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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07. 2024

자운영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풍경

  엄마가 사라져 버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엄마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빠, 아니 그 남자가 햇빛에 넘실거리는 검고 긴 머리를 한 여자를 데리고 집에 온 날 이후로 수를 놓기 시작하던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잡고 왜 항상 울었을까. 생각해 보면 엄마는 바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차라리 햇빛에 넘실거리는 그 여자의 긴 머리채를 잡고, 한바탕 속 시원하게 분질러 대 버리던가, 아니면 아빠라는 그 남자를 다시는 받아들이지 말던가 했어야 했다. 국민학교 2학년인 내가 오히려 엄마의 언니가 된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엄마. 엄마는 바보등신이야? 왜 이럴 때마다 울고만 있어. 우리들 생각해서 엄마는 그런 다지만 이게 우리들을 위한 거야? 그 사람이 왜 우리들 아빠야. 나는 그 사람 싫어. 싫단 말이야. 그러면 엄마는 또 울면서 정현아, 그러지 마. 그분은 너희들 아빠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엄마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으면서 집요했다. 사업을 하는 그 남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네 아빠가 저런 것은 다 나 때문이란다. 그래, 나는 네 아빠를 놓치고 싶지 않단다. 나는 네 아빠 없이는 일어설 수가 없어. 정말 바보멍청이 같은 엄마였다. 그 남자가 사업이 잘 되는 것만큼 엄마는 반대로 점점 눈물이 많아지고, 야위어 같다. 그리고 수를 놓은 꽃무늬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원앙새들을 일곱여덟, 그렇게 자꾸만 만들어 갔다. 쌍둥이 동생 중 막내 지현이는 아빠, 아니 그 남자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고는 했는데 그러다가 나한테 혼이 나고는 했다. 호정이는 나처럼 아빠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니 생각하면서도 말을 안 하는지 몰랐다. 그런 호정이를 볼 때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나도 사실은 딱 한번, 그 남자가 아빠로 다시 와 주었으면 했지만, 그래도 엄마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 그 남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를 슬프게 만들던 바보 같은 엄마가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그날은 울음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불안했다. 엄마가 예전 같지 않은 게 자꾸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엄마의 기분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엄마, 안 우니까 되게 이쁘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그동안 놓았던 수로 된 꽃무늬와 원앙새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정현아, 이거 잘 간직해라. 지금은 네가 싫어하는 원앙새지만 앞으로는 좋아하게 될 거야. 엄마, 나는 정말 원앙새는 싫다니까. 그러면서 모처럼 웃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받아 두었다. 저녁에 잠이 들고, 일어났을 때 거짓말 같이 옆자리에 엄마가 없었다. 엄마는 오전에 발견되었다. 집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강변에서였다. 그 남자가 와서 엄마의 장례식을 끝마쳤다. 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서 엄마가 잘 간직하라던 것을 가지고 강가로 갔다. 바보 같은 엄마가 너무도 많이 생각이 나서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들을 한 장씩 강물 위로 띄워 보냈다. 그리고 울었다. 마지막 한 장의 원앙새 문양을 띄워 보낼 때 등 뒤에서 노을이 지고 있었는지, 노을빛을 받은 그 원앙새 문양 속에서 한 마리의 원앙새가 갑자기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 같이 보였다. 정말 너무 예쁜 새였다. 나는 강을 향해 소리 질렀다. 엄마. 저 멀리 원앙새가 날아간 곳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엄마. 내 뺨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 나는 그 사람을 지금도 증오해요. 아니, 이제는 그런 느낌마저도 사라져 버렸어요.  

