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척의 선박이 불빛을 밝힌 채 항구 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영하는 몇 개의 그 불빛을 추적하기라도 하듯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그가 그에 대한 나의 이런 무관심에 그저 말없이 있어 주었다는 것이 생각되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 쪽에서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주민들을 위한 일을 하시는데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그의 각진 얼굴에 짧은 순간 신뢰감이 태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누구와 상면했을 때, 어떤 대화가 이어지기까지 자기 쪽에서 기다리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쪽의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하시는 분이시라 진실되게 일해 달라는 충고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결과까지 얻는 과정이야 이제는 한갓 지난 시절의 일이며 이제는 보다 확실한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지금을, 그는 꾸밈없이 덧붙였다.
- 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드려 무엇보다도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은 한호정 씨, 아, 한사장님의 동생 되신 분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한사장님의 동생이라는 그의 말, 한호정.. 한호정. 그렇다. 한호정, 아니 레드를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가 레드를 말하는 순간, <조앙ㆍ마두>의 마담과 레드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물론 관심은 없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확연치 않았던 일말의 사실들이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좀처럼 동생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던 마담과 자신에 관해서 아무런 흔적도 비추지 않았던 레드의 모습은, 생각해 보니 지난겨울 이후 적어도 지금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나는 자매들 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이유까지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거의 두세 달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저 예전처럼 간간이 자신들을 찾아와 술을 마시고 있는 나에게 좀처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레드가 <붉은 풍차>의 운영권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누군가 레드의 운영권 뒤에서 배경으로 있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조앙ㆍ마두>의 마담은 동생에게 그것을 포기하는 동생의 새로운 삶을 몇 번인가 거듭 종용했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잠깐동안 갈등을 일으켰던 마담에 대한 감정도 겨울이 지나면서 바쁜 직장의 업무 속에 묻혀 지내느라 어느 정도 평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이러는 것처럼 마담도 자신의 감정을 회복시키는데 보이지 않게 침착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별반 변화가 있을 이유가 없었던 마담과 나의 대면들은 이번 겨울을 통해 무엇인가가 확인되고 지나갔다는 것 이외는 각자가 더 다른 의미를 끼워 두지는 않았다. <조앙ㆍ마두>에는 변함없이 마담이 있었고, 생각나면 나는 거기서 술을 마시면 됐다. 그리고 또, 하진의 바다가 생각날 때면 거기 <붉은 풍차>에는 변함없이 레드가 있었고, 거기서 가슴 깊이 쏟아져 들어온 밤바다의 어둠을 털어내고 술을 마시면 됐다. 일상의 이 틀에 대해 나는 자신에게 정직하게 마주치고 있었다.
- 한호정 씨는 우리 조직의 윗분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왜 <붉은 풍차>의 현란한 밤의 풍경과 레드가 동시에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무엇인가 좋지 않은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뿜고 있는 기운 속에서 무엇인가 간단치 않은 일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기분이 묻어 나왔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한순간 가슴 가득히 밤의 어둠이 밀려드는 고독감이 느껴져 왔다. 나는 그 고독감을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일순간 모든 것이 확연하게 떠올랐다. 문득 레드와 함께 반항적인 음색의 악셀 레드의 노래가 내 귓가를 지나갔다.
- 물론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만, 어쨌든 당신을 만나서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의 검은 머릿결, 바로 아래 이마에는 조그만 빈틈조차도 추호도 허용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단 한 줄의 굵은 주름살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난번 선거에서의 승리를 차지한 그가 말하는 윗사람은 어쩌면 저 한 줄의 주름살이 보여주고 있는 결연한 투지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는 분명 주어진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놓쳐서는 안 될 것임을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거침없이 독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거대책본부장으로서 승리를 낚아냈다. 그 지방의 검은 정장의 어깨들, 한때는 그 자신의 적이기도 했고, 그래서 자신이 속한 조직의 적이기도 했던 그들을 신속하게 제압해 나갔을 것이다. 마침내 그 적들이 자신들의 조직 안으로 인위적으로 재편되었을 때, 그는 채찍과 당근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보상법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질 몫을 후하게 주었을 것이다. 패자의 입장에서 항상 느낄 수 있을 그 비굴함을 생각할 여지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그의 이마에 있는 한 줄의 주름살에는 이 외에도 단호한 방법들을 통해 또 다른 문제들을 거침없이 해결했다는 결과가 서려 있었다. 정치가 비호하는 그들만의 세계, 그리고 그들이 거들어 주는 정치의 세계를 빈틈없이 해냈다는 자신감이 그 결과의 중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그분은 이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렇게 말해왔을 때, 나는 그를 대면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이전에는 그저 무관심을 명확히 표현만 하면 됐다. 그보다도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의 무관심을 무력하게 만들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강인함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날은 돌이킬 수 없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무력감이 가슴 한쪽을 파고들었다. 나는 어쩌면 열여덟, 아홉의 진실들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 나가지 못했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나는 소위 그 세계를 잃어버린 지가 까마득하다고, 아니 나의 실존과는 무관하다고,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다시 마주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번지수를 짚어도 잘못짚었다는 것을 내가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것입니까.
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이 방법밖에는 달리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데서 오는 자신의 결단력에 대한 일말의 회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한호정 씨를 한사장님께 돌아가도록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다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가슴 안으로 어둠처럼 깊은 고독감이 밀려 들어왔다.
-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굳어져 있었다.
-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 말이 나에게 최초의 적요를 가져왔다. 최선의 방법, 최선의 방법.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고정된 틀에 넣어 조립하고 있는 중이다. 그 틀은 변형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지금에 와서. 내 감각 중 하나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미안합니다만, 나는 당신을 협조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이 말이 나에게는 두 번째의 적요를, 그에게는 최초의 적요를 가져다주었다.
- 당신의 주도면밀함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당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레드, 아니 한호정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의 긴 머릿결과 악셀 레드의 반항적인 음색을 닮은 그녀의 노래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레드, 그녀가 그들과의 관계로부터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 속, 그 생존의 법칙에서는 아마추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적어도 프로들이다.
-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었는지 모르겠군요. 허지만 제가 조직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면 그것은 저로서도 유감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현명한 방법을, 아니 기회를 알면서 접어 두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번쯤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내 안목은 아직까지 비켜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굳었던 얼굴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끝냈다는 표현임과 아울러 앞으로 자신들의 계획한 바에는 추호도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커피숍을 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가버린 앞자리였지만 아직도 거기에 그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나직하게, 그러면서 굵은 톤으로 남긴 마지막 말과 함께. 내 안목은 아직까지 비켜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우습게도 평정심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이 몰려들었다. 아니, 몰려들어온 그것들이 사실은 나를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가 나가면서 남긴 말은 어쩌면 내가 선택할지도 모를 모든 상황들에 대한 계산을 이미 다 하고 있다는 결론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지금, 옥죄임을 당하고 있구나 하는 쓸쓸한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것은 시계의 초침 안에서 진행되게 되어 있다. 여기서 그 무엇이 자유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는, 아니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