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늦가을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역 앞 광장에서 비둘기들이 모이를 찾느라 무리를 지어 모였다가는 흩어지고 있었죠. 하얼빈 역에는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이제 막 1번 플랫폼에는 열차가 들어와 멎었어요. 그 시각 한 사내가 역 대합실의 찻집에서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죠. 플랫폼에 멈춘 열차는 여전히 헐떡거리는 개처럼 씩씩거렸어요. 열차에서 품어져 나온 수증기가 1번 플랫폼을 가득 채웠지요. 허옇게 뿜어져 나온 수증기 속에서 무장한 의장군병들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러시아와 청나라의 의장병들이었어요. 썰매를 끌고 온 개처럼 헐떡거리던 열차는 몇 번인가 기적을 울려대고는 심장을 내던져버렸는지 이내 조용해졌답니다. 플랫폼 위 하늘에서는 늦가을 아침 햇살이 회적빛으로 뿌연 대기를 마저 밀어내고 있었지요.
이토 히로부미는 북큐슈를 떠나 항로로 만주땅에 도착해서 지체 없이 하얼빈으로 이동했어요. 블라디미르 코콥초프는 이토 히로부미를 성대하게 환영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가지고 온 선물꾸러미에 대한 적절한 환대는 필요하다는 것이 러시아정부의 판단인 셈이었지요. 블라디미르 코콥초프는 이제 막 멈춰 선 열차객실 안으로 들어섰어요. 그 안에서 러시아의 재무상인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약 이십 분가량 담화를 나누었지요. 외교의 절차에 준한 통례적 인사말과 본격적인 회담에서 나눠야 할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나눈 듯했어요. 이야기를 마친 그들은 알 수 없는 각자의 미소를 머금은 채 수행원들과 함께 하얼빈 1번 플랫폼으로 나왔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양 옆으로 정렬해 있는 러시아 의장대 속을 천천히 걸어 나갔어요. 그러면서 조금 앞서서 의장대 중앙으로 걸어가 그를 기다리는 러시아 재무상의 장대 같은 키가 1번 플랫폼 끝에서 유독 길쭉하게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대합실 찻집에서 의장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1번 플랫폼에 도열해 있는 의장대 뒤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 섞였답니다. 그의 두 눈은 좌우로 늘어선 의장대 사이를 걸어오고 있는 무리 중 한 사람에게 집중했어요. 외투 오른쪽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오른손에는 칠 연발식 권총이 쥐어져 있었지요. 오른손 검지에 매끈한 금속의 방아쇠가 감겨 있는 것을 다시 한번 감지했지요.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이 준비해 온 회담문서를 저 장대 같은 녀석에게 전달만 해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지요. 왠지 초대내각의 총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을 응축시킨 그 야심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그때가 메이지유신의 원훈이 된 이후 은연중에 자신의 힘을 세계에 과시해 오고 있는 지금보다 더 격정적이었다고 느껴졌어요. 그러자 거칠 것 없는 거만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싶을 지경이었지요. 의장대 중앙에서 알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의 얼굴 윤곽이 눈에 들어올 즈음, 이토 히로부미는 정말 저 녀석의 키가 어찌 된 일인지 더욱 길쭉하게 보인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어요. 그 순간 오른쪽 의장대 뒤편에서 군중 속을 헤집고 곧바로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어요. 그 사람의 걸음걸이는 마치 바람처럼 부드러웠던지 자신의 수행원들도 그의 움직임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지요.
블라디미르 코콥초프는 오 년 전에 자신의 나라를 무력으로 밀어붙이던 일본을 잠깐 떠올렸어요. 그리고 그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 손안에 넣고 조물거리는 거만한 저 늙은 너구리를 어떻게 달래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요. 그렇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러시아는 조선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헛힘만 쓴 꼴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바심만은 지워버리자고 다독거리고 있었지요. 뒷짐을 지고 뒤뚱거리듯 걸어오는 늙은 너구리가 지나치게 거만하여 기분을 상하게까지 하였어요. 그렇지만 그는 특유의 호탕함을 드러내 보이기로 작정했지요. 그때 누군가가 의장대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것이 보였지요. 그가 늙은 너구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시월의 늦은 가을, 아침바람 한 줄기가 그곳에서 회오리를 치는 것이 보였답니다.
