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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섭 Nov 12. 2024

지옥의 묵시록

-포르노보다 못한 실패작 (김유섭)

  원제목 Apocalypse Now(현대의 묵시록)인,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원작 소설을 시대와 상황만 바꿔서 변형하고 감독의 창작까지 덧붙여서 처참하게 실패한 작품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원작 소설인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을 그대로 베꼈지만, 영화가 포르노보다 못한 실패작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은 널리 알려진 대로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착취와 약탈을 비판하는 소설이다. 다만 19세기적 백인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가 소설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창작 의도는 문학 어쩌고 하면서 멍소리나 늘어놓는 것이 아닌, 거짓과 위선 그리고 광기로 가득 찬 제국주의 식민지 약탈의 추악한 본질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벨기에 식민지인 콩고강 상류에 있는 상아 교역소 전설적 관리소장인 커츠를 만나기 위해 주인공 말로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커츠는 상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을 죽이고 잔악하게 약탈하는 등 끔찍한 공포로 원주민을 지배하며 왕처럼 추앙받고 있다는 인물이다. 

  결국 말로가 병든 커츠를 데리고 돌아오던 중 “끔찍하다. 끔찍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것이 원작 소설의 개략적 골격이다.    

    

  

Ⅰ원작 소설과 영화의 주제


  원작 소설의 주제는 19세기 야만의 땅을 진보된 문명 세계가 개발해서 원주민의 삶을 발전시키겠다는 미명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에 나섰지만, 오히려 원주민의 삶을 유린하고 광기의 살인과 착취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그들을 지옥에 밀어 넣고 있음을 비판한다.      

  영화는 이러한 원작 소설을 20세기에 벌어진 월남전으로 바꿔서 이념전쟁의 끔찍한 광기의 지옥을 고발하려고 한다. 



Ⅱ영화가 실패작인 이유   

  

  영화가 실패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커츠 대령의 자각이다. 원작 소설 속 19세기 제국주의 식민지 약탈에 앞장섰던 커츠의 자각과 20세기 이념전쟁이면서 동시에 독립전쟁에 그 뿌리가 있는 월남전 상황에서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한 커츠 대령의 자각은 그 이유와 타당성이 달라야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변용한 광기에 찬 전쟁 상황 속 끔찍한 장면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영화 기술만으로 관객에게 동의하라고 강요한다. 감독의 허망한 억지와 광기만 느껴질 뿐이다. 이것이 포르노보다 못한 실패작인 이유이다.   

   

1.원작 소설 속 커츠의 자각     

  원작 소설 속 커츠는 말로와 함께 배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사라진다. 그는 배에서 내려 병든 몸으로 기어서 자신이 지배하던 교역소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자신을 만나러 오는 말로가 탄 배를 원주민을 시켜서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도 커츠임이 밝혀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커츠의 자각이다. 커츠가 말로와 함께 돌아가야 하는 세계는 문명 세계다. 그곳에는 도덕과 신과 양심과 법률이 존재한다. 그러나 커츠가 교역소에서 저질렀던 잔악한 살인과 착취와 약탈은 도덕과 신과 양심과 법률을 짓밟는 반인간적인 광기와 야만적 파괴였다. 

  물론 벨기에로 돌아가면 커츠는 상아 교역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유능한 직원으로 평가되어 회사에서 승진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제국주의 추악한 약탈의 도구였던 자신의 악행을 자각한 커츠는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커츠는 “The Horror...” “끔찍하다 끔찍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끔찍한 야만은 개발해야 할 콩고가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지배라는 커츠의 자각이다. 


2. 영화 속 커츠 대령의 자각과 문제점     

  영화는 20세기 월남전 상황에 맞춰서 원작 소설 속 커츠의 자각을 변형한다. 그리고 감독의 창작까지 덧붙여 구성을 바꾼다. 그러나 이러한 커츠 대령의 자각은 어리석은 공상으로 만든 관념적 억지 자각에 지나지 않는다.  

    

<1>원작 소설 속 커츠의 자각과 영화 속 커츠 대령의 자각을 비교하면,     

원작 소설 

19세기 제국주의 식민지 개발 – 거짓과 위선과 원주민에 대한 광기의 착취, 약탈, 살인, 끔찍함 –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지옥과 다르지 않은 현실 – 커츠의 자각     

영화

20세기 이념전쟁 – 허구의 가치를 위한 무의미한 이념전쟁, 광기에 찬 잔악하고 끔찍한 살상, 인간성 파괴 – 커츠 대령의 자각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지옥과 다르지 않은 왕국 건설. 

