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꺾고 이쪽을 내다보는 희끗하고 검은 윤곽이 눈길을 끌었다. 김서는 움찔했다. 흑백으로만 구분되던 아른아른한 윤곽에서 언뜻 붉은 자국이 돋쳐 보인 것이다. 김서는 뒤돌아섰다. 두 뺨의 발진이 타는 듯 의식됐다.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시리도록 맑은 음색이 순간 닿았다. 그 음색은 공작과 거미의 차이에 대해 말했다.
공작은 커다란 날개를 짐 지지만, 거미는 공중에 집을 지어놓고 살지. 공작은 구애의 몸짓이나 실컷 할 뿐이지만, 거미는 제 발로 걸려든 것들을 조용히 건져먹지. 마텔은 공작이면서 거미야.
회의가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결책을 찾으려던 본래 의도에서 멀어져 엉뚱한 곳에서 헛돌고 있었다. 김서는 숨결을 타고 온 메시지를 생각하고 이따금 대화에 귀 기울였다. 바퀴통 없이 타이어로만 굴러가던 트럭의 상태가 떠올랐다. 언제 균형을 잃고 뒤집혀 서로를 들이받을지, 그리하여 마텔이 먹기 쉽게 손상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 가도 가도 길이 휘어지고 계속되기만 하던데.
올라가는 수밖에 없어. 올라가다 보면 옥상이 나오겠지. 언젠가는.
어떻게 올라가? 감시자들 투성인데. 곳곳에 보는 눈들이 있어. 빤히 쳐다보면서 벽처럼 서 있더라고. 눈 달린 벽마냥. 잡아 가두는 시선이 한둘이어야지. 주민들 전체가 이럴 거 아니야.
그럴까?
말이라고.
그래도 현관문 들어서면 잊어버리지들 않을까? 세 발짝 떼면 싹 잊히는 게 남의 일이라던데. 우리만 잊으면 되는 거 아닐까?
우리는 그냥 남이 아니잖아, 외지인이잖아, 잊었어?
그래도 지나치게 예민한 거 아닐까?
예민? 불민한 거겠지. 여기는 공동생활구역이야. 혼자 즐기는 펜트하우스가 아니라고. 들어와서 더 조심해야 돼! 계단 밑이라고 층간소음에서 자유로울 것 같아? 이 바닥이 누군가의 방 천장일 수도 있어. 그 사람이 지금 신경이 대단히 예민한데다 피로까지 겹쳐서 집중력이 흐려진 상태라면 못 참고 관리사무소에 신고할 수도 있다는 거 겪어봐야 알겠지? 의자 끄는 소리 좀 작작 내들! 넌 왜 하필 그때 그 시점에 나간 거야? 따로따로 가자니까 기어이 따라 나오더라고. 시선 끌라고 작정했어? 너, 우리 편 맞아?
그때는 그때로 넘기자, 제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면 그렇게 하지. 왜 그랬어? 너 설마 여기 눌러앉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미리 말해. 너 때문에 포위당하기 전에 떨궈놓고 가줄 테니. 너를 위한 방들은 여기 충분해 보이니까.
이렇게들 서로를 탓하는 말들이 주조를 이루었고, 대원들은 점점 편집증적으로 변해갔다. 다들 화를 참느라 주먹을 쥐는가 하면 이를 악물었다. 김서는 그런 대원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창가를 등지고 서 있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서 있지만 자신도 대원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흥분해서 그에게 성마른 소리를 내지르고 뛰쳐나오지 않았던가. 김서는 그와 그런 식으로 헤어진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말을 따라가선 안 되었다. 말은 갈고리 같은 것이었다. 걸려드는 순간 진심과 멀어져 138억년을 도로 거슬러가야 진심에 닿을 수 있는 것이 말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언니와의 대화를 통해 일찌감치 체득한 사실이었다.
지금의 대원들처럼 김서는 언니와 말 한마디 때문에 지독히도 다퉜었다. 나중엔 끝장토론이랍시고 밤새도록 서로를 취조하다시피 물고 늘어졌다. 김서는 말이 말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관계를 초토화시키는 무한궤도였다. 그러나 알면서도 속기 쉬운 게 또한 말이었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빼면 도대체 인간에게 남는 게 무얼까 싶을 정도로 말은 강력했다. 마음은 자꾸만 말이 되어 나오려 했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고 나면, 자신이 너무도 낯설어졌다. 말의 인력에 끌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떠도는 혹성이 돼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너무 멀어지면 돌아오기도 힘들었다. 혹성은 마음을 몰랐다. 오직 한 단어에 붙들려 공전과 자전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김서는 그만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관계가 있는 한 대화는 피할 수 없다.
