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흥이라고 그랬다. 정한진흥건설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정지현에게서 온 전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전화는 뜻밖에도 정한진흥건설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 정진흥입니다. 이 사람에게 연락이 먼저 왔어요.
-...
그들이 정한진흥건설에 먼저 연락을 해왔다. 정진흥. 마담, 아니 자매들이 한때는 아빠라고 부르던 사장은 자신의 이름을 내게 말하면서 저쪽에서 소식이 왔다고 말했다. 한호정, 아니 레드가 병원에 입원한 지 엿새째 되던 날이었다. 그쪽의 늙은이, 레드의 표현에 의하면 보스가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지저분한 늙은이가 보기 좋게 투항해 온 것일까? 나는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그 지저분한 늙은이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가지고 여태껏 그렇게 설쳐댔단 말인가.
- 진 선생님, 도움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정한진흥건설 사장은 저쪽의 연락을 받고 한호정, 자신의 딸에 대한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내게 고마움을 말했다.
정한진흥건설은 아버지가 가꾸고 싶어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체랍니다. 내가 정지현 씨의 도움이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다고 하던 날,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담담한 기억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언니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한정현, 호정이랍니다. 저는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고요.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난 후, 바로 회사의 이름을 정한진흥건설이라고 바꿨답니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건축물에도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일본을 다녀오시더니 특히 그쪽의 건축물에 대해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그때 제 생각이었는데 튼튼하고 아기자기한 일본 건축물은 아버지께는 가족을 의미하는, 아마도 그와 같은 상징물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쪽 사업도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심정에서 늦게나마 그쪽 공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고 흔들의자에 앉아 계실 때면 늘 말씀하시고는 했답니다.
정한진흥건설의 사장 전화를 받고 난 후 나는 민홍섭을 생각했다. 민홍섭이 그의 의사를 굳혔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의 결정은 그쪽의 결정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그쪽의 목 굵은 늙은이가 마지막 결정을 할 터이지만. 그의 이마에 선명한 한 줄의 주름살이 떠올랐다. 그가 이처럼 결정을 선택했다는데 대해서 인간적인 연민이 밀려들었다. 그가 나에게도 머지않아 연락을 해 올 것이다.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연민이 밀려들었다. 그러자 오후 내내 좀처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때때로 신뢰감을 주던 그의 저음이 생각났다. 굵은 한 줄기 주름살이 선명한 이마, 거기에 두꺼운 손의 장력을 느끼게 하던 민홍섭이 생각나고는 했던 것이다. 퇴근 무렵에서야 나는 그의 생각을 지울 수가 있었다. 창문 밖으로 연녹색 나무 잎들이 뾰족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지금쯤 회복되어 있을 레드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꽃다발을 들고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레드와 또 하나의 레드가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창문을 배경으로 거기에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레드는 노을빛을 받은 붉은 미소가 얼굴 가득히 물들어 있었고, 노란색 투피스 차림의 또 다른 레드는 두 눈 안에 떨어지는 붉은 노을을 담뿍 받아 안고 있었다. 나는 노을빛 속에 그렇게 물들어 있는 그들을 우두커니 선 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붉게 떨어지는 노을 속에서 빛줄기 하나가 그네들의 어깨를 따라 조용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 환자를 진료하러 오셨군요. 선생님의 진료를 다 받기 전에 퇴원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한호정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있는 동생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 우리 너무 닮지 않았나요?
나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제 동생이랍니다. 쌍둥이죠. 제가 햇볕을 조금 빨리 봤을 뿐이에요.
그녀는 동생의 손을 잡으며 내게 말했다.
- 얼굴이 닮은 사람이 두 사람이라서 어떤 사람이 내 진찰을 받아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환자복을 입고 있는 분이 아직은 환잔가 보군요.
내 말에 노란색 옷이 노을에 부딪혀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던 정지현이 눈에다가 미소를 그려 보였다.
- 언니가 지현이에게 연락을 했나 봐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을 지현이에게 보이고 말았어요.
호정이 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을 안 했습니다. 어쩌면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작은언니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나눈 기억이 없답니다. 내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는 날이었는데 작은언니는 또 흠뻑 젖어서 들어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니는 어릴 때부터 항상 비가 오는 날에는 젖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때마다 몇 번인가 왜 비를 맞고 들어오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않고 내 눈만 들여다보았어요. 그럴 때면 나는 막막했고, 작은언니가 두려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너무도 막막해서 막 울어버리려고 하던 참에 작은언니가 지붕 끝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애잔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나 있잖아. 이렇게 씻어내려고 해도 안 씻어져. 이렇게 비를 맞아도 말이야. 아빠가 내 마음속에 너무 깊이 잠겨 들어와 있어서. 잘 안 돼. 그것이 너무도 슬프거든? 씻어 내버리려고. 정말 그것을 씻어 내버리려고 비를 맞아. 늘. 울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제는 이것도 안 돼. 작은언니에게서 처음으로 아빠라는 말이 나왔을 때, 아, 저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정말로 그리워했던 사람은 바로 작은언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닫아놓고 있었던 울음이 내 몸속에서 마구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작은언니가 말했습니다. 나, 앞으로는 비 맞지 않을 거야.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리고 앞으로는 내 마음에서 씻어내야 할 아빠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야. 아마도 그날, 작은언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언니는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 정말이지, 환자 분은 이제 진료가 필요 없겠습니다. 바로 곧 퇴원수속을 밟으시지요?
내가 웃으면서 말을 하자 레드는 짐짓 놀라는 채 하면서 그럼 의사 선생님을 다시는 볼 수 없나요 라며 웃었다. 나는 자매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왔다. 거리에는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연초록으로 깊어지고 있는 가로수는 불빛을 받아 안락한 표정으로 밤을 만나는 중이었다. 참 평온한 밤거리라고 생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