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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09. 2024

찬연한 아름다움

  퇴근 후 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레드를 생각했다. 저쪽으로부터는 아직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민홍섭에게 정한진흥건설과 관계된 이야기를 전달한 지도 삼 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하여 그동안 계획했던 작업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로 할지 모른다. 이쪽에서는 다만 기다리면 될 뿐이다. 머지않아 그들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다. 

     

  오 층 병실에서는 저 멀리 소도시의 시가지가 바라다 보였다. 누군가가 새로 가지고 온 장미꽃다발이 싱그러운 향기를 은근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레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언뜻 정지현이 느껴졌다. 이틀이 지나면서 그녀는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평온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 의사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환자시군요. 침대 위에 꼼짝 말고 누워있으라고 하던데.

  내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그녀가 웃음을 보였다. 거기에 <조앙ㆍ마두>의 마담과 한호정이 동시에 웃고 있었다. 자매들의 모습이 모두들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병원의 의사보다는 지금 오신 분이 정말 의사 같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한 사람 더 있죠. 언니 말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농담을 맞받는 것으로 보아 이틀 동안 마음의 평정을 찾아 걸어갔던 것 같다. 아직 병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사려가 깊고, 침착한 예전의 매력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견딜 수 없도록 그녀의 갈망을 쫓게 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서조차 깊은 사려를 감추듯 드러내 보일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처럼 사려 깊은 그녀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이 상황이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왜일까. 어쩌면 그것은 마담이 말한 대로 그녀의 갈망은 깊어서 누군가가 막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분명 자신이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결말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침착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짚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들과의 관계도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손끝에서 느껴졌던 깊은 사려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모든 결말을 알고 있는 그 길을 선택할 때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내가 어리석지? 그렇지만 지금은 그쪽 보스가 나를 필요로 한가 봐. 물론 나도 그 보스의 조건들이 필요로 하구. 그때는 마담이 소도시에서 비로소 등대와 같은 등불 하나를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을 한지 이 년이 되고 있을 때였다. 정말이지 자신의 남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추구했을 때, 마담은 화려했고 빛이 났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햇살 하나가 수정 위에 떨어지듯 격렬하게 아름답던 그때, 그녀는 인생의 절정에 있었다. 거기까지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 아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건 사랑이었을 테지만, 남자는 그녀가 격렬하게 아름다울 때까지만 그녀가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남자는 자신의 야망에서 작열하는 미소를 뽑아 그녀의 가슴에 꽂았다. 그녀의 찬연한 아름다움은 수정 위에 머물던 햇살이 사라지듯 꺾였다. 뒤늦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책망했다. 혹시 자신이 남자를 통하여 모든 것을 추구하려고 한 허영심을 품고 있지 않았나 하는 그와 같은 경박스러움도 되짚어 보았다. 마치 유치한 사랑 같아서 웃음도 나왔다. 결국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었다. 그녀의 가슴에 깊숙이 꽂혀있는 남자의 미소를 지워내야만 했다. 남자는 자신의 야망을 쫓았고, 그것은 너무 뜨거웠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그가 언젠가는 펑 소리와 함께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나버려야 한다고 분노했다. 허지만 그런 분노조차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새로운 삶을 선택했을 때 거기에 이 소도시가 있었다. 이년이 지났을 때 그때는 그녀의 과거도 사라져 있었다. 

  어느 날, 동생은 사라져 버린 그 공간을 채우듯이 돌아와 있었다. 사업이 번창하고, 너무 바쁠 때여서 동생의 존재에 대해 잊고 지냈다. 동생은 동생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시절 문득문득 저 애에게는 깊은 우물이 하나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녀가 소도시에 카페를 하나 더 갖게 되던 해에 동생이 어느 날 늦은 밤에 돌아와 말을 꺼낸 것이다. 나도 그 보스의 조건이 필요로 하구. 동생의 담담한 눈을 바라다보았다. 마담은 깊고 푸른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동생의 결정은 위험했지만 그때 마담에게 자신의 과거가 되살아났다. 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 관계란 선택이고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칠한 그림자가 아닐까? 이것을 저 애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안 돼. 나는 너를 믿지만 믿는 그것이 모든 것은 될 수 없구나. 너는 내게 오기 전까지 나 못지않게 지쳐있었고, 아직은 많은 시간을 쉬어야만 해. 인생은 때때로 쉬어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 물론 동생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잠시 밤의 허공을 맴돌다가는 사그라져 버렸다. 허무란 이렇듯 가까운 곳에도 있는 것이었다. 