김서는 그치기 위한 말을 연습했다. 혼자서 무수히 상상대화를 치렀다. 상상의 탁자에 언니를 불러다 앉히고 거듭거듭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가지 명백한 결론이 나왔다. 자기를 내세우는 말들은 죄다 막힌다는 것. 그런 말들은 항상 언니에게 더 세게 받아칠 여지를 주었다. 김서는 이 점을 고려하여 입이 명심해야 할 5원칙을 정했다.
첫째, 들어주는 역할.
둘째, 응, 하고 들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셋째, 집착하는 생각을 흩뜨려 놓기 위한 질문 몇 가지.
넷째, 언니가 언급한 문제의 핵심을 환기시켜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가지 않도록 적시에 제동을 거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나’라는 단어를 삼가라. 그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따라붙는 본능과 미세한 감정까지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원칙을 잊고 성질대로 지껄였다간 그 즉시 언니가 던진 미끼를 무는 셈이었다. 말이 하고 싶어 미치겠는 언니에게 물꼬를 터주어 제멋대로 트집 잡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도록 허용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무엇보다 관건이었다. 자칫하면 언니의 분위기에 말려 원치 않는 말을 끝없이 뱉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아주기만 해도 안 되었다. 언젠가 작정하고 들어주기로 일관하자 언니가 눈치 채고 바로 짚고 넘어갔다.
일부러 말을 아끼는데?
이 경우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번은 그냥 넘어갔다. 사실 그 말은 평소 자신의 관점대로라면 완전한 오해이고 실수였다. 김서는 뭣 때문인지 순간 언니의 말은 안 들리고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언니가 매우 안쓰럽게 여겨졌다. 언니의 창백한 얼굴은 비좁은 바위틈에 끼인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김서는 언니를 달래주려고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였다.
괜찮아.
그 한마디가 예상치 못한 반전을 일으켰다. 언니는 말을 멈추고, 아니 지금까지 말하던 것과 말하려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린 듯 잠자코 있었다. 김서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실수로 내뱉은 괜찮아, 이 한마디가 언니의 입을 다물게 하고, 급기야 자신의 목까지 콱 잠기게 하였다. 그동안 집요하게 대화의 내용을 복기하고, 수없이 패턴을 읽어 화제의 반환점을 찾고, 예측대로 척척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숨마저도 적절하게 내쉬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한순간 이 모든 노력이 빛바래었다. 그만큼 실수의 효과는 탁월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김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그 순간은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는 것. 이때 김서의 머릿속에는 어떤 단어도 들어있지 않았다. 단어에서 자유롭던 한순간이었다. 물론 그렇게 신통한 순간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엔 질문에 답을 하려 애쓰는 사이 말에 대한 집착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정작 말을 꺼낸 언니는 잊어버린 질문에 외려 자신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대화를 끝맺지 못하는 건 언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진이 빠질 때까지 말을 잇다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울분과 자책 속에서 백야와도 같은 아침을 맞아야 했다.
피로한 나날들 속에서도 차차 선명하게 밝아오는 진실이 있었다. 말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오해를 풀기 위해 하는 말들이 서로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서는 말을 붙잡았다. 쉬지 않고 짖어대는 말들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휘발되고 없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라는 돌덩이만 무겁게 쌓여 자신에게도 외딴 혹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한 혹성 밖으로 데리고 나와 준 사람이 언니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언니였다. 김서는 문득 그 사실을 자각하고 꺾이었다. 심장을 찌르는 감정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언니,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김서는 소리 없이 말하였다.
너도.
아련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김서는 그 소리가 꺼진 뒤에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이신추의 눈빛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신추는 걸상에 발을 올리고 책상에 걸터앉은 대원들 뒤편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김서는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보았다. 이신추의 눈길은 그대로였다. 지그시 뜬, 바위처럼 단단한 눈빛이었다.
