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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Sep 30. 2024

레드

  서치라이트를 켠 자동차는 눈이 쌓여 있는 도로를 천천히 밀고 나갔다. 간혹 반대차선에서 자동차 불빛이 지나가고는 했다. 하진으로 가는 도로 양옆으로 안내판이 없었더라면 좀처럼 방향을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눈은 내렸다. 하진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고 도로는 차량의 통행이 뜸했다. <붉은 풍차>는 하얗게 쌓인 눈 위에서 불야성을 올려놓고 도도하게 서 있었다. 

     

  - 레드를 찾는데 올 수 있을까요?

  눈이 부실정도로 하얀 서빙용 남방에 검은 바지를 차려입은 웨이터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십 년산 헤내시가 한 병, 은빛 쟁반 위에 과일과 함께 따라왔다. 그리고 말씀하신 분이 곧 들어오실 거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룸 밖의 무대 쪽에서는 간간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헤내시 병뚜껑을 따려는데 여인이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 곁에 앉자 내가 따려던 술병을 보고는 이러면 제가 들어온 이유가 없지요 라며 술병을 내 손에서 가져갔다. 

  - 일행은 없으신가 보군요?

  나는 이렇게 혼자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밖에는 눈이 많이 내려 누구와 같이 온다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리고 오늘은 그냥 혼자 오고 싶었지요.

  - 여기 자주 오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 그렇습니다. 

  - 그런데도 저를 찾아주셨군요. 

  -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나는 스페셜 타임에 부르는 당신의 노래는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까지 소문이 와있다라고 말을 하던 동료의 말이 생각나서 그렇게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사실 나는 그녀의 노래가 그만큼의 소문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지 못했다. <조앙ㆍ마두>에서도 그녀의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 레드라는 이름이 예쁘군요. 당신에게는 적합한 이름인 것 같군요.

  저 애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찾고자 하는 갈망이 깊은 아이라고 말하던 마담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말에 그저 웃음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서 언뜻 마담의 웃음을 발견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흘려버리는 듯한 거기, 미소에는 사내들이 가끔씩 찾고 싶어 하는 매혹이 섬뜩하게 베어져 나왔다.    

  

  - 손님께서는 저를 알고 있어요.

  내가 헤내시를 한 잔 비웠을 때, 포크로 과일조각 하나를 집어 올린 그녀가 말을 했다. 그녀가 건네주는 과일조각을 받으려다 말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룸의 불빛아래 그녀의 얼굴이 단정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 그럼, 당신도 나를 알고 있었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이 비운 잔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빈 잔을 채우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음을 보였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그사이 그녀도 말없이 앉아 있었다. 


  - <조앙ㆍ마두>를 알고 있다는 뜻이군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마 밖에는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무대 쪽에서 간간이 흐린 불빛처럼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에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

  - 언니가 말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기억이 났던 것뿐이에요.

  나는 다시 한번 여기에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달리 변명할 어떤 말도 없었다. 나는 다시 헤내시 한잔을 비웠다.


  - 기분을 망쳤다면 사과드리도록 하지요. 허지만 마담과는 상관없는 겁니다.

  나는 <조앙ㆍ마두>의 마담을 당신의 언니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마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기억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다. 그녀는 나를 그녀의 언니와 관계하여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담의 아파트에서 잠들지 않고 있었을 그녀라면 언니와 함께 들어선 남자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담의 표현에 의하면 마담의 아파트에는 그동안 남자가 들어온 적이 없었을 테고, 그러다가 어느 날 언니와 동행한 남자였다면 그녀의 기억에 칼자국처럼 남겨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었고, 전혀 주의를 주지 않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와 같은 것은 내 입장일 뿐, 그녀의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 저를 유심히 바라보던 눈길에서 손님을 기억했습니다. 어쩌면 목소리를 기억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언니를,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오늘처럼 눈이 내리던 그날 늦은 시각, <조앙ㆍ마두>에서 마주쳤던 눈길과 또 한 번 동료와 함께 이곳에 와서 문득 마주쳤던 눈길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조금 참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다. 긴 머릿결이 어깨선을 타고 흐르다 삼분의 일 정도가 가슴 쪽으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 댁의 기억에 무례하게 찾아들었군요. 허지만 레드, 오늘 눈이 내렸고 나는 술이 생각났던 겁니다. 그리고... 변명 같지만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 속에 하얀 눈 위에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붉은 풍차>의 정경이 겹쳐졌다. 그것은 그대로 빛을 발하다가 조금씩 사라졌다.  

  - 생각보다 정직하신 분이군요. 

  그녀는 웃음을 보였다. 다시 한번 <조앙ㆍ마두>의 마담과 같은 웃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의 긴 머릿결이 어깨선을 따라 다시 조금씩 흘러내렸다.  

