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17장 몽돌

by 수연


주머니에서 몽돌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창가로 갔다. 평소처럼 쿠키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난 뒤였다. 그는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반짝 켜지는 창문들이 좋았다. 그보다 더 좋은 건 복도가 환히 불 밝혀지는 거였다. 까맣게 타버린 듯 보이지 않던 복도가 반짝 켜지는 순간. 그는 한 사내가 서 있는 걸 보았다. 난간 너머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내였지만 그는 깊숙이 그 존재를 느꼈다. 바로 이 사내가 방문을 열고 나와 텅 빈 암흑을 빛으로 전환한 거였다. 오직 존재만이 복도를 켤 수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만으론 켜지 못했다. 존재가 바람을 몰고 와야 복도가 켜졌다. 그렇게 켜지기 전까진 까맣게 죽어 있던 복도였다. 사내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냈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 밝음을 뒤로하고 칠흑 같은 공기만 주시했다. 그는 이상한 열망을 가지고 이 사내를 응시하였다. 그러다 문득, 손에 쥔 몽돌을 눈으로 가져갔다. 사내가 내뿜고 있는 입김이 똑똑히 보였다. 아니, 그것은 입김이 아니라 연기였다. 난간대에 내려진 손가락 사이로도 그칠 줄 모르는 연기가 일었다. 사내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재를 떨어내며 뜨거운 연기를 뱉고 있었다. 담배가 아닌 자신을 태우는 것 같았다. 그래, 조금만 더.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사내가 손아귀의 불을 치익, 눌러 껐다. 느닷없이, 다 그만두고 싶어졌다는 듯 내던졌다. 마저 태워야 했다고 그는 아쉬워하며 생각했다.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다. 문안으로 마술처럼 단박에 사내는 감추어지고 남은 것은 애타는 자신의 시선뿐이었다. 복도는 얼마간 더 켜져 있었다. 사내가 남기고 간 온기의 힘으로 버티다, 꺼졌다. 처음부터 빛났던 적이라곤 있지도 않다는 듯. 흔적도, 소리도 없이. 다 타버렸으니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듯.

그는 몽돌에서 눈을 뗐다. 몽돌. 불가사의한 물건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것은 분명 망원경처럼 작동했다. 작동원리는 따로 없었다. 그저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손에 쥐고 대상을 향하였을 뿐이다. 직관적인 움직임이었다. 사전에 아무 계산 없이, 마음이 몸을 부리는 대로 놔두니 어느새 보려고 한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이 경험대로라면 몽돌은 주인의 마음먹기대로 기능한다. 마음이 곧 결과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얼마나 마음을 모으느냐에 따라 결과의 질도 달라질 것이다. 최상의 결과를 원한다면 팬의 회전이 바람을 만들어내듯 집중해야 한다. 그러자면 마땅히 다음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했다. 이 손으로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거지? 그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당겨 펼쳐 보았다. 마디가 불거지고 메말라 보였지만 손바닥은 해맑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웃으면서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가 의지를 불어넣어 주기를. 의지만 전해진다면 단박에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 활약하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맹서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그 손으로 몽돌을 옮겨 쥐었다. 이 손은 알람이다. 몽돌을 깨우는 건 순전히 이 손의 온도에 달렸다. 그는 그 순간 옳고 그름 따위엔 전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몽돌이 좋았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고 꿈에서 본 조약돌처럼 심란하지도 않았다. 신비로웠다. 신비는 믿음과 결합하면 큰 힘을 내게 한다. 헛되이 소모되거나 기계처럼 오작동을 일으킬 염려도 없이, 마음 그대로의 힘을 말이다. 다만 그 마음을 잘 알아야 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기 마음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싶어 하는지 알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자기 마음을 알 필요가 없어지는 일, 한마디로 몽돌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몽돌을 눈에 대고 바라보았다. 건물 옥상의 박공지붕 쪽이었다. 밝았다. 밤이 걷힌, 출근 전의 태양이 훤히 비추는 풍경이었다. 처음으로 초점이 다른 데 맞춰졌다. 무동력환풍기 사이사이 높다란 옥탑방이 있었다. 이쪽으로 난 출입문이 철제난간에 둘리어 있었다. 마텔의 유일한 대피로였다. 한 번도 열리는 걸 본 적이 없는. 박공식 지붕을 위에 얹고 지붕 꼭대기에 피뢰침을 세운 구조였다. 창은 두 개였는데 좌우 색이 달랐다. 오른쪽은 파랗고 왼쪽은 노랬다. 떨어지는 햇볕에 벽이 물들어 뺨이 상기된 아이 얼굴같이 보였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동경에 찬 아이. 한 아이의 얼굴을 고속 촬영한 사진처럼 서로 빼다 박은 생김새였다. 나날의 표정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긴 망각에 빠진 듯 날마다 되풀이해 짓는 줄도 모르고 조그맣게 입 벌려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는 표정. 시선은 그를 비껴 날아갔다. 그 끝이 어딘지 몽돌로도 관측이 안 되었다. 그는 그 아득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많은 것이 지나갔다. 앞가르마를 탄 빨강머리 소년으로부터. 소년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정수리를 쪼개듯 흘러들어와 심장을 때리고 근육을 밀어붙일 전류를 말이다. 전파수신기의 불빛만 숨 가쁘게 명멸하는 곳에서. 낯빛이 어두워지도록. 창백하게 유령아이 얼굴로 바뀌어가도록. 서서히 몽돌을 내렸다. 얼굴들이 순식간에 탁한 쇳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몽돌을 다시 올렸다. 희고 순한 얼굴, 총총한 눈빛들이 다시 떠오르게. 하지만 식은 바다와 같은 검보라색 밤이 뒤덮였고 그는 몽돌을 놓았다.



