내었다. 잊어버리지 말라는 듯, 곧 다시 돌아올 테니 기억해달라는 듯. 아, 또 있었다. 신호대기에 걸린, 또래처럼 보이는 아무개가 입에 문 매캐한 담뱃불. 오귀헌은 그리웠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새록새록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오귀헌은 그만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높이는 견딜 수 없다. 나의 별은 지상에 있다. 오귀헌은 일어났다. 쟁반을 배낭에 우겨넣고 비틀거리며 구멍 쪽으로 걸어 나왔다. 다시 기둥을 붙잡고 다리를 얽매어 미끄러져 내려왔다. 적시에 다리를 풀어 바닥으로 뒷걸음질 쳤다.
방은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채 마르지 않은 물기와 여전히 뚜껑과 따로 쓰러져 있는 주전자만 아니었다면 감쪽같이 잊고 쉴 수 있었을지 몰랐다. 한쿡소년이 소지품을 찾으러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며. 그러나 뚜렷이 흔적을 남기고 있는 미지는 다시 또 방이 움직일지 모른다는 불안을 촉발시켰고 오귀헌은 품에서 재차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급하게 한 모금 빨고 흰 숨을 내뱉었다. 흩어지는 연기 속에 무언가 색깔 있는 것이 아른거렸다. 연기가 걷히고 보니, 그것은 덕지덕지 붙은 노란 포스트잇이었다. 저게 무슨 뜻이지. 대체 무슨 의미야. 고심하던 오귀헌의 두 눈이 일순 번득였다. 담배를 문 채로 허리를 구부렸다. 굶주린 침팬지마냥 허겁지겁 포스트잇들을 땄다. 빼곡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귀헌은 강한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극도의 저항감이 초점을 흐리게 했다.
단서가 아니라 미끼일 수도 있었다. 혹, 뜻밖에 원하는 내용을 읽게 된다 해도 단지 그것만이 전부일까. 만에 하나 미묘한 상황에 연루되는 것은 아닐까. 미묘함이 두려웠다. 미묘해질까봐. 미묘하게 얽혀들게 될까봐. 오귀헌은 흰 숨을 몰아쉬며 찬찬히 쪽지를 구겼다. 연기 속에서 주름진 글씨들은 더 이상 복잡하게 보이지 않았다. 한결 다정하고 친숙한, 마치 열매의 단맛을 보장하는 이로운 벌레들 같았다.
오귀헌은 못다 태운 담배를 냅다 던졌다. 라이터를 켜고 예기치 않은 수확물에 불을 붙였다. 불은 순식간에 글씨를 갉아먹고 옷소매를 핥기 시작했다. 오귀헌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디 읽어봐. 읽고 변해봐. 손등의 살갗이 타들어가며 지글지글 녹았다. 오귀헌은 발을 쿵쾅거렸다. 앙다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 턱 끝으로 흘렀다. 오귀헌은 불붙은 턱시도 재킷을 배낭째 벗어던졌다. 불이 대번에 시트로 옮겨 붙었다. 오귀헌은 그래도 구멍 쪽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구멍으로 되돌아가느니 이대로 타죽을 결심이었다. 냉장고와 화장실 사이 빈 벽 앞이었다. 불길 속에서도 여전히 서늘한 채 남아있는 벽은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벗어날 곳은 없다. 여기가 마지막 장소다! 오귀헌은 주저앉았다. 마주보는 자세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대고 눈 감았다.
못 보던 물건 하나가 비쳤다. 녹슨 쇠붙이에 달린 둥근 쇠고리였는데 오귀헌은 아픔도 잊고 번개처럼 웃었다. 벌떡 일어나 아직 멀쩡한 왼손을 뻗어 쇠고리를 붙잡았다.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깜깜했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고리가 붙었던 벽 전체가 칠흑으로 뒤바뀌었다. 밤하늘의 뒷면같이 와 닿은 어둠이었다. 불길해 보였다. 그대로 서 있다간 자신마저 깡그리 어둠이 돼버릴 것 같았다. 그 뒷면의 세계로 넘어가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아니다. 선택은 이미 했다. 그 선택의 결과로서 지금 이 어둠이 눈앞에 당도한 것이었다. 오귀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감은 눈의 어둠이 계속되었다.