러시아 의장대 뒤, 군중 속에 서 있던 그의 두 눈은 도열해 있는 의장대 사이를 걸어오고 있는 황군제복의 무리를 주시했어요. 그들 중에 흰 수염을 기른 늙은이를 놓치지 않고 쫓았어요. 조선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는 거짓말을 세계에 퍼뜨려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해 버린 오만방자한 늙은이였어요. 그 늙은이를 마침내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에 그는 눈을 한시도 뗄 수 없었어요. 며칠 전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동지가 만주에 온 저 늙은이의 행적을 쫓아 열차의 교환지역인 채가구역에서 그를 제거하려 했지요. 허지만 순찰 중인 러시아 헌병에게 발각되고 말았어요.
그는 그것을 상기했지요. 정말이지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두고두고 천추의 한으로 남을 터이기에 그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검지로 방아쇠를 감고 있는 오른손은 여전히 외투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어요. 늙은이를 수행한 무리가 의장대의 중앙에 다다르는 순간 그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답니다. 칠 연발식 권총의 방아쇠를 감고 있는 오른손 검지 끝에 약간의 땀이 흘렀고 매끈한 금속성 손잡이는 손바닥 안에 깊게 감겨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요. 그들과 다섯 걸음정도의 거리라고 생각되는 순간 그는 권총을 꺼내 들었어요. 황군제복의 늙은이를 향해 정확하게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지요. 탕.
이토 히로부미는 장대 같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의 웃고 있는 얼굴 윤곽이 보이는 순간, 바람 사이에서 곧바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본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내 고막을 가르는 굉음 하나를 들었어요. 자신의 오래된 몸에 그 소리가 꿰뚫고 들어오면서 뜨거움이 느껴졌고 마침내 그것은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찰나의 시간이었어요. 이내 곧바로 두 번째, 세 번째 굉음이 울렸지만 그 소리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탕. 탕.
세발의 총성이 하얼빈 1번 플랫폼 하늘 위로 퍼져 올랐어요. 황군제복의 늙은이는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을 애써 감췄던 표정을 무너뜨리며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를 토해냈지요. 이내 무릎이 꺾이면서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지요. 그는 다시 방아쇠에 검지를 감았어요. 쓰러진 황군제복의 늙은이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했어요. 그와 비슷해 보이는 세 명의 늙은 수행원을 향해 각각 한 발씩 방아쇠를 당겼지요. 탕. 탕. 탕. 마지막 한 발을 남긴 칠 연발식 권총을 그는 쓰러진 그들 위에 던지고는 외쳤답니다.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
하얼빈의 가을 아침, 하얼빈 역사 앞 광장의 비둘기 떼가 아침 모이를 먹기 위해 몰려다닌 가을날 아침이었죠. 그가 그 아침의 하늘을 향해 대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을 때 러시아 헌병들이 달려와 그를 체포했답니다. 체포직전 잠깐동안 거친 몸싸움이 있었어요. 그렇게 그들이 그를 포박하는 사이 그가 입고 있는 외투의 세 번째 단추 하나가 떨어지면서 플랫폼바닥으로 굴렀어요. 러시아 헌병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그의 얼굴은 고요한 수면을 만든 호수처럼 미동도 없었어요. 한그루 소나무가 깊은 뿌리를 내린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했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했는지 짧은 순간 혼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플랫폼의 수많은 사람들도 일제히 그를 바라보느라 한순간 넋이 빠져나가 버렸지요.
그때 그의 모습은 이러했답니다. 이제 막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아이들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한 가장을 보고 있는 듯했어요. 한편으로는 가장의 넓은 가슴 안으로 안겨 들어오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려주려는 듯 두 팔을 활짝 열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는 듯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