    

<2> 영화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제시하는 20세기 이념대결이 만든 광기에 찬 잔악한 살상과 인간성마저 파괴하는 이념전쟁의 끔찍함을 고발하려는 의도에는 박수를 보낸다. 이는 원작 소설의 주제를 시대 변화에 맞춰 변형한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 소설과 달리 20세기 월남전은 독립전쟁에 뿌리를 둔 이념전쟁이고 또한 전쟁 상황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커츠 대령의 자각의 논리 구조가 원작 소설과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에도 참전했고 앞길이 유망한 장교인 커츠 대령이 특수부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던 중에 끔찍한 참상과 인간성 파괴를 목격한다. 그래서 원시적 공포와 이념전쟁의 무의미함을 자각하고 적과 싸우는 전쟁터에서 부대를 이끌고 탈영한다는 설정은 감독의 공상이 만든 관념에 불과하다. 더구나 모든 부대원이 커츠 대령의 자각에 동참해 함께 탈영하고 심지어 캄보디아 국경 주변 원주민까지 함께한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3. 공상과 관념의 억지 창작과 그 이유      

  원작 소설 속 커츠의 자각을 확장해 영화화시켜 원작 소설을 넘어서겠다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허망한 욕망이 공상과 관념의 억지 창작을 만든 이유이고 영화를 실패로 몰고 간 원인이다. 

  원작 소설 속 커츠는 일방적인 가해자였다. 그러나 영화 속 커츠 대령은 미국 육군 참모총장을 바라보는 전쟁 경험이 풍부한 군인이다. 

  또한 원작 소설 속 커츠가 만든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지옥의 현실은 원주민에 대한 커츠의 광기에 찬 착취와 약탈과 살인이다.

  그런데 영화 속 커츠 대령이 만든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왕국의 근원은 무의미한 이념전쟁의 인간성 파괴와 광기의 살상과 원시적 끔찍함에 대한 자각이다. 따라서 커츠 대령이 자신을 따르는 부대원들과 원주민들로 왕국을 만들었다면 적어도 인간의 생명 존중과 반전을 가치로 내세운 사이비종교 형식이라도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가정마저도 커츠 대령이 부대를 이끌고 탈영한다는 설정의 현실적 근거로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러함에도 커츠 대령이 왕국을 만들고 지배하는 방식이 원작 소설과 같은 끔찍한 착취와 살인이라는 설정은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감독의 무지한 관념이고 억지일 뿐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조지프 콘래드의 원작 소설 속 커츠가 광기의 착취와 약탈과 살인으로 원주민을 지배하는 방식을 충실하게 베낀다. 

  그래서 원작 소설 속 커츠의 상아 교역지 울타리에 걸린 원주민의 잘린 목, 뒹구는 시체들, 널려있는 착취와 약탈과 살인의 끔찍한 흔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영화 속 커츠 대령이 세운 왕국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순수 공포, 원초적 공포를 느꼈다는 대사 몇 마디로 이를 합리화하려는 수작을 부린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원작 소설 속 커츠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난 뒤에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 커츠 대령은 자각한 후에 부대를 데리고 탈영해서 끔찍한 살인과 공포로 왕국을 세운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원작 소설의 앞뒤를 바꾼 구성을 타당성 있는 근거로 녹여내지 못하고 영화의 논리만 처참하게 무너뜨려 스스로 혼란의 늪에 빠진다.



Ⅲ 원작 소설 베끼기와 변형하기 

    

<1> 윌러드 대위 

  윌러드 대위는 원작 소설 속 말로의 영화적 변형이다. 그러나 커츠 대령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이념전쟁의 도구가 되어 전쟁터를 누볐지만, 미국으로 귀국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내와 이혼하는 등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상처로 인간성마저 파괴되어 삶이 피폐해진 사람이다. 

  다시 부대로 복귀해 임무를 수행하던 윌러드 대위는 상부의 명령으로 커츠 대령을 죽이지만, 월남전이라는 이념전쟁의 무의미함과 끔찍한 원시적 공포를 자각한다. 그래서 커츠 대령이 지배하던 왕국의 다음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부대원들과 원주민들을 두고 떠난다. 

  사령부에서는 폭격으로 커츠 대령이 머물던 곳을 지워 버리겠다고 좌표를 알려달라고 하지만, 그는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무의미한 이념전쟁에 대한 상식적인 자각이고 커츠 대령의 또 다른 자각이기도 할 것이다.  

    

<2> 킬고어 중령

  킬고어 중령은 원작 소설 속 회계주임의 변형이다.      

  소설에 묘사된 회계주임은 “식민지 아프리카 콩고 정착지에서 풀 먹인 하이칼라, 하이얀 컵스, 가벼운 알파카 천으로 만든 웃옷, 눈처럼 하얀 바지, 깨끗한 넥타이, 광택이 나는 구두, 햇빛을 피하기 위해 쓴 녹색의 양산, 가르마를 탄 기름 바른 단정한 머리, 향수까지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프리카 원주민 여인에게 옷 다리는 법 등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조지프 콘래드가 당시 콩고의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계주임을 통해 상징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는 콩고 등 식민지를 개발해서 문명 세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을 착취해 또 다른 벨기에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이를 킬고어 중령으로 변형시킨다. 전투 중에 부하에게 파도타기를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는 전쟁보다 파도타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킬고어에게 전쟁은 게임이고 네이팜탄에 죽어가는 것은 인간도 인류도 아닌 벌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광기에 찬 헬리콥터 전투 장면은 원작 소설에 흐르는 광기를 그대로 옮겨와서 화려한 영화 기술로 증폭시키기에 성공한다. 파도타기를 자본주의 상징으로 수긍하더라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기술만 돋보일 뿐이다.  

