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26장 대결

by 수연


그들이 그를 앞세워 카운터로 걸어갈 때였다. 느닷없이 주위에 땅거미가 졌다. 올려다보니 거대한 입마개 같은 것이 내리덮으며 순식간에 시야가 깜깜해졌다. 우르릉,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발밑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두개골을 메슥거리도록 휘저어놓았다. 바닥이 덜컹했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와 이신추 일행이 일렬로 돌아들던 층계 벽을 몽돌을 대고 연 그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그들이 찾아가기도 전에 소녀가 불러들이리라 예상했었고, 그 예상을 토대로 이신추와 각본을 짠 결과 이 무모해 보이는 행진을 단행하게 된 것이었다. 다만 이번엔 불러들이는 방식이 먼젓번과 비교할 수 없이 조악했다. 안전장치는커녕 붙잡을 손잡이마저 제공하지 않았고 조명도 일체 없었다. 무척 화가 난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 일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절제된 숨소리만 들으며 눈먼 나무처럼 서 있었을 뿐이다.

스릴도 뺐구나. 그는 알아챘다. 다들 말이 없었다. 이런 일에 얼마나 단련이 돼있는지 암흑 속에서도 신음하거나 한숨 쉬지 않고 용케 잘 참아낸다 여기고 있는데 누군가 손목을 잡아왔다.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축축한 손이었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누가 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문득 마음이 놓였다. 다른 이도, 어쩌면 그녀와 이신추도 이런 식으로 옆 사람이 잡아왔을까. 그렇다면 안심이다.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었다.

이 눈먼 공간조차 연결되어 있었다. 다시 간헐적인 덜컹임으로 전자음악의 광폭하고 나른한 속도감을 자아내기 시작했지만, 그리하여 어딘지 모를 곳을 어지럽게 치솟고 내달리는 상상을 유발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빈틈없이 물려있던 입마개를 걷고 예의 그 복도로 찾아들어와 있었다.

안드로이드는 꺼져 있었다. 뻣뻣하게 고정되어 아무것도 내비추지 않는 막힌 창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안은 사람들의 그림자로 숨 막힐 지경이었다. 소녀는 뒷짐을 진 채 그 막대한 그림자 부대를 거느리고 쓰러질 듯 한쪽에 콕 박혀 있었다. 그와 이신추 일행을 보자마자 악부터 내질렀다.

밖은 전쟁터라면서 이들이 나가지 않으려 했고, 나는 수용했을 뿐이야!

소녀의 외침은 그림자 떼 전체를 아우르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우주는 그런 식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아!

대원들 중 하나가 큰 소리로 항변했다.

군더더기는 싹 지워버려!

소녀가 단박에 맞받아쳤다.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이때 조종사와 무리 지은 대원들이 서있던 바닥이 폭삭 꺼져 일대 구멍으로 바뀌었다. 충격과 경악, 공포 따위를 의식할 새도 없었다. 판이 밀려나와 급속도로 밀어붙였다. 비명이 새나올 틈서리도 남기지 않고. 이 모든 신속함은 비정했지만 비정함도 속도감도 느낄 수 없이 갑작스러웠다.

군더더기?! 우리는 다 함께 조종해 왔어!

벽력같은 목소리였다. 이신추는 무지막지한 바닥판에서 서너 발짝 떨어진 지점에 그녀와 그를 데리고 서 있었다. 그도 그녀도 넋 나간 얼굴이었다. 방금 일어난 재앙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리고 자신들이 무사하다는 사실 또한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다만 생명력, 알 수 없는 그 힘만이 이 같은 망실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들을 떠나지 않고 호흡을 잇게 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하수라는 거야. 너희가 조종 기술이 있어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너희는 참 잘 까먹어.

소녀가 기웃이 치켜뜬 눈을 하고 말했다. 이신추가 슬그머니 그에게 눈 맞추었다. 이신추의 눈동자는 묻고 있었다.

알겠지?

