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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08. 2024

벗꽃들이 흰 소금처럼 피어나 바람결에 날리고

  그때, 거의 일주일 동안 나는 직장의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니 직장의 업무에서 손을 떼고, 그 일주일 동안 누군가를 만나기도 했다. 직장의 동료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를 이해해 주고 일을 대신해 주었다.   

   

  창밖으로는 벚꽃이 한창이었다. 소도시는 온통 겨울날의 눈꽃처럼 피어난 이 꽃 속에 파묻혀 버렸다. 화창한 태양아래서 작은 도시가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벚꽃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 위로 꽃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따뜻한 태양 빛 아래서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얼굴을 터뜨린 꽃잎들은 쉴 사이 없이 떨어졌다. 난난분분. 난난분분.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린 꽃잎들이 도시의 거리를 뒤덮었다.    

  

  벚꽃에 덮인 주말이 시작되던 그날, 나는 민홍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도 한호정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사소한 일 한 가지라도 정확하게 처리되지 못하면 좀처럼 회복할 수 없는 저 추락의 지대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완벽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참을성이 돋보여야 할 일들도 있는 법이었다. 그들이 처리하고자 하는 이 일은 어쩌면 그네들의 인내와 관계된 일 중 하나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성싶었다. 

    

  이런 내 생각은 정확했다. 일주일 동안 나는 여기에 관계된 것만을 생각하며 여기에서 모든 가능성과 타협점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을 굳히고 있었다. 내 판단의 선은 명확했다. 조직의 심장부, 즉 핵심 인물 이외는 절대로 다른 목표를 두지 말 것. 두 번째로 희생을 하나쯤 치를 것. 희생의 대가는 사람이어야 할 것. 그러면 다음 일은 내가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권력을 지켜가기 위해서 권력을 획득할 때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로 한다. 거기에 그들의 약점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명확하게 읽고 있었다. 여기까지 이르는데 적어도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밝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나는 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그 얼굴은 결국 내가 자신의 안목에서 비켜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그와 같은 확신을, 확인하는 절차만 남았다는 그런 자신감이 넉넉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과신할 정도로 그는 조급해져 있다는 것이 느껴져 왔다. 사람은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평정심을 흔들어 낼 줄 아는 그였다. 그렇듯 완벽했던 그가 이번 일을 처리하는데 확실히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이러한 자신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구상한 윤곽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아무리 완벽한 사람일지라도 희열을 느끼게 돼있다. 그 희열이 본원의 목표를 잠깐 가리는 사이에 조그만 틈새가 생기는 법이다. 지금 그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는 머지않아 흥분하게 될 것이고, 마지막 순간에는 냉정함을 잃을 것이다. 그가 그처럼 냉철함을 상실했을 때 모든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얻었던 그 이상으로 여러 가지를 잃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모르긴 해도 지금과 같은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밑바닥부터 걸어 나와야 하고, 그렇게 단번에 잃어버린 그것들을 다시 회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앞으로 이십 년 후의 일이나 될 것이다. 분명히. 물론 이십 년 후, 지난날의 영화를 다시 회복한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 정한진흥건설회사를 아십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을 약간 다물지 못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정한진흥건설이라는 명칭에 대해 충격을 받은 듯 미동을 보였다. 그의 앉은 자세가 소파 깊숙이 잠겨 들었다. 


  - 물론 내가 서투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무언가를 놓쳐버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이번 일을 서둘러 처리하려 했던 자신에 대한 뒤돌아봄과 예기치 못했던 내 쪽의 움직임에 당황한 기색이 반반쯤 뒤섞였다. 그리고 분명하게 구분 지어졌던 잘 계획되었던 시간의 경계들이 어쩐지 황망히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도 거기에 뒤섞였다.   


  - 당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협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에게는 힘이 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경계심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것을 드러내 보이면서 다가올 때 사람들은 절망을 느낍니다. 한호정 씨의 자매분도 지금 그러리란 것을 아실 것입니다.

  -...

  나는 그네들이 곧잘 등에 업는, 그 정치적인 힘을 구태여 당신들의 기득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그것을 들추어낼 필요는 없었지만 달리 그들의 세상에 어울리는 다른 단어는 또 없었던 것이다.  

  - 당신들이 지니고 있는 그것이 타당성을 지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동조를 하고 감동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등을 돌리고, 혐오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상황을 한 번쯤 진지하게 되짚어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만은 덧붙이지 않았다. 

  -...

  그가 묻혀있는 소파는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생각하지도 못했던 역습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는 자신을 그저 추스르고 있는 것 같았다. 


  - 그쪽의 의원님과 한호정 씨의 시작은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할 테지요. 그리고 시작처럼 끝도 그러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 이제는 오히려 무의미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한호정 씨는 그쪽의 모든 도화선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그쪽의 어느 긴급한 사안보다도 한 여인을 우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님께 전해 주십시오. 정한진흥건설이 한호정 씨와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요. 정한진흥건설 즉, 당신들의 동지란 때때로 정략적인 면이 다를 때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략적인 측면이 당신들의 세상 속에 얼굴을 내민다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이 어느 쪽인가는 의원님이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저는 최악의 상황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피차가 상처만 남을 테니까요. 이에 대한 역할은 당신이 가지고 있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신의 조정역할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룩해 놓고 있는 조직을 존중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모든 것이 응집된 결정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아주 좁아졌습니다. 당신의 역할에 여하에 따라 나는 협조할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해 줄 이야기를 다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일어설 차례가 되었다. 내가 여기를 떠나면 아마도 그는 내가 던져 논 옥죄임에 흥분을 가누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잠깐이기를 바라지만. 그는 내가 보는 안목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그런 무모함을 결단코 드러내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허지만 모를 일이다. 냉철함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최악의 상황보다는 파멸을 원치 않았던가? 고통으로 끙끙거리며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단번에 모든 것을 끝장내고자 하는 심경으로.    