지는 해의 빛이 그를 깨웠다. 방 벽에 붉은 기운이 주렴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누워 잠시 안을 둘러보았다. 돌아왔다고 착각할 만큼 소년의 방과 닮았다. 하지만 닮았기에 이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다만 추억을 자극했다. 소비를 부추기는 추억이었다. 마텔은 시간을 담보로 물건을 내주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이 방을 그 방의 유사 공간으로 꾸며갔다. 쟁여진 물건들이 행사하는 중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점점 행동하지 못하게 됐다. 물건들의 곁을 맴돌며 물건들의 먼지를 터는 물건들의 관리자가 되어갔다. 최근 가장 그를 끌어당긴 물건은 구두걸이였다. 한입쿠키소년이 되기로 한 첫날 받은 구두상자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본래 쓰임대로 양쪽에 구두를 걸어두었었다. 그러다 밑창이 닳아가며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게 되자 쓸모를 잃었다. 하지만 관찰해보니 걸이기둥과 맞은편의 지지대 사이에 공간이 제법 있어 메모지를 꽂아 넣기 좋은 구조였다. 그때껏 산만하게 붙어있던 포스트잇들을 모아 가지런히 끼워 넣었다. 정작 메모된 것들의 내용보다 이렇게 재배치한 사물의 쓰임새가 메시지였다. 신경이 쓰여 더는 누워있을 수 없었다. 메모지꽂이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잘 때도 켜두는 전기스탠드 아래 두어 늘 조명 받는 물건이었는데 이 순간 그 광채가 없었다.

스탠드가 꺼져 있었다. 끈 기억이 없는데. 고장인가. 요사이 이런 일이 잦았다. 그는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코드도 제대로 꽂혀 있고 콘센트 스위치도 켜져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스탠드 전원을 톡, 건드렸다. 스탠드에 노란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짤막하게 숨을 내쉬는 사이 불이 저절로 꺼져버렸다. 만져보니 어댑터가 뜨거웠다. 연결 부위가 손상된 걸까. 스탠드는 마치 폭발하는 대신 꺼지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그는 어댑터를 뽑고 스탠드를 가만 놔두었다.

소년의 스탠드는 이런 식으로 과열되어 갑자기 꺼지는 일이 없었다. 익어가는 밀밭의 색조로 변함없이 책상을 안아 비췄었다. 다시 못 볼 따뜻하고 부드러운 황금빛이었다. 그는 소년의 책상이 그리웠다. 그 책상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컴퓨터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틀어놓은 작은 분홍색 팬이 맹렬히 돌아갔고 바람이 넘기려는 책장을 여름바다에서 주워온 조약돌이 뭉근히 눌러 지켰다. 여기저기 붙은 메모지 모서리만 다급한 속도로 비밀을 속삭이는 입처럼 달싹였다. 때로는 거기 적힌 한 단어, 한 구절이 실마리가 되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수수께끼를 풀도록 이끌었다. 소년은 연필을 쥐고 뜨겁게 책 가장자리의 여백을 메웠다. 여백만으론 모자라 노트를 펼쳐 쓰기도 했다. 그러고도 차올라 노트북을 열고 피아노 치듯 양손으로 글자들을 두들겨 치기도 했다.