순간 석상 같던 그의 두 눈이 떨리며 가는 빛을 내기 시작했다. 소녀가 뒷짐 진 자세를 풀고 그에게로 한 손가락을 내밀어 까딱해보였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기 전 고개를 틀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돌려왔다. 그는 고개를 바로하고 등 뒤로 슬며시 팔을 내밀었다. 그의 손끝엔 딱지 모양으로 접힌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얼김에 쪽지를 받아들었다. 마침 소녀도 나머지 한 팔을 마저 앞으로 뽑으며 손에 쥔 걸 내보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차갑고 원시적인 빛이 튀었다. 소녀는 그 끝을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었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녀가 소리쳤다.

내가 없어진다고 마텔이 끝날까? 마텔은 전천후야! 사람들이 머무는 한 알아서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푸쉬! 그저 약간의 압력만 주어지면, 자기네들 습관으로 슬쩍만 건드려 주면, 알아서 굴러가는 게 마텔이라고!

소녀는 끝을 짜증스레 올려가며 고함질렀다. 칼날이 비스듬히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푸쉬! 마텔은 계속해서 증식할 거야.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한.

이렇게 말을 맺은 소녀의 눈빛이 눈앞의 모든 것을 밀어버리는 불도저와 같이 바뀌었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문득 풀죽은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우리는, 그럼 뭔데?

우리?

소녀가 되물으며 피식, 웃었다.

그야, 이 안에서 유기농으로 길러진 풋과일들이 아니고 뭐겠어?

소녀는 토해내듯 웃고 있었다. 그는 그 칼칼한 웃음소리에 신경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소녀가 칼자루를 높이 치켰다. 그는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입이고 몸이고, 제 것이 아닌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마치 머리와 척추가 제대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지독하게 무감각했다. 차라리 天층이라면.


또 도망치려는 거야?

그의 눈이 커졌다. 뜻밖의 목소리였다. 꿈쩍도 안하는 상태로 이렇게 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너니?!

이 말엔 대꾸 없이 오의 목소리가 연거푸 물어왔다.

여기서 도망친다고 네 눈앞의 경계들이 사라질까?

너, 살아 있니? 내가 어떻게 네 목소릴 들을 수 있는 거지?

여긴 흑연의 세계야. 너와 나는 흑연으로 이어져 있어.

무슨 말이야? 내 편지를 읽었니?

아니, 읽지 못했어. 하지만 미분화(未分化)의 감정, 이라는 게 있어. 말하자면 이것이 나를 너에게로 보낸 셈이지. 나는 곧 완전히 녹아들 거야. 그전에 너의 기억을 환기시켜 주려고.

녹아들다니, 어디로?! 그 미분환가 뭔가 하는 감정 속으로?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좀 말을 해봐.

오가 대답했다.

너의 그 핏줄 뛰는 손이 찍어 쓸 잉크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말이야.

그는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온 정신을 끌어 모아 귀 기울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다이아몬드에 관해 말했었지? 다이아몬드의 탄소 성분은 별 하나가 쪼개지기 직전에 만들어지잖아. 그와 같이 만약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우리가 낱낱의 생명으로 분화하기 이전에 형성되어 모두에게 똑같이 완전한 형태로 내재해 있고 동시에 다 같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좀 어떠니.

그리고 한동안은 어느 작고 외진 정류장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는 먼젓번 얘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오의 목소리는 처음처럼 갑자기 들려오지 않았고, 정신이 번쩍 났다. 손이 바로 움직였다. 그는 몽돌의 진동을 느꼈다. 싸쥔 몽돌을 꺼내들었다. 겨냥과 동시에 집중해 던졌다.


그녀는 이 모든 소란에서 멀어져 쪽지를 펼쳐 읽고 있었다. 낯익은 손 글씨였다. 편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했다.


서!

