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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02. 2024

(제2부) 그날의 아침은 비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나는 전화벨 소리에 닫혀있던 눈을 반쯤 떴다. 전화벨이 울음을 멈추는 사이사이에 음악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거실의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인켈 오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새벽 늦게 오디오를 켜둔 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유리 창문을 통해 아침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저예요. 

  나는 수화기에서 쏟아지는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을 생각하기 위해 입을 열려다가 채 입이 열리기도 전에 그쪽으로부터 또다시 촉급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 도와주세요. 지금 곧. 아파트예요.

  그것은 <조앙ㆍ마두> 마담의 목소리였다. 

  - 동생이 위급해요.


  나는 곧 그쪽으로 가겠노라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엠블런스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머리를 떨어뜨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흰 가운을 입은 사내들의 움직임 속에서 출렁거렸다. 레드는 흰 가운의 사내들과 함께 엠뷸런스에 실렸다. 엠뷸런스의 뒷문이 닫히자 긴박함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차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눈은 그 뒤를 쫓았다.   

  

  조그만 아파트의 거실 한쪽에서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현관에는 신발이 몇 개, 옆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작은 선인장 화분 두 개가 신발장 위에서 쓰러져 있었고 하나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조각이 나 있었다. 아침의 다급한 상황이 그대로 말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지금 곧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미안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자국이 보였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한 순간, 격정에 쌓인 자신의 감정을 다독거리기 위해 두 손을 양 볼에 댄 채 고개를 숙였다가는 들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어서 주치의를 만날 수 있었다. 


  - 위험한 순간은 넘겼습니다만 상태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조앙ㆍ마두> 마담의 얼굴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한동안 그녀가 그렇게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나는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한 달 보름인가 전에 하진의 한 정당(政黨)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 진승우 씨입니까?

  동료가 연결해 준 전화 수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곳은 민주자유연합정당 사무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역구 부위원장이 당신과 통화를 원한다고 했다. 나는 의아한 생각으로 수화기에서 나올 목소리를 기다렸다. 

  - 진승우 씨. 

  상대는 나를 알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 예, 진승웁니다만. 누구십니까.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생각해 보았다. 

  - 민홍섭입니다.

  나는 잠깐동안 깊은 동굴 속 어디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불현듯 걸어 나온 그 목소리가 한동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내가 그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수화기를 놓았다. 내가 그보다는 그가 나를, 아직까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전율처럼 퍼져 올랐다. 

     

  바다 쪽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항구는 떨어지는 태양 빛을 어깨에 묻히고 이제 막 어스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진이 바라다보이는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그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또 한 번 되새겨 보았다. 나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는 차 안에서 문득문득 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향한 호텔 정원 내의 조명등에 불빛이 들어왔다. 호텔의 커피숍에 들어온 나는 밖의 정경을 바라다볼 수 있는 넓은 창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둠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바다가 보였다. 거기에는 불빛을 밝혀든 선박들이 하나 둘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세계에서 그것은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는 것처럼 평온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가 왔다. 나는 체구에 걸맞은 그의 손을 내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군요라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렇군요라며 무표정한 모습으로 말을 했다. 그를 만났지만 사실 별다른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을뿐더러 할 말이 내게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저음이 짙게 깔린 자신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상대방에 대해서 감추고 싶지 않은 호의를 그대로 드러낼 때의 자기표현법이라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사실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의 아침은 비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가로수는 낙엽을 떨어뜨리고, 빛이 빠져나가 버린 그 낙엽들 위로 무거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축축한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아마도 하루 종일 비만 내렸던 것 같다. 내리는 비와 함께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퇴근 무렵 사무실을 나온 나는 우산을 쓴 채 시가지로 나갔다. 시내의 거리에는 가을비에 젖은 불빛들이 빗방울이 되어 똑똑 떨어지듯 반짝대고 있었다.      

  그랬다. <조앙ㆍ마두>의 마담이 운영하고 있는 또 다른 룸 카페가 생각난 끝에 나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서 나는 그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셋이었다. 그들은 <조앙ㆍ마두>의 마담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불빛이 가지런하게 천장에 매달려 있는 복도로 접어들면서 나는 마담과 그들을 만났다. 마담은 격양되어 있었고 얼굴은 참담해져 보였다. 그들이 나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던 나를 마담은 알아보았던지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고 말했다. <조앙ㆍ마두>에 가려다가 왔다고 했다. 마담은 쓸쓸하게 웃으면서 오늘은 보시는 바와 같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하고 말했다. 마담은 나를 황색 불빛이 밝혀진 조그만 룸으로 안내했다. 마담은 <조앙ㆍ마두>로 가봐야 하는데 오늘은 갈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술을 몇 잔 마셨을 때, 다시 그들이 왔던 것 같다. 그들은 마담을 찾았고 나와 함께 있던 마담이 나갔다. 내가 술을 대 여섯 잔 비우도록 마담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비가 내리는 밤거리를 걷고 싶어졌다. 남은 술잔을 비우고 불빛이 가지런한 복도를 통해 카운터로 나갔다. 카운터에는 조금 전의 그들과 마담, 그리고 카운터 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복도를 다 걸어 나올 때 즈음, 그들 하나가 카운터 위에 있는 장식용 도자기 병, 두 개를 쓸어내렸다. 융단이 깔린 바닥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자기 병이 깨졌다. 다른 하나가 작은 조명등이 고혹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진열대 위의 술병들이 있는 곳을 조금 전의 하나처럼 쓸어내렸다. 술병들이 떨어져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카운터 걸이 카운터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마담은 무표정인 채, 말이 없었다. 다시 한번 진열대에 있는 술병으로 그가 손을 뻗쳤다. 또 한 번의 깨어지는 소리가 여음도 남기지 않고 끝났다. 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이제 그만두세요라고 마담이 말했다. 나는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술병을 쓸어내렸던 하나가 헛웃음을 쏟아댔다. 그 하나는 다시 한번 술병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이제 그만해 두었으면 좋겠는데. 그러한 그를 향해 내 입에서 짧으나마 단호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술병을 쓸어내리려던 그쪽이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잠깐 조롱 섞인 미소를 흘렸다. 마담은 나를 가로막았다. 그냥 나가세요. 나는 마담을 왼편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천히 말을 던졌다. 시끄러운 그 소리를 바닥에 또 쓸어 부어야 하겠나. 그러자 저쪽의 하나가 거칠게 말을 토했다. 뭐야.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너무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내 육체가 깨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야생동물이 주변 상황을 살피듯이, 본능적으로 카페의 내부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짧은 순간, 냉정함을 잡아 나가는 내 육체가 가슴 가득히 느껴져 왔다. 카운터 위 천장에서는 조그만 조명등 두 개가 어둠에 갇힌 지하실, 그 벽에 생긴 작은 틈으로 햇살이 뚫고 들어오듯이 내리 쏘이고 있었다.   

