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시 묻는 대신 투숙객의 긴 머리채를 훑으며 지나간 시간의 길이를 헤아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검은 광채가 눈부신 머리칼을 보고 있기 멋쩍어져 시선을 돌렸다.
정면의 투명한 창유리가 눈에 닿았다. 바깥의 하늘빛을 크기대로 비춰내는 유리들이었다.
창문이 시원해요.
이 말이 절로 나왔다. 투숙객이 흘깃 그의 무릎께를 곁눈질해 보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느는 건 창문뿐이야. 방은 여전해. 한 바퀴를 돌아와도.
아리송하게 들렸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는 말이었다. 그는 반농담조로 물었다.
창문들이 저절로 증식한단 말은 아니겠죠?
있다가 없어진 자리가 휑하니 창들로 남았어.
투숙객은 또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본분을 떠올리곤 쿠키를 권했다. 투숙객은 묵연히 있었다. 그는 직접 쿠키를 골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쟁반을 살폈다. 박하사탕 맛이 나는 상쾌한 민트칩 쿠키가 복판에 있었다. 그는 속의 것을 하나 끄집어냈다. 살포시 건넨다는 게 힘을 너무 뺐던 모양이다. 부지불식간에 쿠키가 손가락 새로 흘러 바닥에 쪼개졌다. 그는 헉, 소리를 내다가 별안간 웃었다. 어쩐지 상쾌했다.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묵직한 덩어리가 싹 가신 기분이었다.
바로 그거야.
투숙객이 입을 열었다. 손에서 놓칠 때 느껴지는, 그 머리 뒤꼭지까지 서늘한 기운. 바로 그거야. 네가 잠긴 생각들로부터 네 대가리를 번쩍 쳐들어 올리는 그 새하얀 전망. 입 안이 다 개운해지지? 뭘 먹긴 먹어야겠네.
투숙객이 천천히 머리칼을 걷어 올렸다. 이마의 흰 빛이 곧게 드러났다. 잠시 쓸어 올린 그대로 정수리 위에 얹혀있던 머리칼이 저절로 나뉘어 앞가르마가 자연스레 타졌다. 손가락이 하얬다. 손톱 주변에 번진 연필자국이 선연했다. 그 회색 빛깔 손마디가 문득 그에게로 향하였다. 그는 눈을 들었다.
맑고 고운 얼굴이었다. 검고 진한 눈동자가 내부로부터 반짝반짝했다. 깊고 은은한, 촛불을 응시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시부저기 팔을 내밀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감겨왔다. 그는 마주잡아 일으켰다. 여자가 휘청이며 제자리에 섰다. 고마워, 인사하는 소리에 그는 손을 놓는 것도 잊어버린 채 여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처음으로 듣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그러기는커녕 먼저 손을 내밀어온 사람에게 도리어 고함을 내질러 눈동자를 젖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는 그것이 새삼 가슴 아프게 인식되어 입을 열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여자가 손을 놓았다. 허리를 구부려 동강 난 쿠키를 집어 들고는 반쪽은 입에 넣고, 반쪽은 그에게 건넸다. 그는 곰곰이 씹었다. 고소하고 텁텁한 맛이 감돌자마자 톡톡 깨지는 민트칩이 그 맛을 입가심해주었다. 입 안 가득 화사하게 퍼지는 박하향이 시원한 콧숨으로 밀려나왔다.
이 모든 게 다 행위 예술이지.
여자가 말했다. 몸을 어느새 틀어 주렴처럼 내려진 긴 머리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허전함을 느꼈다. 다시금 쿠키를 손에 들었다. 들고서 움직이다 또 한 번 쿠키를 떨어뜨릴 뻔했다.
손에 쥔 걸 놓쳐봐야 눈이 화악 뜨이지. 뭐가 좀 보여?
거미가 보이네요.
그가 대답했다. 왼쪽 벽의 높다란 창유리 위로 거미가 한 마리 내려와 있었다. 아, 하고 여자가 반가이 알은체했다. 그는 뒤꿈치를 붙이고 멀거니 보고 있었다. 거미는 죽었나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왠지 조바심이 나서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어떡하라고.
밖에 매달린 거미를 구름에 태울 수도 있어. 안에 있는 네가 발꿈치를 든다면.
여자가 잠자코 달래듯 말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넌지시 말하였다.
검음을 응시해 본 적 있어? 나는 한때 검음 속을 헤엄쳤지. 끝인 줄 알고 빠져든 거였어. 나는 끝을 체험하고 싶었거든. 필경엔 아무것도 없다는 감각. 이제 끝이구나, 납득하게 되는 시점. 그런데 너무나 있는 거야. 그 어느 때보다 내가, 살아있는 내가 느껴지는 거야. 그러자 빠져나오게 되더군.