     

  동생은 목소리가 아름다웠어요. 항상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그곳에 묻어두었죠. 목이 굵은 남자는 더러운 돈이 많았고, 동생은 자신의 노래를 팔았어요. <붉은 풍차>를 동생이 항상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목이 굵은 남자가 동생에게 선물을 하더군요.  

    

  마담의 말에 의하면 레드는 그들에게는 대단히 값어치가 있는 존재였다. 레드가 <붉은 풍차>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선한 이미지와 그녀의 노래가 잘 어울리자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샹송은 손님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그녀가 노래를 하는 시각에는 넓은 홀 어디에고 빈 테이블이 없었다. 그들이 취급하는 양주는 불티가 나게 팔려나갔고, 그러한 레드를 잡아두기 위해 그들은 목이 굵은 남자가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레드는 목이 굵은 남자의 배경을 받고 한순간에 이름 그대로 붉게 피어났다. <붉은 풍차>를 찾는 모든 손님들에게는 연인으로, 그들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목 굵은 남자에게는 애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보스는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게걸스럽다고 동생은 농담으로 말하곤 했다고 그 늙은이, 아니 목 굵은 남자에 대해서 마담은 말했다.   

   

  그들이 보궐선거에 눈을 돌릴 때 거기에 소요된 경비 상당 부분은 <붉은 풍차>에서 쏟아져 나왔을 거라고 마담이 말했다. 

  - 언니, 어리석은 내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보스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처럼 빠르게 판단을 내릴 줄은 몰랐어. 그가 성공하면 나는 그만큼 빨리 실패할 거야.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내 인생을 건만큼 결코 빈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거야. 


  언젠가 동생이 이 말을 했을 때 마담은 저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아, 이 애는 너무도 힘겨운 싸움을 아직도 하고 있구나. 아, 호정아.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고 뛰어든 승부에서 레드는 자신보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이는 주변 상황에 당황했던 것 같다. 

  -언니, 언젠가는 내가 보스를 위해 나 자신을 버릴 거야. 보스는 욕망을 위해서 나를 선택했지만, 나는 보스를 위해서 내 길을 선택했어. 보스를 위해 나를 버릴 거야.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그것이 두렵지는 않아. 내가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면 이런 관계를 생각이나 했겠어? 언니, 결과가 이미 예견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분명한 게 하나 있다? 거기서는 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그것을 쫓고 있어. 내가 선택할 당시에는 시간이 충분했었는데, 그 사람의 욕망이 시간을 단축시켜 버렸어. 그렇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스스로에게 지고 싶지 않아. 나에게 지면 나는 끝장나는 거야. 


  레드가 자신에게 지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하자 마담은 동생이 갈망하는 그 끝이 커다란 돌이 되어 가슴께로 내 던져지는 것을 느껴졌다. 저 애는 자신을 더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동생에게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저 애에게 유일한 것일 테니까.     

 

  - 앞으로 며칠만 지나면 의사처럼 보이고 있는 이 사람은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나야 돌팔이니까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 언젠가 처음 뵈었을 때도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감추지 못하시더니... 감사해요. 제가 많은 신세를 지는 것 같습니다. 언니가 이야기해서 알았습니다. 우리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참,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선생님, 선생님께는 너무 정직한 마음이 간직되어 있어서 모든 것을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너무 걱정이 돼요.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맑고 예쁜 눈 가득히 고마움의 표정을 나타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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