   

  술병을 너무 많이 쓸어버린 것 같지 않나. 다시 한번 천천히 말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적어도 나는 저쪽을 떠보아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고 나오면 저 녀석들은 별반 없는 조무래기들이다. 녀석들은, 그래 묵살해도 좋다. 필경 겁이 많은 놈들일 테니까. 그렇지만 이쪽의 의도를 바로 살피는 녀석들이 있다. 녀석들은 곤란하다. 적어도 어둠과 그리고 밝음을 헤아려 낼 줄 아는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확히 공격해야 한다. 단 한 번에. 저쪽의 둘이 서너 발치 앞에까지 왔다. 가까이 다가온 둘의 얼굴에는 거만함과 굴욕이 어우러진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그 그림자 뒤로 그들이 제어할 수 없는 공격의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이 느껴져 왔다. 나는 그들이 뿜어대고 있는 육체의 변화를 온몸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하나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었을 때 여자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그 하나가 융단 위로 쓰러졌다. 나는 정확하게 그 하나의 옆구리 쪽을 가격했다. 하나는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격한 신음소리를 삼키며 쓸어져 버렸다. 내가 또 다른 하나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 순간 그가 조금 전과는 달리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의 눈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때 그 하나의 발과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진공상태에서 물체가 떠다니는 것처럼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오른쪽으로 돌아 동그란 의자를 밟은 내 발은 튀기듯이 올랐고 다른 하나의 허리 부위를 가격했다. 마담의 비명소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넘어졌던 하나가 일어나고, 한참 후에 좌절된 또 하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표적에 대한 공격력을 상실한 그들의 굴절된 힘이 다시 나를 향했을 때, 잠깐 기다려라고 카운터 쪽에 있던 나머지 하나가 억제된 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나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러한 그를 마주 보면서 생각했다. 내 육체의 손과 발이 가격했던 부위와 정도를 아마도 지금 그는 헤아리고 있을 거라고. 어차피 이것은 어둠과 밝음을 생각할 줄 아는 놈들에게는 피차가 잘 알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의 억제된 목소리가 다시 튀어나왔다. 그만 가자. 나는 조그만 전율이 몸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나가고, 출입문 쪽에서 한동안 정적이 묻어 나왔다. 잠시 후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그 정적 끝에서 문득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을비 속을 걸어오면서 후회를 했다. 사실 그곳에서 그냥 나오면 그만이었다. 마담의 말대로. 그런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열여덟, 아홉 때 나에게 다가와 쌓였던 기질이 소진되지도 않고 일부가 그냥 남아 있었기 때문인 듯도 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빗속을 걸었던 것 같다. 

     

  <조앙ㆍ마두>에 들어서자 마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라고 마담의 걱정스러운 눈이 말을 했다. 나는 바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아치형 유리 창문을 통해 입구의 가로등 불빛이 가을비에 젖어가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마담의 눈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마담의 하얀 실크 남방이 깨끗하다고 느껴졌다. 마담의 얼굴이 가을비에 조금 젖었다는 기분이 들면서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 녀석들이 언젠가는 다시 올 텐데요.

  마담은 술잔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 끝으로 원을 그렸다. 

  - 오늘은 그들과 저쪽이 서로 격해져 있는가 봅니다.

  -...

  - 나는 그들과 관계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선거가 끝나면 그만일 거예요.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마담을 바라보았다. 

  - 바로 옆 지방에서 지금 공석이 되어버린 의원을 뽑느라고 야단들입니다. 그리고 그네들이 뒤섞여서 거기에 있는 거구요.

  마담은 담배를 피우며 예전의 미소로 돌아왔다. 

  - 오늘 멋지게 골탕을 먹이더군요. 손님이 다시 보여요.


  마담의 담배 연기가 매듭을 풀면서 피어올랐다. 실내에는 Marisa Sannia의 카사 비안카(Casa Bianca)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술을 꽤나 마셨다. 아치형 유리 창문을 통해 여전히 가을비에 젖고 있는 입구의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안으로는 빗줄기가 무수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잔을 비우고 일어서려는데 마담이 노란 색깔이 눈부시게 느껴지는 조그만 상자를 주었다. 손님의 분위기에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마담의 하얀 실크 남방이 머리 위의 외줄기 조명등 빛을 받고 반짝거리는 듯했다. 내 입가에서는 미소가 어우러져 내렸다. 마담의 눈매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밖에는 가을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빗속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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