무릎이 꺾였다. 발 딛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돌풍마저 불어 닥쳤다. 까마득한 시간의 바람이었다. 불은 이미 꺼진 뒤였다. 물기는 모조리 증발했고 그을음과 재, 나부끼는 연기가 방 안을 뒤덮고 있었다. 불에 파 먹혀 시커먼 넝마처럼 변한 커튼조각 사이로 이 세계의 밤이 내다보였다. 열차간처럼 불 켜진 건너편 방들의 풍경이 아무 연관성 없이 편집된 영상 같았다. 바로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각자 살아가기 바쁜 방 주인들, 아니 방 손님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여인이 백색 등 밑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고, 노란 스탠드로 밝힌 거실에선 한 사내가 온몸으로 해먹을 흔들고 있다. 저토록 불연속적인 생활 장면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노력은 이제 무의미했다. 자신은 종점에 이르렀고 스크린도어는 열렸으니.
나가버려. 귓구멍을 찌르는 이 한마디에 등이 떠밀렸다. 오귀헌은 순간 저항했다. 나는 지난 5년을 시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그저 걷고 오르고 꾸준히 매달렸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다다른 곳이 이 바람 찬 절벽인가. 각오는 했지만, 막상 그 앞에 서니, 숨이 막혔다. 검은 피같이 진득진득한 어둠이 온몸의 구멍을 모조리 틀어 막아버린 듯 갑갑했다. 그 질감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무섭도록 현실적이었다. 이게 끝인 걸까. 오귀헌은 입을 벌리고 울었다. 가슴 속에서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여전히 눈앞은 까맸고, 어둠은 질겼다. 오귀헌은 물어뜯긴 것 같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무겁게 늘어지는 콧물을 훔쳤다. 지속되는 어둠에 감각이 무디어졌다. 손톱으로 귓불을 세게 꼬집었다. 아파서일까. 미세하게 시야가 뚫렸다. 아주 작은 반짝임이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자잘한 빛이 방바닥 너머 깊이를 잴 수 없는 곳에서 줄기차게 뻗어오고 있었다.
오귀헌은 허리를 구부려 자세히 보았다. 빛발이 솟구치며 몰라보게 커졌다. 어둠이 찬란히 터오고 있었다. 오귀헌의 뜬 눈이 가늘어졌다. 문턱 높이쯤에 쟁반 크기만 한 반짝이는 결정들이 도사렸다. 모나지 않고 반들반들한 그것은 한쿡소년에게서 들은 다이아몬드를 연상시켰다. 아니, 다른 것일 리 없었다. 죽은 별의 잔해야말로 끝에 어울리는 풍경이니. 나타나주어서 고마웠다. 눈부시게 시야를 메워주어서 고마웠다. 어느새 끝이 안 보이도록 깔린 다이아몬드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오귀헌은 문득 질서를 찾고 싶었다. 제일 가까운 다이아를 시작으로 촘촘히 배치된 것들만을 눈으로 쭉 이었다.
얼추 별자리가 만들어졌다. 오귀헌은 이를 금강로라 이름 붙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막 자신이 발견한 이 길을 징검다리 삼아 한 번 걸어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나가려면 이 높이를 감당하는 수밖에 없겠지. 아무리 내려가도 이 높이가 나를 맞을 거야. 오귀헌의 눈빛은 시월의 잎사귀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 길은 끝없어 보였다. 막아서는 것도 없었다. 오귀헌은 차마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길이 있는데 안 가고 되돌아선다?!
오귀헌은 던질 것을 찾았다. 끈이 시커멓게 타버린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얽혀있던 턱시도 재킷은 재와 너덜너덜한 조각들로 해체돼 흩뿌려져 있었다. 오귀헌은 배낭을 털고 아직 멀쩡한 채로인 지퍼헤드를 당겨 비죽이 솟아있는 쟁반을 끄집어냈다. 가로로 잡고 물수제비뜨듯 어둠 속으로 날렸다. 쟁반이 쳐들렸다. 안을 내보이며 수직으로 곤두서더니 달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오귀헌은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두려웠다. 꼼짝없이 잡아두는 어둠이 소름끼치도록 낯설었다. 발을 헛디뎌도 떨어지진 않겠구나. 아니야, 헛딛다니. 이왕이면 금강로를 잘 디뎌 가보자.