인쇄기는 언제나 꿈을 출력해주었다. 소년은 진하게, 혹은 연하게 찍혀 나온 탄소가루 활자를 찬찬히 읽었다. 정신은 불이었다. 소년은 쓰면서 타올랐고, 읽으면서 불을 지폈다. 시간은 재가 되어 흩어지고, 남는 것은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너무 뜨거운 날엔 문자 밖으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소년이 붓을 잡는 날은 바로 그런 때였다. 소년은 멀미를 유발하는 석유 냄새에 취해 빨강을 두텁게 칠했다. 분노는 땔감이었다. 캔버스를 마음껏 불 지르고 나면 찬물 같은 파랑으로 마무리를 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썼다.

네가 마지막까지 가져가고 싶은 진심이 뭐야. 당장 죽는다면 말이야. 인생에 이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을까. 소년은 자문하다 안경이 콧날을 흘러내리는 걸 문득 알아차리곤 했다. 그럴 때면 안경을 벗고 그 알을 잔광에 비추어 보았다. 알은 어김없이 뿌옜다. 안경 수건을 끄집어내 하얗게 얼룩진 알을 문질러 닦노라면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안경 수건은 하늘색이었다. 비누칠해 빨 적마다 조각하늘을 아름답게 거품 내어 물로 헹궈내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 씻긴 조각하늘로 안경을 닦아 쓰고 다시 소년의 책상에 앉고 싶었다. 서늘한 조약돌을 쥐고 싶었다. 소소하고 정겨운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싶었다. 그 책상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여름 내내 들리던 매미소리가 갑자기 그치고 만 듯 아랫배가 소슬하니 메어왔다. 내장 위로는 올라오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는 먹먹히 뚫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하늘이 쇳물 같은 주홍의 눈동자를 내리뜬 저녁이었다.

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그는 차분히 뇌었다. 구름과 석양의 조합이 이러한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칠일 전이었을 것이다. 홀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쳤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공교롭게도 녀석은 그를 알아보았고, 그도 단박에 녀석이란 걸 알았다.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목줄을 착용한 채였고 손에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모든 게 녀석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는데 녀석은 이미 그가 든 쟁반 쪽으로 팔을 뻗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금방이라도 입을 벌릴 참이었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녀석은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걸로 가볍게 화제를 삼았더니 녀석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은 혹해서 근시가 된 사람이라는 거였다. 무슨 소린가 들어보니, 이야기가 어느새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초등학생은 어느 낮 교실 복도에서 한 운명적인 얼굴과 마주친다. 그 얼굴엔 안경이 끼워져 있다. 그냥 안경이 아니다. 다리에 금줄까지 달고 있는 금테 안경이다. 초등학생은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계획에 착수한다. 티브이를 코앞에서 보기 시작한다. 좌우 1.0 이상이던 시력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는 데는 채 한 달이 안 걸렸다고 한다. 녀석은 이 대목에서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그 놈을 무진장 두들겨 패주고 싶다고 내지르곤 다음 대목으로 넘어갔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자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얘기다. 그토록 탐내던 안경이 시시하고 촌스럽게 보이더란다. 도로 안경을 벗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력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진 뒤였고, 중학생은 칠판이 안 보이고 복도에서 손 흔든 친구가 번번이 무시당했다고 느껴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지냈다. 중간에 콘택트렌즈란 걸 껴봤지만 염증이 자주 생겨 곤혹스러웠다.

아프면서 흐릿한 것보단 그냥 흐릿한 게 나았다. 중학생은 흐릿한 맨눈으로 보내는 시간이 차츰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이따금씩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보게 되는 세상의 선명함이 오히려 자극적으로 느껴지더란다. 흐릿함은 편안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난데없이 눈에 띄어 불쾌해지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과 더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또한 흐릿함은 눈앞의 세상이 마치 구름으로 이루어진 듯 한결 부드러워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그 흐릿한 세상 속에 폭 파묻혀 나날이 자신감을 얻었다. 그 세상 안에서는 두려울 게 없었다. 중학생은 그것이 눈에 뵈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강해진 증거라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흐릿함에 흠뻑 취해 구름 속을 떠가듯 거리를 쏘다니던 밤이었다. 중학생은 혼자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었다. 맞은편 공중에서 불그스름한 색채가 그 흐리마리한 눈에까지 신호를 보내왔지만 평소처럼 대충 보아 넘겼다. 그리고 몇 발짝 나아가지 않아 급정거하던 자동차 범퍼에 받쳐 몸이 붕 떴다. 다행히 타박상에 그쳤지만 사고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어 합의금은 거의 못 챙겼다. 그러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라도 며칠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나일론 환자노릇을 해야 했다. 길어야 나흘이었을 것이다. 그 얼마 안 되는 공백기 사이에 중학생은 외톨이가 된다. 친구인 줄 알았던 동급생이 다시 등교한 첫날부터 자기를 거들떠도 안 보더라는 것이다. 녀석은 이와 비슷한 사건의 연쇄를 그동안 부단히 겪어왔다고 했다. 알고 보니 다 자신의 눈 때문이었다고 했다. 눈에 뭐가 씌었기 때문에 일이 그토록 잘못돼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련 없이 눈동자에 씐 그 미혹의 껍질을 싹 깎아냈다고 말했다.