나는 너에게 한 번도 솔직한 편지를 쓰지 못했다. 너의 반응이 언제나 두려웠기 때문이야. 때로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너의 발소리만으로도 내장이 뒤틀리는 불안을 느꼈다. 사방이 깜깜한 지금, 처음으로 나는 두려움 없이 너에게 쓴다. 왜 나는 너를 대하기가 그토록 어려웠을까. 가책이었을까. 원망이었을까. 진실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나는 네가 내 마음 같다고 믿었다. 세상에서 바라는 것 이상으로 동생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너 역시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는 걸. 내가 모든 걸 내 마음같이 보듯 너도 모든 걸 네 마음같이 본다는 걸.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적어도 고통의 대상을 착각하여 싸우는 일은 없겠지. 네가 아닌 내 마음과 싸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언젠가 나는 자신을 호모 에렉투스라 여겼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밖에서 맞닥뜨린 것이 아니었어. 내 안의 사피엔스가 더 자라난 것이었을 뿐. 당시엔 모든 걸 외부에서 오는 영향으로 받아들였다. 내 마음이 그러한 영향을 필요로 했다는 건 알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러워. 지금의 나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다 타버린 어둠 속에서, 그 어떤 출구도 생명도 없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이러하다. 내가 불러들였다고. 내 마음이 그걸 필요로 했다, 라고. 너 역시 네 마음속에서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때가 되면. 때가 무르익으면. 그때 이 편지를 다시 읽어주지 않을래?


추신 一. 너도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추신 一. 너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네가, 아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한때 너를 내 분신처럼 여겼던 게 기억난다. 그래서 내 일부가 도려내어진 듯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변함없이. 지금 당장 이런 내 진심이 너에게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믿는다. 어떤 진심은 별빛과 같아서 전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거든. 그때가 언제일진 알 수 없지만, 내 진심이 너의 심장에 닿는 그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말을 너에게 꼭 해주고 싶다. 아무리 오랜 뒤라도 그 진심만큼은 시간을 타지 않고 처음 품었던 마음 그대로 푸르고 뜨겁게, 너에게로 와 닿을 거라고. 비록 내가 시간에 휩쓸려 스러진 뒤라도 말이다. 진심은 늙지 않아. 항상 젊은 그대로 너를 비출 거야. 네가 느끼기만 하면. 아니, 느끼려고만 하면. 그러면 너도 나를 볼 수 있겠지. 조건 없이 행복해하던, 너를 향한 하나의 마음을. 안녕.


안녕. 김서는 입김처럼 파고드는 그 인사를 듣고 또 들었다. 김서는 미소를 짓고 싶었다. 애써 지어올린 미소가 자꾸만 파도와 같이 실룩였지만 그래도 희게 차오른 눈을 들어 김서는 웃었다. 문득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여자애의 목소리였다. 조용히, 마치 지저귀듯, 줄곧 잊고 있던 한마디를 외쳐 불렀다.

‘김서’의 ‘서’는 용서의 ‘서’다.



몽돌이 푸르르, 파열했다. 바람에 흩어지는 재 가루처럼 점점이 형태를 사르며 부서져 내리다 도로 차곡차곡 쌓아올려 파란 사과가 되었다. 사과가 되어 칼끝을 폭 삼켰다. 흠칫 놀란 소녀가 자루를 놓치자 칼을 문 사과가 떼구르르 바닥에 굴렀다. 그리고 한순간 칼도 사과도 형태를 잃어버렸다. 실 가닥처럼 한데 엉키어 하얗게 빛을 뿜어내더니 한 덩이의 오묘한 점액질로 흐늘거리다 본래대로 굳어졌다. 감쪽같이. 칼은 사라졌다. 몽돌이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던진 그대로 내뻗고 있던 팔을 그제야 거두어들인 그는 크게 한숨 쉬었다.

몽돌이 왜 이런 거죠?

그는 옆으로 다가선 이신추에게 부러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네가 그걸 잡아 던지기 전부터, 그걸 주머니에 넣기 전부터, 쿠키를 녹이는 걸 지켜보기 전부터, 너는 알고 있었어.