  

  정한진흥건설회사에 들어섰을 때 사장은 출장지에서 막 돌아와 있었다. 마담과 레드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자 일은 생각보다 진척이 빨랐다. 보름이상을 계획하고 있었던 일이었다.(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일임이 분명했다) 그쪽의 자금줄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민주자유연합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그동안 발행된 자료들을 검색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지면으로 나온 이삼 년 전의 자료를 찾아갔다. 하진지역에 관계된 자료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수집했다. 물론 중앙당과 지역구와의 연결 관계도 빠뜨릴 수 없었다. 특히 재계와 연결된 고리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살폈다. 삼일 째 되던 날, 우연한 단서 하나가 내 주의를 끌었다. 이년 전 하진지역 일대의 지방도로 확장공사에 정한진흥건설회사가 착공을 시작해서 앞으로 일 년 후에 완공된다는 자료가 있었다. 중앙당에서 발행한 신문과 지방의 일간 신문의 자료를 검색해서 그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 마담이 동생 한호정과 다른 쌍둥이 동생을 말했을 때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지현. 정지현. 나는 사무실에서 마담과 한호정, 그 자매들을 생각하며 그녀의 서류를 몇 번이고 읽었다. 거기에 적혀 있던 정한진흥건설회사. 그렇다. 정한진흥건설회사. 정지현 씨가 근무하는 정한진흥건설회사가 바로 이 회사와 동일한 회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정확한 단서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나는 가슴 깊숙이 전율을 느꼈다. 

     

  정한진흥건설. 회사는 하진지역을 포함한 인근 백여 킬로미터 지역 내의 열세 개 지역에서 건설업계의 선두주자였다. 거기에는 여섯 곳의 지역 선거구가 포함되어 있었고, 하진지역구는 그중 한 곳이었다. 나는 일이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풀려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민홍섭 쪽에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완료하는 시기는 적어도 육 개월, 즉 지역구의원 선거일까지는 아직 시간은 충분했지만 이번 일의 결과에 대한 모든 것은 불투명해서 정확한 단서 하나를 집어낸다는 것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진 작은 금 조각을 찾아내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꼭 필요한 단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되어 준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풀려나가게 됐다는 사실이 내 모든 지각을 고무시켜 주었다. 나는 서류에 적혀있던 전화번호를 메모한 수첩을 뒤적였다.   

    

  평온한 불빛이 음악과 함께 흐르고 있는 실내에는 몇몇 사람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퇴근이 끝나면 바로 가겠노라고 했는데 이미 창가 빈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어스름이 오고 있는 푸르스름한 하늘이 넓은 유리로 된 창문 가득히 비치고 있었다. 미소가 없는 얼굴 안에서 예쁜 눈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어깨를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 있다면 그녀는 레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언니들을 만난 것은 몇 년 전 이곳에 와서 한 번 있었습니다. 그때 아마 호정이 언니가 큰언니와 함께 다시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언니들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큰언니가 제게 말했답니다. 너는 곱게 자라주었구나. 연락은 내가 했다만,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또 얼마나 소식 없이 지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는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서로 가까운 곳에서 지내게 됐구나. 그렇지만 서운하더라도 서로가 예전에 결정했던 것처럼 살아가는 거다. 그게 우리 자신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일 테니까. 지현아, 네 말처럼 헤어지는 것은 아니잖니? 언젠가는 분명 모든 것을 잊고 만나서 생활할 때가 있을 테니까. 그 후로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선생님께서 언니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듣고 놀랐습니다. 지금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제게는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두고 이 일을 처리할 거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막상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소용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고 말했다. 혼란스럽겠지만, 당분간은 예전처럼 언니들에게 연락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장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당신께서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분께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라고 말을 마쳤을 때 그녀의 예쁜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건설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까지는 소도시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비서의 안내를 받은 나는 사장실에서 이제 막 출장지에서 돌아온 그를 만났다. 그는 눈에 띄게 젊어 보였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의욕이 넘쳐흐르는 눈은 자신감의 또 다른 상징처럼 여겨졌다. 


  - 애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앉으시지요.

  나는 그가 권하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앉혔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딸들과 헤어졌고, 이제 막 그런 딸들의 소식을 가지고 온 낯선 사내. 더군다나 사내는 하진지역의 의원과 관계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왔단다. 그는 아마도 나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겉으로는 드러내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추스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한현정 씨 자매에게 이미 시작되고 있는 정말 멍청한 그들의 계획을 중단시키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현 의원과 지역구 부위원장은 그들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 유치한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호정 씨가 있습니다. 선거구민들에게 드러날지 모르는 그들의 어두운 이력을 감쪽같이 바꾸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한호정 씨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그들이 일컫는 이 새로운 이미지로 승부를 걸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잠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일이란 그가 인생에서 보편적으로 보아온 다반사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 이상은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이미 모든 생각을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그의 표정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 그는 지금까지의 사업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자신만을 신뢰해야 할 순간들을 수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의 그도 완성된 것이리라. 나는 이러한 내 판단에 의지하기로 했다.

      

  - 다시 하진지역의 의원 쪽을 만나시게 되면 말씀해 주시지요. 앞으로의 관계가 원만해지기를 바란다면 당신의 말대로 유치한 장난, 그것을 거두라고요. 그리고... 그 애들이 그저 잘 지냈으면 좋겠군요.


  육일 째 되는 날 그 오후, 정한진흥건설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내일 그쪽에 전화를 해줄 때가 왔다고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도로변에는 만발하기 시작하는 벚꽃들이 흰 소금처럼 피어나 바람결에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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