갑자기 걸상을 박차고 대원들이 편을 갈라 마주서기 시작했다. 순간, 우리가 정말로 말을 사용하지 않는 그런 땅에서 왔다면, 싶었다. 이신추의 거짓말은 들을 만했어. 김서는 웃음 지었다. 이신추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홀로 걸상에 앉아있던 조종사가 그런 둘을 목격했다. 피로감에 목을 늘이며 스트레칭을 하던 참이었다. 얼씨구. 이 판국에 자기들끼리 눈빛이나 주고받으며 한가롭게 시시덕대고 있어? 조종사는 약이 올랐다. 동시에 대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줄 말이 떠올랐다.
둘 사이에 뭔가 꿍꿍이가 있나본데?
이 한마디에 서로 삿대질하느라 바쁘던 대원들의 눈길이 모조리 둘에게로 쏠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건드리면 누구라도 폭발할 기세였다. 그런데 분위기는 또다시 예기치 않은 소리로 일변했다.
저 머리통 속에 든 것들은 어떻게, 녹여낼 수 없나요, 이신추?
벽을 열고 들어선 이는 그였다.
그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길을 안다고 했다. 일명 무당벌레의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얘기를 하면서도 시선은 줄곧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그녀는 대원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창가에 서 있었다. 말없는 옆모습을 하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은 어두웠다. 드문드문 불 켜진 방들이 보였다. 방마다 색조가 달랐다. 온화한 주황빛에 가까운 방이 있는가 하면 옅은 녹색이 감도는 싱그러운 빛깔의 방도 있고, 환한 레몬빛 방들도 있었다. 어느 색조의 방에서나 불을 쬐는 듯하고 물에 잠긴 듯한 느낌이 동시에 일었다. 밤이 되어야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방들이 자기만의 색조를 드러내게 하는 밤이 좋았다. 방들이 저마다 스스로 빛을 내게 하는 너그럽고 속 깊은 밤이 좋았다.
저 아래 진홍빛에 가까운 붉은 방이 하나 켜졌다. 차분한 백색광의 방들도 하나, 둘 켜졌다. 조도를 은은하게 낮춘 방들도 두엇 피어나듯 불 밝혀졌다. 그렇게 방들이 켜지는 사이 어지간히 합의를 본 대원들이 줄 지어 벽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대로 미동도 없이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밤의 냄새가 났다. 차가워진 원두 찌꺼기에서 풍겨오는 것 같은 아련한 탄내와 서늘한 냄새를 그는 마셨다. 공기가 탄력 있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 뒤로 가 섰다. 그녀의 눈길을 좇았다. 큼지막한 액자가 흰 벽을 차지한 방이 보였다.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는 몽돌을 대고 보지 않는 한 식별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액자까지도 그림으로 보이자 들여다보였다. 여름을 지낸 흔적인지 검게 그을린 소년이 창밖에서 뛴다. 뛰다가 천천히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걷는다. 잊고 있던 작고 단단한, 부드러운 것을 다시 기억해낸 듯. 그 모습이 정겨웠다. 우리는 왜 소년, 소녀로 남아있지 못하지? 만약 소년, 소녀로 살았던 추억마저 잊으면, 우리는 어디로 숨지? 가끔은 숨어야 산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 온종일 서 있을 순 없다. 그늘을 찾아 숨어드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늘을 입고 다시 걸어 나올 수 있게. 추억은 우릴 돌아오게 한다.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가슴이 메어와 빛들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꺼져 있는 베란다로 눈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게 귀 기울이며.
달아나고 싶었다. 주행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밤이면 철썩이는 파도 소리처럼 울려 퍼지던 차량들의 울림이 여기로는 전해오지 않았다. 다 어디로 쓸려나가 버린 걸까. 저 풍경들이 움직였으면 좋겠어. 지금 눈앞에 비치는 창이 버스 창유리라면. 심장이 째깍째깍 울리는 듯했다. 일상의 시계가 멈추는 대신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옷깃을 스치는 머리카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현듯 그에게로 맞추어졌다. 그 눈동자에는 자신의 얼굴이 고이 물방울처럼 담기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쳐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언제까지고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속에서 잠이 들고 그 빛에 섞여들고 싶었다. 그는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진저리나게 속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아름다운 피난처. 당신, 내 성냥갑이 되어줄 수 있겠어? 숱하게 갈라져 나간 성냥개비 같은 마음을 한가득 품어줄 수 있겠어? 내가 함부로 불 지르지 않게,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겠어? 오직 당신에게 닿는 그 순간에만 타오를 수 있게. 그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시끄러운 균열을 일으키는 세상의 잡다한 소란으로부터 동떨어져 이대로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를 파묻고 언제까지나 가슴 저미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서 있고 싶었다. 그녀는 커다래진 눈동자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갑작스런 손동작이 그녀의 신경에 예기치 않은 혼돈의 구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재창조되려는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곧 눈길을 거두고 속눈썹으로 그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렸다. 그는 더 꽉 힘을 실어 눌렀다. 자신의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 밑을 파고들어 감각 깊숙이 숨어들고 새겨져 실제보다 더 생생한, 떠올릴수록 더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하지만 이미 그녀는 멀어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추억이 되어가려 했다. 그는 심장이 미어졌다.