담담한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그는 목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란히 침묵했다. 점점이 흐르는 희고 따뜻한 빛 이외 눈앞을 채우는 건 없었다. 간극이 사라진 감각이었다. 다시 목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검음과 나 사이를 이렇게 투명한 창유리로 갈라놓을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나는 그날 작심하고 검음을 응시했어. 끝없이 응시하다 보면 언젠가 ‘검이’라 불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을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끝까지 볼 수가 없었어. 깜빡임을 목격했거든. 깜빡임은 검음과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미미한 밝기였지만 틀림없는 빛이었어. 그 빛은 꾸준하고 집요하게 이쪽으로 신호를 보내왔어. 그건 두 개의 눈동자였어. 머리꼭지까지 검음을 뒤집어쓴 사람이 간신히 눈만 쏙 내놓고 있는 거였어. 그 눈빛은 끈질기게 나를 불렀어. 나는 마주보았어.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깜빡임이 더디어가도록. 영향받을까봐 두려웠어. 결국 난 그 정도 높이에밖에 이르지 못했던 거야. 문을 꽉 걸어 잠가야만 안전하다고 믿는 단계. 내가 살던 곳처럼. 여름이면 거실 벽의 스피커가 울리며 방송이 흘러나왔지. 해충방제수목소독을 알리는 방송이었어. 5층 이하 저층 세대들은 창문을 꼭 닫아두라고 거듭 당부하더군. 독한 약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나는 창문을 열지 않았어. 검음의 영향을 받을까봐.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지. 되지도 않는 변명이나 늘어놓으며. 안에 있잖아, 나는. 게다가 나 역시도 간신히 빠져나온 직후라고. 또다시 삼켜질 순 없어. 설혹 뱉어진다 해도 내가 너를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나 하나 구해내기도 버거웠는데. 전망이 좋지 않아, 지금은.
아니, 다시없는 기회야.
두 발이 먼저 알았다. 그는 발꿈치를 척 들었다. 구름이 거미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의 도약이 비약 되어, 끝이 비로소 시작 되어, 거미는 구름을 타고 갔다. 여자는 말을 마쳤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손에 쥔 쿠키에만 집중했다.
아직 놓치지 않았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놓치고 싶었나 봐요.
이미 한 번 놓쳤잖아.
글쎄요. 놓쳤다기보다 이제 막 되찾은 기분인데요. 말씀하신대로 화악.
여자가 갑자기 움직였다. 몇 가닥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느릿느릿 촉수처럼 일으키며 다가왔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어깨를 반듯이 폈다. 여자는 다리를 좀 절었다. 그는 좌우로 비틀거리는 여자를 보면서 반 발짝 옆으로 옮겨갔다. 여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슬며시 여자의 시선을 눈으로 좇았다. 어느새 거미도 구름도 사라진 창밖은 남빛이 성성했다. 여자는 오른편의 긴 병풍창을 밀어 접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여자의 긴 머리칼을 연기처럼 일렁이게 했다. 그는 옅은 향내를 맡았다. 소복한 생쌀 위에 꽂아둔 향불에서 맡아지던 냄새.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 친구를 소개할게.
여자가 상냥하게 말하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어 비스듬히 위쪽을 살피는가 싶더니 도로 안으로 들이고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여자가 가리킨 곳은 왼 창틀 꼭대기에 파인 가느다란 홈이었다. 맨 구석에 거미가 웅크리고 있었다. 황갈색의 통통한 왕거미였다. 갑자기 바깥쪽 다리를 내뻗는 바람에 그는 좀 놀랐다. 다리는 길었다. 가운데가 툭 구부러지고 호랑이같이 검은 줄무늬가 도드라졌다. 거미집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창유리에 대각선으로 하얀 실금이 그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금들이 들썩였다. 대각선과 대각선 사이 희미하게 나이테 무늬가 읽혔다. 간격이 지문처럼 촘촘했다. 마구 긁어내고 싶을 만치. 창과 평행하게 쳐져 있어 유리와 분간이 안 됐지만 그것은 유리가 아니었다. 거미집이었다.
바람이 불어와야 알 수 있어. 거미는 매달린 게 아니야, 공중에 터 잡은 거지.
여자가 뒤에서 말했다.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음새마다 얼마나 꼼꼼히 매듭지어 놓았는지 마디마디 흰 점을 찍어 놓은 듯 도도록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금세 달아나는 무늬들이었다. 그 정교함에 감탄하며 보다가도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눈 녹은 듯 투명한 유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야에서 놓치고 다시 초점을 맞춰 실낱을 붙들길 여러 번이었다. 공중의 낚시꾼 거미가 실바닥을 타고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언제 걸려들었는지 등껍질이 다부진 벌레가 여섯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거미는 가만히 노렸다. 집에 붙어 콩닥콩닥 들썩이기만 하다 눈 깜짝할 새에 등껍질을 잡아챘다. 두툼한 여덟 다리가 지그시 죄고 누르며 벌레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다. 고요해질 때까지. 거미는 다리 사이에 벌레를 끼고 유유히 홈으로 돌아갔다.
