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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06. 2024

쌍둥이

  그는 그와 같은 일을 처리하는데 이미 프로였고, 나는 그러한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 이외는 더 이상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은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심장을 감싸 안은 내 육체가 서서히 미동 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 작은 움직임 안에서 이 진부한 일의 방향에 대한 선택의 열쇠가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허비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나는 다음의 주말을 선택했다. <조앙ㆍ마두>의 마담도, 레드도 이제 뒤집어놓아 쏟아지기 시작하는 모래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일 것이다. 좁다란 바늘구멍과 같은 통로를 통해 쏟아지기 시작하는 모래시계는, 물론 그들이 그 자매에게 내민 조건이 전제된 몇몇 개의 물건과 함께 보내진 물품 중 하나일 테지만. 나는 조용히 두 자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거기에 쏟아지는 모래시계가 차츰 겹쳐졌다. 

     

  다음의 주말 석양까지 팔일동안, 나는 내 생활의 대부분을 건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석양이 지고, 또 그렇게 밤이 오는 것을 보면서 보냈다. 팔일째 석양의 마지막 노을을 등에 받으며 들어선 <조앙ㆍ마두>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마담이 바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테이블의 빈자리에는 깊은 침묵만이 앉아 있었다. 손님은 없었다. 


  나는 바 앞에 앉았다. 마담의 옆얼굴에서 담배연기가 몇 줄기 풀어지면서 허공으로 번져 나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마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미안해요.

  마담의 깊은 눈매에 촘촘히 깃든 그늘이 며칠 동안 그녀가 보낸 시간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난겨울에 나는 보았다. 아마도 그즈음부터 마담은 오늘이 오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예견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기다리는 시간이란 무모한 모험을 하는, 그 부질없는 것처럼 참담한 것이다. 이것의 공통점은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는 점이다.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사람의 가슴을 단련시킨다. 저 절실함이란 비로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 깊은 곳에다 단련시켜 준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가는 법을 익힌다. 달리 도리가 없는 것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만 그들의 세월만이 바람결에 쓸려 다닐 뿐이다. 


  - 괜찮아요. 

  레드, 아니 그녀의 동생이 오늘 전화를 했다고 마담이 말했다. 그 애는 자신이 만난 세상을 포기할 아이는 아니에요. 차라리 포기할 바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더 바래요. 그 애의 갈망을 억제할 수는 없군요. 그것이 그 애의 전부일 테니까요라고 말하는 마담의 눈길에는 많은 것이 사라져 가고 있는 듯했다. 


  - 다시는 이런 일을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부질없었나 봐요.

  그녀의 얼굴에서는 지난 세월의 응고된 상처들이 유리파편처럼 흩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동안 견고하게 유지해 왔던 그녀의 감정들이, 떠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절박할 때 나는 항상 잘 견뎌왔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좀처럼 보이질 않았나 봐요. 그렇지만 동생의 일은 그렇게 안 되는군요. 

     

  <조앙ㆍ마두>를 나왔을 때 짙은 어둠 속에는 거리의 네온사인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 빛이라도 없었더라면 나는 침묵으로 가라앉은 내 몸을 어디에 맡겨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듯이 반짝거리는 네온사인들이 정말이지 위안이 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밤의 풍경이었다. 야화(夜花)라고 이름을 붙여본 그네들이 뒤엉켜져 욱신거리는 내 정신 위에서 바람에 나풀대는 들꽃처럼 재잘거렸다. 어딜 갔다 왔어요. 어딜 갔다 왔어요. 우습잖아요. 우습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밤의 나그네. 밤의 나그네. 내 목소리가 들리면 돌아오세요. 내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물기가 조금씩 스며드는 정신을 이끌고 네온사인 빛이 일렁거리는 시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 애가 부서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 잘못을 더는 구제받을 수 없을 테니까요. 마담은 붉은색 머릿결을 쓸어 넘기면서 웃음을 보였다. 그 미소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 쓸쓸한 미소가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정말 그녀는 지쳐있었던 것 같다. 동생에 대해, 아니 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랬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일렁거리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건설회사라던가. 그 애는 이 도시에서 가까운 지방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더군요. 막내를 여기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 쌍둥이라서 그 애들은 다 커서도 여전히 닮았더라구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동생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잠깐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이 동생들이었다. 언제였던가. 레드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잊어버렸는데, 토털아카데미의 이 소도시지사인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접수절차를 마친 그 여인이 마담의 동생이었다. 


  동생을 위해서 나는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동생을 위해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게 돼요. 저쪽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일종의 끝 일거예요. 나와 동생이 이렇게 살 수는 없거든요. 우리 자매들의 끝을 원치 않아요. 마담은 담배를 끄면서 다시 한번 쓸쓸하게 웃음을 보였다.  


  - 당신은 따뜻한 사람이더군요. 

  나는 그녀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엷은 암회색 빛이 내리는 실내의 불빛 아래는 침묵이 또 그만큼 씩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거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하나 둘 씩, 쌓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기도 하구요 라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동생들을 책임질 수밖에는 없었어요. 그 남자가 떠났을 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내가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어요. 어린 동생들에게는 다시는 아빠를 찾지 말라고 윽박질렀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 남자가 마저 가져가지 못한 내 마음속의 증오심, 그 복수를 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말이죠.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고, 동생들은 이제 갓 여섯이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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