  매듭을 풀며 마담의 담배연기가 사라져 갔다. 어떤 이야기들이 그녀의 담배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면 거기에 다시 이야기 몇 개가 쌓여왔다. 나는 그녀가 정말이지 살아가는 방법에 너무도 지쳐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레드, 아니 한호정이 비상구를 향해 불을 밝히고 있는 단 하나의 안전등처럼 위험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 느껴져 왔다. 생각보다 정직하신 분이군요. 이렇게, 레드가 언젠가 내게 말했다. 웃으면서. 문득 그것이 떠올랐다. 그때 마담의 웃음도 저와 같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레드는 지금 이 시간, 자신이 유일하게 갈망하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위안을 주던 불빛들이 등 뒤 저 멀리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앞에는 검고 드넓은 공허가 막막하게 다가와 있었다. 앞으로 개발이 이어질 텅 빈 도시 외곽의 드넓은 택지에는 별빛만 쏟아지고 온통 어둠이었다. 나는 어둠을 뒤집어쓰고 그곳에 앉았다.    

  

  지금 헤어져 지내고 있는 레드의 동생, 정지현에 대해 마담은 그 애가 그렇게 자라 준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애는 성장해서 철이 들 무렵, 그 사람에게 갔어요. 그 사람은 어떤 사업에서 성공했고 우리 자매들을 거두어 가려고 했지만, 나와 호정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쌍둥이지만 그 애들은 참 달랐죠. 지현이는 그 사람을 많이 이해했던가 봐요. 그 사람이 우리를 찾던 날 밤, 우리 자매들은 각자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어요. 지현이가 말하더군요. 언니,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마. 나는 지금 언니들을 배신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호정이 언니처럼 강인하지 못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 그 애는 다음날 그 사람에게로 갔어요. 가면서 내 손을 꼭 잡고 말하더군요. 언니,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분명 다시 만날 테니까.


  어쩌면 그 애보다도 나와 호정이가 편안하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던가요? 그 애는 스스로 힘든 길을 택했고, 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선택했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랬다. 생각해 보니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 않던 얼굴이었다. 예쁜 눈이었고, 스물일곱 살이었던 그 여인이 지난겨울과 함께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 겨울의 끝에서 나는 그 여인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겨울, 그녀는 어두운 쥐색코트를 입고 왔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던가, 추위가 땅 위를 짓눌러 얼어붙은 날씨가 이어지던 날, 짧은 갈색스커트와 하얀 피부가 부드럽게 드러나던 스타킹, 그러면서 여인에 대하여 밀물처럼 밀려오던 깨끗하고 하얀 느낌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것은 허공을 짚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져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생활 속에서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내 가슴을 저미는 것에 대해서 나는 까닭 없이, 정말이지 여전히 서툴렀다. 가슴을 저며 오는 그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담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득문득 옆구리께로 흐르는 바람결같이 그것을 만날 때면 나는 아득한 현기증 같은 허허로움을 느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도 그 모든 것들과 조금씩은 공존한다는 사실이 자신의 의지의 틈새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을까? 물론 지금껏 살아온 내게는 부질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이 공존의 이유가 나로 하여금 감정을 처리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서툴렀던 것일까? 삶의 두께와 무관하게 어떤 감정들은 때때로 홀로 서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를 일이다.  

    

  알베르, 당신은 고집스러운 어린애 같군요. 내가 레드, 아니 마담의 동생에 관해 저쪽에서 내게 제시한 것을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마담이 내게 말했다.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정말이지 깊은 근심이 깃들어 있었다. 

  - 당신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사람이군요.

  -...

  - 아니면,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멍텅구리이던가요?

  -...

  - 미안해요. 정말이지 미안해요.

  나는 마담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기에 젖어버린 그녀의 흔들리는 목소리를 그냥 듣고 있었다. 마담의 깊은 눈 안에서 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여인에 대한 연민이 소리 없이 가슴을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마담의 눈을 바라보았다. 


  - 마담, 이렇게 엉성한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나? 어린아이란 적어도 다 현명한 법이야.

  나는 미소를 보이면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젖어 흘러내릴 것만 같은 마담의 눈가에 머물러 있는 눈물방울 안에서 어쩐지 나는 자운영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풍경이 떠올랐다. 

  - 어린애를 책망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거라구.

  홍자색의 그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 내 마음 가득히 느껴지는 것은 그 뒤였다. 나는 편안했고, 내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다는 그 진실이 나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마담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금방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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