저는 몽돌에 그런 힘이 있을 거라곤 믿지 않았는데요?

그래, 네가 몽돌을 믿고서 그랬을 리는 없지.

이신추는 미묘한 웃음기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아버지 같은 눈빛이었다. 집으로 돌아올 줄 모르고 걷던 소년을 언제 어느 때고 찾아내 뚜벅뚜벅 데리러 오며 아버지가 지었던 눈빛. 오래 잊고 지내온 눈빛이었다. 왜 지금 이신추의 두 눈에서 이걸 보고 있지?! 그는 벌리려던 입을 다물고 떨어진 몽돌을 주우러 갔다.

허리를 드는 순간 그 자리에 뻣뻣이 서고 말았다. 그림자들이 우르르 나와 소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떼 지어 몰려선 모양이 마치 두루마리구름 같았다. 소녀는 휴지 심처럼 자기 주위에 그들을 휘감고서 차갑게 웃었다. 오의 방에서 여주인에 대해 떠들어댄 말이 생각났다. 그때 그는 여주인이 심장까지도 다이아몬드로 돼있을 거라 했었는데 지금 정말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심장. 다이아몬드는 다 타버린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무엇도 더는 상처 입힐 수 없는 별의 심장. 다이아몬드는 죽음이다. 제일 단단한 것이다. 방벽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강하고,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이건 돌파할 수 없다. 한계다.

그러나 봄은 한 면만 있는 게 아니지. 문득 팔 긴 여자 말이 되울렸다. 그는 하던 생각을 그치고 고요히 가라앉혔다. 잊고 있던 다이아몬드의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가 반짝여 보이는 건 살아있는 주변의 빛을 투과시키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내가 너를 비추어야겠구나. 하지만 어떻게……, 나는 너의 이름도 모르는데……. 그는 소녀를 응시하였다. 순간 오가 들려줬던 정류장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작고 외딴 역은 오래도록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비워진 장소라고 했다. 그 역의 간판은 삭아서 뒤틀린……수연아.

그는 꿈 밖으로 밀어내듯 불렀다.

수연아.

그는 거듭 소리 내 불렀다. 소녀가 놀란 눈으로 마주보았다. 뒤튼 초승달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수연아!

그는 한 번 더 부르짖었다. 떨림이 격렬해졌다. 한순간 찢기려나, 철렁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팽창이었다. 그는 애처로워 더 볼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마르고 키 작은 몸으로 서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축 늘어뜨린 팔의 불거진 뼈마디가 아파보였다. 두 눈에 맺힌 짠물이 보였다.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용할 수 없어. 그럴 권한이 없어. 주민들이 막을 거야. 너를 원망할 거야.

그래, 원망을 받겠지. 그는 고통스럽게 생각했다. 이들은 습관을 벗어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거야. 습관이 이들의 평화니까. 하지만 그 평화를 위해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평화일까. 아니, 이 세계는 평화롭지 않아. 평화를 위장하고 있을 뿐 단 한 순간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어. 하지만 그건 이 일과 상관없어. 나는 섣부른 연관 짓기를 떠나 행동하는 거야. 나는 바라고 있어. 그녀가 무사히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기 위해 할 일을 다 할 거야.

언닌 어딨어?

그녀 목소리였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는 잔뜩 수축한 어깨에 눈을 내리뜬 모습이었다. 그는 몰아쉬듯 입을 열었다.