같은 창가에 섰다고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이 같을 순 없겠지. 왜 이 눈은 당신이 보는 세상을 똑같이 볼 수가 없는 걸까? 그녀는 실제로 전혀 다른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빗소리로 에워싸인 칠월의 첫날, 그것도 일요일 아침나절에 나란히 한 우산을 쓰고 가는 남녀. 그 남녀의 단단히 서로를 얽맨 팔의 자세. 남자의 팔은 상대의 어깨를 가두고 여자의 팔은 상대의 허리를 옥죄고 있었다. 서로에게 밀착한 그런 자세로 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곧 상대보다 자기가 가려는 방향이 중요해질 것이고, 서로를 염소처럼 그쪽으로 끌어당기느라 지쳐갈 텐데. 그때가 되면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의 악력이, 팔의 무게가 거추장스러워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놓고 팔을 풀게 될 것이다. 가벼운 한 걸음을 떼기 위하여, 그저 각자의 길을 고집스레 가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상대를 붙잡는다는 것이, 아니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는 비참했다. 추억은 그래서 허물 같았다. 벗어놓은 매미 허물 같은 것. 애틋하게 바라보여도 도로 들어가 살 수는 없는. 그렇다면 차라리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자세가 안전할 것이다. 서로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아름다움의 거리. 환멸보다는. 그래, 내게는 내면의 시를 보호하고자 하는 강박이 있어. 난 사악해. 그녀는 다소 처절하게 생각했다.
그때 단 하나의 위안이 될 만한 광경이 나타났다. 직각으로 꺾인 건물 왼편 베란다 창가에 사람이 서 있었다. 목까지 지퍼를 채운 흰색 운동복 상하의 차림의 그 사람은 머리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뿐 아니라 몸도 없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야 그것이 목 없는 마네킹에 입혀놓은 운동복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 속 빈 형체에 편안함을 느꼈다. 얼굴이 없어서 편안했다. 어떤 식으로든 신경을 건드릴 표정이 없어서. 그 형체는 공기를 목 위에 얹고 어깨를 살며시 그녀 쪽으로 틀고 있었다. 자세를 무너뜨리는 법 없이 흰 가슴을 펴고 변함없이 서 있었다. 그런 모습이라면 언제까지 보아도 자극받지 않을 것 같았다.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은 힘을 행사한다.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시키며 또 변화해간다. 그녀를 끌어당긴 손은 위험했다. 그 손의 위력을 고스란히 내비추고 있는 눈빛은 더욱 위험했다. 그녀는 그 눈빛 앞에서 묵묵히 자신을 닫고 공기가 되었다.
그가 붙잡고 있는 것은 한 움큼의 공기였다. 그는 알아챘다. 자신이 상대하는 것이 더 이상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녀를 놔주었다. 등 뒤로 고무 밑창이 바닥을 미는 탄력 있고 사뿐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는 다급히 돌아섰다. 비로소 생각난 호주머니 속 쪽지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틀에 걸린 그녀의 뒤통수는 어느새 작아지고 있었고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꼼짝 않고 지켜보게 만드는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환각 같아, 당신은. 바람이 불어가면 사라지는. 벚꽃잎 같은.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도무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그 영상을 붙들고 오래도록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이신추 목소리가 들렸고, 그는 움직여야 했다. 그림이 현실이 되어주진 못할 테니. 현재는 흐른다. 흘러가 버린다. 속절없이 흘러온다. 그는 눈길을 떨구었다. 아름다움은 깨졌다. 호흡이 가빠왔다. 창으로 밀려드는 바람이 자꾸 등 떠밀며 재촉했다. 그만 꿈에서 깨어나 나아가라고……. 그는 광란하는 심장을 가누기가 어려워 자신에게 주문을 왰다. 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황소가 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