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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01. 2024

Melancholy smile

  눈이 내리고 있는 창가에 다가서자 저 멀리 어둠에 갇힌 밤바다가 보였다. 어두운 밤바다 위에는 눈에 덮인 섬들이 희끄무레하게 형체를 드러낸 채 떠있었다. 오른편으로 무인등대가 눈을 떴다가는 감고, 그렇게, 깊은 어둠에 갇힌 바다를 향해 줄다름질 치다가 서버린 방파제 끝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눈발은 좀처럼 기세를 수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오디오를 켰다. 실내 조명등아래서 음악이 흘렀다. 침대에 누워 나는 음악을 들었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레드를 생각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사려가 깊었고, 적어도 그렇게 행동을 보여 주었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언젠가 마담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애는 지금 내가 지독히 싫어하는 것을 겪고 있다고. 나는 레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침착한 손끝, 어디에서 그것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누운 채로 호텔 정원을 밝히고 서 있는 몇 개의 가로등 아래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는 눈발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보고 있는 개인들의 삶이란 불빛이 차지하고 있는 저 공간에 내리는 눈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 불빛 아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가 촘촘히 사라지는 저 눈발 같은. 우리에게 개인들이 잠깐씩 보여주고 있는 삶이란 저 눈발처럼 잠시 형태를 보이다가 사라져 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레드를 만났고, 그녀는 내 앞에서 잠시 눈발이 되었다가 사라진 것이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리라.


  다시 불빛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 밖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았다. 눈발은 내리겠지만 좀처럼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기를 바라보다가 보이지 않는 개인들의 삶이 저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불빛 밖의 저 눈발들... 그렇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뿐이리라. 그것을 생각할 바에는 차라리 먹다가 만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을 주물럭거려 가루로 만드는 소일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었다. 보이지 않는 삶은 그대로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금 호텔 정원의 가로등 불빛 안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레드와 함께 <조앙ㆍ마두>의 마담이 생각났다. 그들이 눈발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불빛 안에서 잠깐 모습을 보이다가 사라져 가는 눈발들. 거기에는 내 삶도 있으리라. 내 삶의 눈발들이 빛났다가 사라져 갔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눈발은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저 떨어지는 저 눈발. 저 떨어지는 순간들을 우리가 어떻게 잡아둘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던가? 그저 고요하게. 그리고 새로운 눈발을 맞이하는 것도 그랬다. 어쩌면 그것은 더 쉬웠다. 그들도 언젠가는 그냥 떠나보내는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에 그냥 맞이하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억에 의하면 어리석게도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 무엇인가를 했다. 자신의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유는 이렇다. 그것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삶이 보여주고 있는 그것은 진부하지만 진실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는 것. 허지만 이러한 것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내린 이 판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래도록 내 주머니 속에 넣어 담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때 내가 내린 판단에 대하여 변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정말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 내 시절인, 지금까지의 내 삶에는 그렇게 살아온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삶의 방법은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있는 중에 나는 <조앙ㆍ마두>의 마담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옆으로 비켜섰던 것 같다. 내 눈을 통해 자신을 찾아보려는 마담의 웃음을 받아들였고, 나는 동조를 했다. 아마도 레드는 직감적으로 이와 같은 내 변화를 정확히 집어낸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켜두었던 오디오에서는 연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멜랑콜리 스마일, 우울한 미소(Melancholy smile). 음악에서 우울한 미소가 느껴졌다. 이 음악을 듣고 있자니 문득, 가슴 안에 접혔던 낡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이제는 잊을 법도 한 기억이건만 함께 묻혀 있던 그 작은 흥분과 함께 내 가슴을 밀치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이 음악을 들을 때면 가끔씩 고개를 들고는 했었다.


  십오륙 년 전이었던가. 그 시절 나는 한 카페에 있었다. 실내의 나무로 된 기둥에서도 커피 향이 묻어 나왔던 커피만 취급하는 카페였다. 적어도 매일 여자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그의 사업 일은 대개가 내 일이었다. 여자를 만나는 일 말고는. 경양식 집의 운영과 그곳 카페를 포함한 몇 군데가 더, 아마도 나의 일터였던 것 같다. 그는 게을렀고, 게으른 그 때문에 나는 그의 지분으로 되어 있는 일부의 운영과 자금에 대한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블랙로즈는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여자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녀가 올 때마다 검은 색상의 옷을 입고 온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때는 검은 모자까지 쓰고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는 나더러 그녀를 정리해 달라고 더러운 부탁과 함께 봉투 하나를 주었다. 그녀는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서 그로 인해 사흘 밤낮을 농락당했다. 그에게는 욕망의 일부였지만 그녀에게는 욕망의 전부였다. 어쩌면 그녀의 삶, 모든 것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 보았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진부한 것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사실을.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했다. 왜냐하면 그 뒤로 그녀는 미쳐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던가. 그녀가 그를 찾아왔고, 나는 카페의 한쪽 구석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 앞에 앉았을 때 그녀는 종이쪽지를 나에게 주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 지 그녀는 그저 웃고 있었다. 나는 접힌 종이쪽지를 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떠납니다. 당신을 위해서 떠납니다라고 서투른 글씨체로 정확하게 써져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징표였던 것 같았다. 그녀는 또다시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울한 미소. 한동안 카페 안에는 음악이 흘렀다. 그때 그녀의 눈에서 거짓말같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그녀의 눈물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결심했다. 나는 그가 최근에 인수해서 운영하고 있는 나이트클럽 <스타>를 찾아갔다. 영업을 준비하고 있는 그곳 무대 위에서 그를 발견했다. 나를 알아보는 그의 어깨들인, 검은 옷 정장들이 고개를 꾸벅였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에게로 갔다. 그의 손에 블랙로즈에게 전달해 달라는 그가 내게 준 봉투를 쥐어 주었다. 그는 봉투를 받으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곧, 나는 그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는 갑작스러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재차 발길질이 가해졌을 때 그의 어깨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들은 험악해졌고, 몇몇은 행동을 막 취하려 한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 짧은 한마디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가 일어섰고,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그의 어깨들이 나에게 덮쳐온 순간 그가 소리 질렀다. 이 새끼들아! 가만있어!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한동안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쪽은 나였다. 형의 말대로 그녀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었소. 형에게 이게 필요할지는 모르겠소. 그리고 나 또한 형을 만날 일은 없을 거요. 나는 그녀가 준 종이쪽지를 그 앞에 던졌다. 나는 뒤돌아서 나왔다. 블랙로즈라는 여인에 대해서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일이 있는 후, 여섯 달이 지난 뒤였다. 블랙로즈는 정신 요양원에 있었고 그가 그녀의 뒤를 보아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일어나 창문께로 갔다. 갑작스럽게 오는 혼란 때문에 누워있기가 불편했다.  

    

  <조앙ㆍ마두>의 마담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내가 마담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도 없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생활 안에서 나는 타인들과 무관하게 지내왔다. 나 자신의 생존과 관계되지 않는 한 나는 편안한 쪽을 원했고, 선택했다. 두 번에 걸친 직장생활과 대 여섯 번이었던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나는 내 쪽에서 먼저 마음을 열어 줄 이유도 없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밀고 들어갈 생각 또한 없었다. 상대방이 조금 좋으면 그만이었고, 상대도 나를 조금 좋아하면 되었던 것이다.


  창문 밖에는 끊임없이 눈발이 쳤다. 저 멀리 희끄무레한 섬들은 완강한 고요 속에서 고립됐으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그 섬들에게 막연한 애정이 갔다. 그러면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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