그래서 수술을 받고 나니 뭐가 좀 나아졌니?

보다시피 신수가 훤해졌지. 그런데…….

뒷말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주변이 시끄러웠고 사람들이 춤추기 위해 밀려나오고 있었기에 둘은 미처 작별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잠시 물결에 뜬 부표처럼 녀석의 뒤통수가 멀찍이 들썩였지만 그뿐이었다. 다시 인파에 휘말려 어디론가 삼켜짐으로써 17년만의 조우가 시부저기 끝나버렸다.

그의 고민은 그때부터였다. 뭔가 단칼에 베어내지 않으면 큰일이 닥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생 영문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가며 살게 될지도 몰랐다. 아름답게 보이던 석양이 낯설어진 건 그 무렵이었다. 낯설음은 수없이 덧칠이 되어 더럭 황소의 윤곽을 띠더니, 급기야 지금 정말로 불을 삼키러 오고 있는 것 같았다. 황소의 형상이 평소보다 곱절은 커 보이고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창밖으로 가슴을 쑥 빼고 공중을 향하였다. 눈앞이 아찔하게 트여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설마.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거두어들이려 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까마득한 아래, 못대가리같이 촘촘한 것들이 도사렸다. 그것들은 그렇게 밑으로 꺼져서도 어김없이 저녁의 빛을 튀기며 질기게 돌아갔다. 오한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시선의 낙차가 믿기지 않았다. 잠든 사이에 방이, 아니 방들이 일제히 치솟기라도 한 건가. 그는 창에서 몸을 떼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찌됐건 회전은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마텔이 도로 가속되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자신도 그만 정신을 차리고 한입쿠키소년이 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고 샤워기를 머리로 가져갔다. 순간 뜨악하여 세면대 거울로 돌아섰다. 그새 목과 가슴, 팔다리로 발진이 퍼져 있었다. 불에 덴 것 같은 형색이었으나 통증이나 열기는 전날보다 심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뚝뚝 물기가 듣는 몸으로 나와 속옷과 바지, 셔츠와 새 턱시도 재킷을 꺼내 입고서 창문과 침대 머리맡 사이 대각선으로 기대 놓인 전신 거울을 조마조마하게 쳐다봤다. 옷에 가려져 겉보기엔 어제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퍼졌을까. 퍼졌든 아니든. 그는 지그시 생각을 눌렀다. 거울 모서리에 걸쳐 놓은 기우뚱한 나비를 목으로 거칠게 옮겨 걸었다.

양말을 신고 돌아섰다. 현관과 실내를 가르는 벽돌무늬칸막이벽 앞이었다. 벽에 퉁긴 시선이 문득 되튀었다. 칸막이벽으로 바짝 발치가 밀어붙여진 침대 쪽이었다.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주글주글 말려 내려간 이불 틈서리에 끼어 있었다. 새삼스러웠다. 간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오늘의 몽돌은 화면이 고르지 않고 띄엄띄엄 전개되는 영상 같았다. 도무지 물건 같지 않은 물건이었다. 이신추를 만나면 물어봐야겠어. 그런데 뭘? 어제 일이 현실이었냐고? 그는 바지주머니에 몽돌을 쑤셔 넣으며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가장 미심쩍은 건 자신의 행동이었다. 어떻게 나는 몽돌을 망원경처럼 손에 쥘 수 있었을까. 그는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자신의 손바닥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그 손이 저지른 다른 짓이 떠오를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는 재빨리 손을 주머니에 찔렀다.

무심코, 손에 닿은 몽돌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물결의 파동처럼 부드럽고 전기같이 찌릿한 감각이었다. 손가락을 휘감고 팔꿈치로 기어오른 바람이 어깨에서 경추를 타고 한꺼번에 두개골 속으로 불어 닥쳤다. 그는 꼭 그러쥐었다. 그대로 몸을 틀어 칸막이벽 너머로 발을 디밀었다. 막 현관을 향하여 발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는 멈춰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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