  -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 정직하다 보면 상대가 마음을 다칠 수가 있어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누가 다칠 수 있다는 겁니까.

  - 언니는 전에도 그렇게 다쳤으니까요. 그렇지만 어쩔 수는 없겠지요.

  나는 조금 전의 참담한 심정에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마담이 했던 말이 생각되었다. 자매란 어쩔 수 없나 봐요. 내 과거가 지금은 그 애에게 있어요.


  그녀는 남자인 나로 인하여 자신의 언니가 다칠 수 있다는 표현을 그녀의 긴 머릿결이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리듯이 말했다. 언니는 전에도 그렇게 다쳤다는 말도 그렇게 했다.     

 

  - 레드는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군요. 따지고 보면 그렇게 의미를 둘만한 사내는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그녀와 마담이 참으로 닮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있어서 진지한 것이란 내가 대단히 혐오하는 것이었지만 상대가 나에게 그렇게 대해오는 바에야 달리 도리는 없어 보였다. 나는 내 권태로운 자유들이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틈으로 마담과 내 앞에 있는 여인의 얼굴이 헤집고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부주의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담이 그러지 않았던가.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그때 나는 동조했다. 웃음으로. 그것은 자신의 부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담의 무엇에 대해 공감을 해 준다는 것인가. 그리고 공감을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내 권태로운 자유에 대해 이미 등을 돌리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웃음으로서 동조한다는 그따위 표정을 드러내 보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긴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술잔을 건넸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명랑해졌고 나는 따라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쪽이 정색해서 오니까 도망갈 곳이 없군요. 마치 모든 것을 다 노출시켜 버린 기분입니다. 레드, 당신이 이겼군요. 

  - 무얼요. 눈길 위의 내 발자국을 따라온 대가랍니다.

  그녀는 깔깔거리며 귀엽게 웃었다.

  - 정말이지 그런 꼴이 돼버렸군요.  


  그녀가 무대 쪽으로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무대가 왼편에서 바라다 보이는 테이블에 가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메모쪽지를 전달해 주며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말을 남기고 떠났다. 메모를 읽고 난 그녀는 다른 웨이터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되돌아갔다. 그가 다시 왔을 땐 다른 동료와 함께 그들이 밀고 온 카트가 보였다. 나는 카트를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웃으면서 그들에게 또 무어라 말을 했다. 카트에 있던 물건들이 테이블 위로 옮겨졌다. 테이블 위는 눈이 부셨다. 붉은 장미꽃이 만발한 바구니 두 개와 과일접시가 놓였다. 그중 한 개의 꽃바구니 안에는 검은 빛깔을 머금고 있는 술병이 하나, 고개를 모로 한 채 눕혀 있었다. 


  - 레드, 당신은 오늘 두 번 놀라게 하는군요.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지 않으면 <붉은 풍차>를 걸어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다시 귀엽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따라준 술을 한 잔 마시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매혹적인 음색을 어떻게 숨겨 다닐 수 있느냐고.  

  - 제 노래를 들은 적이 있나요?

  - 그때 동료들과 왔을 때죠. 레드, 당신이었어요.

  - 항상 숨겨 다니지는 않아요. 하지만 오늘처럼 손님이 저를 놓아주지 않을 때는 전 숨겨 다닐 수밖에 없어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잖아요?  

   

  그녀에게서 문득 레드라는 그 붉은색이 느껴져 왔다. 그것은 그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Axelle Red,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 농담에 불란서에 있는 제 친구랍니다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실은 그 프랑스 여가수의 노래를 나는 좋아했다. 그 가수의 음색에는 안락함이 베여있었다. 반항적인 음색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건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 가수의 노래는 아마도 인기가 대단할 것이라는 게 그저 내 생각이었다. 

  - 정말 불란서의 당신 친구의 노래는 인기가 대단할 겁니다.

  - 저도 여기에서는 제 친구처럼 인기가 대단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고서는 그녀가 웃었다. 무대에서는 어느덧 러시아 무희들이 그들의 이기적인 몸매를 하나둘씩 보여주며 사라졌다. 그때마다 탄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술병이 절반쯤 비워지자 나는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다고 했다. 어차피 눈이 많이 내렸으니까 이 도시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웨이터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밖에는 이제 굵은 눈송이가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불야성을 이룬 <붉은 풍차>의 화려한 불빛아래는 주차해 둔 차들이 내린 눈에 덮여있었다. 그것은 숲 속의 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나오는 하얀 버섯 모양의 집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출입문까지 나온 그녀는 오늘 밤 편히 주무시라는 인사말을 덧붙였다. 나는 레드, 당신의 호의를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그녀가 준비해 둔 차에 올랐다. 굵은 눈발이 쌓이고 있는 시가지를 향해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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