        

<3>부대원들, 암살에 실패한 특수부대 요원, CNN 종군기자 등 

  모두가 원작 소설 속 커츠를 존경하고 따르던 러시아인 청년의 변형이다. 그러나 변형에 실패한 인물들이다.

  여러 곳을 떠돌다가 콩고 정착지에 온 러시아 청년은 오직 커츠의 놀라운 성과에 대해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다. 커츠가 상아 수집을 위해 저지르는 잔악한 착취와 약탈과 살인에는 관심도 없고 무감각하다.      

  영화는 원작 소설과 다른 이념전쟁 상황 속에 러시아 청년 변형에 실패하고 있다. 

  이들이 커츠 대령을 따르는 이유가 원시적 공포와 이념전쟁의 무의미함 그리고 인간성 파괴라고 하더라도 어떤 관객도 설득되지 않는 감독의 억지이고 망상일 뿐이다.


<4> 커츠 대령

  커츠 대령 역시 변형에 실패한 인물이다. 나아가 감독의 관념이 만든 억지 창작이기도 하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상아 수집에 유능했던 원작 소설 속 커츠를 충실하게 베끼기 위해서 커츠 대령을 미국 육사를 졸업하고 하바드 석사, 6.25참전, 공수학교 졸업, 특수작전부대 지휘 등 경력을 화려하게 치장한다.      

  그리고 커츠 대령은 영화 마지막 부분 윌러드 대위와의 대화에서 원주민 아이들에게 미군이 예방주사를 놓아 주었더니 월맹군이 와서 아이들 팔을 잘랐고 그 잘린 팔들이 쌓여있었다고 하며 마치 그것이 부대를 이끌고 탈영해서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자신의 왕국을 만든 자각의 이유였다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의 무대인 19세기 콩고에서는 상아와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들의 팔과 손을 잘라 쌓아놓았었다. 심지어 벨기에 식민지배 당시 콩고 인구의 절반이 죽었던 것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커츠 대령의 자각은 어설픈 원시적 공포를 내세운 감독의 관념이고 억지일 뿐이다. 

    

 <4-1>커츠 대령의 왕국     

  영화 속 아이들 팔을 자르는 행위는 어떤 전쟁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잔악하고 끔찍한 전쟁범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촉망받는 군인으로 한국전쟁까지 참전했던 커츠 대령이 부대를 이끌고 탈영해서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자신의 왕국을 만드는 이유라고 하는 것은 원작과 영화의 시대적 차이와 또한 현실과 관념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감독의 공상이고 관념적 억지이다. 

  특히 순수 공포, 원초적 공포를 느꼈다는 등의 관념적인 대사 몇 마디가 왕국을 만드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어리석게도 모른다.

  또한 커츠 대령이 베트남에서 미군의 실책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여 상층부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 내용이 워낙 비판적이라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경악했다고 한다. 는 등을 밝히지만, 타당성 없는 논리를 가리려는 잔기술이다. 

  여기에 더해 영화 앞부분에서 코먼 중장은 윌러드에게 커츠를 설명하면서 미쳐버린 정신 이상자라고 한다. 한계점에 이르러 그것을 넘어버렸다는 둥, 커츠 대령의 자각과 탈영의 이유를 보완하려는 감독의 얄팍한 수작을 널어놓는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부분에 윌러드 역시 커츠에게 “당신은 미쳤어”라고 외친다.      


  다만 커츠 대령이 왕국을 세운 이유가 이념전쟁은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비극적인 사회를 만들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천해서 보여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원작 소설이 비판 받는 백인의 일방적인 관점과 다르지 않게 오직 미군의 관점에만 갇혀있다. 더욱 설득력이 없다.   


        

Ⅳ현실과 관념의 차이


  원작 소설은 19세기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바탕으로 벨기에 식민지 콩고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는 월남전이라는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전쟁에 뿌리를 둔 이념전쟁이 바탕인 듯하지만, 사실은 감독의 공상과 관념의 영화이다. 

  즉 원작 소설은 광기에 찬 제국주의 식민지배라는 현실에 뿌리를 둔 작품이고, 영화는 무의미한 이념전쟁의 광기와 살상과 인간성 파괴라는 관념에 뿌리는 둔 작품이다. 

  그런데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현실과 관념이 뒤섞여 타당성과 논리가 무너져 헝클어진 영화를 오직 화려한 영화 기술로 관객에게 동의하라고 강요하고 억지를 부리기만 한다.  


         

Ⅴ 결론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 영화가 아니다. 더구나 월남전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패권을 차지하려는 이념과 이념 세력의 대결과 폭력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이념 세력의 폭력은 언제나 발전과 평화와 행복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살인과 약탈, 인간성 파괴뿐인, 원시적 공포가 지배하는 지옥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어설프게 말하는 포르노보다 못한 실패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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