역시 그분이 언니셨군요. 창밖에서 당신 얼굴을 발견하고 저한테 가리켜 보이기까지 하셨어요. 뜰 건너편이라 맨눈으론 거의 식별이 안 되는 거리였는데도 말이죠. 저는 몽돌을 쥐고서야 당신인 걸 알아보았어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요. 몽돌에서 눈을 뗀 순간, 저는 복도에 나와 있었어요. 문은 사라지고 없고요. 거기 있던 모든 문들이요. 그저 꽉 막힌 외통수와도 같은 낯선 복도에 전 서 있었어요. 뒤에서 안 타세요?,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제복 차림의 경비 아저씨가 열린 승강기 안에서 쳐다보고 계시더라고요. 저는 퍼뜩 고맙습니다, 외치고는 문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타고 보니 모든 게 꿈만 같더라고요. 天층, 그곳이 天층이었거든요. 하강이 뜻밖에 순조로워 더 그렇게 여겨지더라고요, 꿈같이. 그랬는데 쟁반에 쪽지가 보였어요. 희미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天층에서의 일이 가물가물해졌거든요. 쪽지가 아니었다면, 쪽지를 전해주라는 그분의 부탁이 겉에 쓰여 있지 않았더라면, 저는 틀림없이 잊었을 겁니다. 그분을 만난 것을요.

그는 이렇게 말을 맺고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대로 입술을 물고 서 있었다. 언니에 대해서도, 天층과 관련해서도 일절 물으려 들지 않았다. 묵묵하던 그녀의 턱에 주름이 잡히었다. 그는 흠칫 고개를 떨어뜨렸다. 몽돌을 붙잡는 손이 떨렸다. 따듯했다. 그는 그녀와 같은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치는 것이 아쉬운, 사무치는 곡조를 같이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이렇게 물어오는 이신추 목소리가 들렸다.

대원들을 어떻게 했어?

인간은 자유낙하하는 존재야.

언제 울었냐는 듯 메마른 눈으로 소녀가 말했다.

대원들을 어디로 보냈냐고?

소녀는 핏기 없이 또박또박 되풀이해 읊었다. 순간 그의 신경이 쩌릿했다. 말 그대로 대원들은 지금도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소녀의 방바닥 밑에는 바닥을 모르는 바닥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그는 의아했다. 소녀는 왜 이런 위험을 딛고 사는 거지? 폐쇄적이 된다는 건 아마도 그런 의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 길 낭떠러지를 감당하고 사는 것.

그들은 곧 떨어지는 줄도 모르게 될 거야. 낙하는 멈추지 않으니까.

소녀의 어투는 담담했다. 이신추가 퍽 부드럽게 제안했다.

다시 끌어올릴 순 없어?

소녀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상기시켰다.

자유낙하 중일 텐데? 아무리 긴 밧줄도 그 속도엔 못 미칠 거야. 우리끼리 얘기하자고. 핵심멤버들끼리.

핵심멤버?

이신추가 강한 어조로 다그쳤다.

무슨 기준으로 우리가 핵심멤버로 뽑힌 건데?

소녀도 지지 않고 반문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니들이 알지. 내가 아니라 니들이 그렇게 뽑아놨잖아.

소녀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 한쪽 입으로만 웃으며 말했다.

누가 알아? 숨이 붙어있음 한 반세기쯤 지나고 좋은 기회를 만날지. 그마저도 쟤한테 달렸지만.

소녀는 꽉 쥔 주먹에서 검지를 빼 그에게로 치켜들었다. 이신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주시하였다. 들었지?, 하고 확인시켜주는 눈빛이었다.

그는 재빨리 수면기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 문 막아요!

이신추가 단걸음에 수면기로 다가가 그 앞을 등지고 섰다. 그는 소녀를 돌아봤다. 소녀가 시부저기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방벽처럼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모습을 감춰갔다. 그는 뛰었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도 붙잡지 않았다. 푹 꺼진 눈빛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노인이거나 적어도 자신보단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그는 잠깐 그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입매가 처지고 눈가가 짙은 하나같이 창백한 안색들이었다. 감히 나를 바꾸려고 해!, 외치던 사내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사내를 잡아준 팔 긴 여자도 옆에 붙어 서 있었다. 그러나 둘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심리적 거리두기’ 상태를 유지한 채 메마른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키고만 있었다. 다시 보니 첫인상과는 좀 달랐다. 완고하다기보다 자포자기한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모두가 그랬다. 그들은 자포자기한 사람들이었다. 자포자기의 어둡고 늘어진 기운이 그에게로 마수를 뻗쳐왔다.