그러다 기겁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금강로에 너무 의지해선 안 돼. 정신 차리자. 무엇보다 나한테 속지 말자. 보고 싶은 대로 보아선 안 돼. 오귀헌은 거듭 뇌었다. 자신이 임의로 연결한 금강로는 언제라도 흩어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또 다른 질서를 찾아 이어가야 하겠지. 집중, 집중만이 살길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이 길에선 끝장이다. 오귀헌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생각을 그치려 했지만 자꾸만 이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행선도 있고, 그래, 맞아, 한쿡소년도 있잖아.
오귀헌은 거세게 목소리에 반박했다. 비행선? 그게 마음 밖으로까지 날아가 줄까? 그래도 한쿡소년은……. 됐어, 필요로 할 때 가버린 자식이야.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오귀헌은 여자를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관계란 끊임없이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마음의 불일치에 눈 뜨는 경험들. 그것은 몸서리치게 만드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 길에서 물러난다는 건 바로 그 고통의 심지로 되돌아간다는 걸 의미했다. 오귀헌은 끄트머리로 다가섰다. 금강석이 강력한 힘으로 잡아끌고 있었다. 가야했다. 나아갈 곳이 있는 한 나아가야 했다. 돌아선다는 건 이 순간 오귀헌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었다.
돌바닥은 퍽 가까이 떠 있었다. 섬돌에 발을 올리듯 가볍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코앞일지언정 어둠을 넘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말리는 수많은 목소리가 발끝을 달싹이지도 못하게 갈마들었다. 이 높이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것은 남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만 고스란히 남아 맴돌고 있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합친 것보다 더 크고 쟁쟁히 울려왔다.
여기에 속으면 큰일 나겠어. 그럼 난 남들에게 속는 것 이상으로 비극적이 되고 말테지.
이 높이에서 믿고 의지할 데라곤 정체불명의 저 소소영영한 뜬 돌들뿐이었다. 굽어 살피듯 쟁반이 그 위에 내걸려 있었다. 잉크가 번진 듯 가장자리가 묘하게 잠식되어 보름이 지나 이울기 시작한 달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오귀헌은 눈을 떼고 세차게 도리질 쳤다. 어둠을 건너고 싶지 어둠에 붙들리고 싶진 않았다. 어서 결행해야 했다. 올라설 바닥이 어느 틈에 달아나버리기 전에.
물론 그것은 움직일 수 있었다. 한 발을 올려놓자마자 기우뚱해버릴 수도 있었다. 오귀헌은 정신을 모으고 숨을 골랐다. 어디선가 긴파람 소리가 울렸다. 유혹하는 듯한 그 울림의 끝에 홀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모자가 벗겨져 나간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때 여자에게서 열렬히 구하였었던 눈빛과 미소……. 오귀헌은 같은 미소와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그러자 온 어둠이 그리움으로 가득 차 바라봤다. 문득 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데려나와진 기분이 들었다. 비상도, 추락도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엇도 두 발을 막을 수 없었다.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정강이를 타고 강렬하게 뻗쳐 발을 저절로 움직였다.
오귀헌은 훌쩍 돌바닥 위로 올라섰다. 돌바닥은 생각보다 묵직하고 단단했다. 오귀헌은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해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첫발, 또다시 첫발. 연발 첫발인 세상. 오귀헌은 마침내 찾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먼지를 일으키며 찾아 헤매던 것이 이 한 발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등 뒤의 세상이 바래갔다. 오귀헌은 자신이 내딛는 한 발에 온 존재를 실었다. 벼랑 끝에서 딛는 이 한 발은 죽음이 아니라 깨짐이었고, 심장과 전신을 와르르 떨게 하는 세찬 고동소리였고, 전율이었고, 펄떡 펄떡 뛰는 생명 그 자체였다. 어둠도 이것을 알아차린 걸까. 잘게 흩어져 내리더니 갑자기 빛발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