사흘만의 첫 수확이야. 녀석은 여태 굶었어. 이제 먹을 때도 됐지.
작은 창으로 직박구리가 우짖었다. 여자는 웃었다. 그는 덩달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직박구리는 난간에 앉아 쇠꼬챙이 같은 부리를 쩍 벌리고 징징대듯 울었다.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수리에 솜털이 한 움큼 남아 있었다. 직박구리는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며 목 놓아 울다 어느 순간 응답을 받은 듯 휙 날아갔다.
새들의 재빠른 움직임에서는 점탄성이 느껴져.
문득, 여자가 말했다. 어느덧 통로로 이어진 모퉁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여자가 처음에 등지고 앉았던 벽 옆이었다. 여자는 돌아서서 마주보았다. 모퉁이로 꺾어들기 일보 직전의 위치였다. 둥그런 창이 있었다. 탁상거울만 한 창이었는데 여자는 그 문을 막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여자의 시선을 좇았다. 창 너머 창이 있었다. 공중 저편에서 새끼손톱 크기로 마주 보였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여자는 가만 응시했다. 그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보면 볼수록 초조했다. 계속 본다고 열릴까요? 그는 애타게 묻는 눈빛으로 여자를 돌아봤다. 여자의 옆얼굴로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시선을 그대로 모은 채였다. 그는 고개를 바로 했다. 이 창과 저 창 사이를 새들이 오갔다.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날개 달린 것들이 부러웠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막힘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의 세상은 어떨까. 그는 이마를 구겼다. 지배인은 날 왜 이리로 보낸 걸까.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를 똑똑히 확인시키려고? 그는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다. 여자는 숨조차 쉬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대체 살아 계세요? 살아 계시냐고요?! 소리치고 싶었지만 내면에 질러진 빗장이 그 정도로 풀릴 리 없었다. 그렇다. 그가 잘하는 건 빗장을 질러 재빨리 걸어 잠그는 일뿐이었다. 그는 오기로 서 있었다. 바람이 멎었다. 새들은 이따금 빽, 소리를 질러댈 뿐 흔적도 없었다. 하늘만 가득했다. 그는 하늘에 제 눈을 비춰보았다. 거무스름한 실지렁이 같은 것들이 끈적이며 떠다녔다. 눈알을 굴릴 때마다 따라붙는 지절무늬들이었다. 그러나 좀 더 주의를 집중해 보면 언제나 그 무늬와 상관없이 톡 튀어나와 날래게 움직이는 빛이 잠복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거기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 시야는 금세 톡 꼬리를 늘이며 날다 사라졌다, 다른 쪽에서 다시 톡 비행운을 긋는 미세한 빛들로 점점이 퍼지어 더는 얼룩도, 남빛도 아닌 오로지 순백으로만 환하게 깜박깜박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초점을 비낀 그는 공연히 눈동자를 굴려 다시, 또 다시 지절무늬들을 일으켰고, 시야를 얼룩지게 했다. 그러고는 도로 초점을 빛으로 옮겨 그 구불거리는 환영들을 사라지게 했는데 그는 어쩐지 이 상태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눈이 부셔서가 아니었다. 자꾸만 번복하여 빛이 아닌 흐린 비문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속에서 한 가닥 웃음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지만 웃을 수 없었다. 목에서 콱 막혀버렸다. 나오려다 만 재채기처럼 모든 것이 미진했다. 그는 홧김에 다 내팽개쳐 버릴까 하다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 걸 알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순식간에 검음이 그를 빨아들였다. 한 방울 물기처럼, 혹은 한 점의 먼지처럼. 그는 아득히 흡수되어갔다. 실지렁이들마저 묻힌 오직 검기만 한 세상으로. 그는 응축되어갔다. 하지만 경련이 그를 깨웠다. 눈꺼풀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보고 싶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들이, 한 얼굴이 생각나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는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보고 눈을 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 이것이 설계도로구나. 그는 태어나듯 눈을 떴다. 세상은 정말로 밝았다. 여자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깜박임도 잊고 끈기 있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눈동자가 이토록 반짝일 수 있는지 그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황홀해했다. 그런 여자의 눈동자가 일순 바람을 만난 듯했다. 그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이 터져 나오듯 창이 열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비긋이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이쪽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목을 쭉 뺐지만 표정을 읽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하지만 여자는 윤곽조차 흐릿한 그 얼굴에서 무언가 읽어낸 모양이었다. 빙긋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