마텔의 마수는 이 기운이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입을 열었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기억 속의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이 말했다.

우리는 한 가족이야. 윗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 식구라고. 우린 수많은 전쟁을 겪었어. 양손에 붙든 어린 두 딸이 폭격으로 내장을 쏟으며 갈기갈기 찢겨나가는데도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지. 오래지 않아 붙잡혀서 흙바닥에 무릎을 꿇렸지만. 바로 곁에서 사람이 총살당해 넘어가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 그 지경에 이르면 도저히 사람정신으로 못 버텨. 짐승처럼 반사 신경만으로 움직이게 되지. 우린 죽기 살기로 또다시 도망을 쳤어. 어떻게 도망쳤는지 기억이 안 나. 그게 전쟁이야. 그게 바로 전쟁이라고! 폭격이 끝났다고 도망난질이 멈춘 줄 알아? 이제는 기억이 폭격을 해와. 잠시도 쉴 틈이 없어. 계속해서 쫓겨만 다녀. 도무지 종전이라는 게 없어.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되고 계속되겠지. 하지만 기꺼이 대가를 치르겠어. 속죄하겠어. 마텔에 머무르는 것으로. 마텔의 생활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걸로.

그러자 또 하나의 목소리가 외쳤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 몰라. 함부로 일을 벌여선 안 돼. 그래, 우린 자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 제발 피 흘리는 전쟁만은 다시 불러오지 마.

재발한 통증처럼 기억이 그 얼굴을 지독하게 일그러뜨려 놓았다. 그 얼굴과 나란히 수많은 얼굴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주름져 갔다. 대대로 증폭된 결과일까. 그의 척추골 어딘가가 건드려진 듯 무릎이 떨려왔다. 눈앞의 현실을 밀어내면서까지 전개돼나가려고 좌우로 그를 뒤흔들었다. 어서 함께 공유하고 지켜나가자고 애걸하고 있었다. 그는 호소하고 싶었다. 자신도 도망자라고. 그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친 것처럼 자신도 공포 때문에 도망쳐왔다고. 그러나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느꼈던 공포는 다 같이 도망치고 뭉치게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포는 어떻게도 공유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심장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는 혼자 싸워야 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맞서야 했다.

아무래도 죄 없이 움직일 순 없겠구나. 역시 삶이란 혐의를 짊어지는 일이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마지막 고비였다. 그랬다. 그는 근지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씻어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그러한 버릇이, 일이 닥치기도 전에 끝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고약한 버릇이, 변화하지 못하도록 이때까지 자신을 묶어놓았던 것이다.

날지 않아. 날지 않아.

갑자기 두드리는 듯한, 무조음의 복창이 시작되었다. 이빨이 서걱대는 충격이었다. 두루마리구름이 일시에 폭우로 바뀐 듯했다. 얼굴 하나하나가 일제히 그를 향해 날지 않아, 날지 않아, 되풀이해 부르고 있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비스듬히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를 맨살에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들의 감정과 믿음에 공명할 수 없는 그는 홀로 위축되어 서 있었다. 추웠다. 하지만 강한 자기장이 몸속에서 뻗치고 있었다. 뼛속 깊이 스며있던 의지가 세포를 흔들고 신경을 달리며 진하게 뿜어져 나와 심장을 펄떡이고 손마디를 펼치고 발끝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 피는 시한폭탄이야, 나는 가야해!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대로 이미 그를 말리기 위한 주문을 외우는 데 결사적이었다. 저 기세를 뚫고 나가는 게 가능할까. 개인의 힘만으로, 똘똘 뭉친 만인의 에너지를 돌파해 나갈 수 있을까. 그의 피는 아직 뜨거웠다. 그는 피의 힘으로 뚝뚝 나아갔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당황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무전기를 켜둘 수 있는지 자신의 부주의가 놀라웠다. 서둘러 뒷주머니에서 무전기를 뽑아 스위치를 내리려는데, 지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계를 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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