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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11. 2024

13월의 사나이

  본부지원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팀장님, 본부로부터 전홥니다. 그것은 인사발령이었다. 이제 우리는 해외로 눈을 돌릴 때가 됐습니다. 그동안 지사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번 기획조정회의에서 탁월한 업무수행능력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지사 몇 곳의 교육기획관리팀장을 중심으로 해외업무기획단을 새로 조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늦어도 두 달 이내에 모든 준비가 끝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를 맞추어 본부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멍청한 본부관계자들이 마침내 공룡 같은 조직을 확대하자는 결론을 생각해 낸 것이다. 확실히 오너의 이윤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쪽에 있는 자원이 고갈되거든 밖으로 눈을 돌려라. 오너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본부관계자들은 비상한 판단을 먼저 하는 법이다. 욕망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판단도 쉬지 않을 테니까. 분명 그들이 해외지사설립을 과장해서 브리핑했을 것이다. 오너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후의 일 처리는 우리들이 서류뭉치에 머리를 파묻고 끄집어내는 노동의 몫이었다. 오너의 주도면밀한 계획인 바에야 어쩌겠는가? 정말 빌어먹을 멍청한 관계자들이지만 또 어쩌겠는가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나는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가능하면 그들 가까이에서, 그들에게 접촉되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것은 노조가 자멸한 이후 살아가는 나만의 생존법이기도 했다. 업무처리를 통한 출세욕은 접어버린 터였다. 노조가 붕괴된 이후 토털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능력이 우선 되는 거침없는 경쟁이 지속되었다. 몇몇은 무한경쟁이라는 그와 같은 허명을 과장 섞여 내뱉고는 했다. 그들은 확실히 능력이 뛰어났다. 그 능력은 때로 저속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몇몇이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스스로가 내부의 적(이들 또한 저속한 능력을 모두 보여 주었다)을 만들어서 조직에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무모한 그들을 사라지게 한 적들이 바로 지금의 멍청한 본부관계자들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이제 머지않아 그러한 그들과 접촉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창밖에는 녹음으로 우거진 가로수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만의 생존법이었던 그 방법도 낡아서 달아져 버린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물건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그림자도 잃어버리는 법이다. 어제의 것이 지금 존재할까? 뒤적거려 보면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대롱거리기야 하겠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어쩌면 멍청한 그들과 한두 번, 우호적으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나에게 붙여두었을 융통성 없는 사내라는 딱지를 떼어내야만 할 테니까. 그래서 이것이 습관이 되어 나도 그들처럼 멍청하게 살게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조소가 나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 아닌가?   

  

  오후 내내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직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상의 시간일 뿐,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쩌면 한 달 보름, 아니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 소도시에서 벌써 사 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삼십 대 중반을 넘겼고, 지난날들은 도대체가 까마득하여 흔적도 없어져 버린 나이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용한 모습으로 잘도 지내왔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그저 자신의 세상에서 뿌리를 내리면 그만이었고, 그러다가 밤하늘의 유성처럼 잠깐, 아주 잠깐동안 궤적을 보여주다가 잊어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것조차도 무관심해졌을 때 나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들 들을 수 있었고, 그 자전은 결국 커다란 공전을 그리기 위해서 지구가 까마득한 시간부터 보여준 정교한 질서라는 것을 깨달아 보는 것이었다. 참 순수한 시간들이었다. 그때 공존(共存)과 관계된 이유만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도 내게 주어졌던 그 시간들은 좀 더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부처라는 사내가 추구해 놓은 중도(中道)의 법리를 단번에 쏘아보는 푸른 눈의 사나이(눈 푸른 납자(衲子)=밝은 눈을 가진 구도자)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어쩔 것인가? 진부한 일로 힘겹게 살아야만 하는 나와 당신들은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게 더욱 사실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삼십 후반인 나 자신이 하진에서의 그 일에 관계를 맺게 됐을 것이다. 이것이 구질구질한 자기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내 뒤를 돌아다보기에는 아직 해야 할 일과 시간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기간 동안 일천(日淺)한 내 삼십 대 후반은 또다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물론 그것이 나 자신에게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일 테이지만.     

  - 팀장님,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 나왔다. 

  - 예. 진승웁니다.

  - 민홍섭입니다.

  -...

  그의 굵은 목소리를 듣자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 물기가 젖어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고뇌로 뭉뚱그려졌을 시간을 밀어내고 마침내 내게 연락을 준 것이었다. 사내를 통해서 내 가슴 밑바닥에 물기가 묻어 나왔던 기억이 언제였던가. 까마득하여 새로운 기분이었다. 어쩌면 정말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 이쪽에서 <붉은 풍차>로 가겠습니다. 

  한사코 이쪽의 목소리만 듣고 떠나겠다던 민홍섭에게 나는 오늘 오후에 하진으로 가겠다고 했다. 정말 오후 내내 나는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음악소리가 문득문득 흐린 불빛처럼 들려오는 룸에 민홍섭이 먼저 와 있었다. 그와 나는 예전처럼 그렇게 악수를 했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아마도 따뜻한 내 손도 그가 나처럼 느꼈으리라고 생각했다. 건장한 체격 안에서 예전과 다름없는 굵은 목소리가 변함없이 그의 두꺼운 가슴을 밀고 나왔다. 나는 때때로 그 목소리에서 그에 대한 신뢰를 발견하고는 했다. 그의 각진 얼굴이 미덥게 다가왔다. 그곳에서 반짝이던 눈이 지금은 무언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진승우 씨, 당신에게 나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완패를 시인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가 술잔을 건넸을 때, 나는 정확히는 아니었지만 그의 완결된 결심을 읽을 수가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고착화된 개인적인 이미지를 던져버리고 각자가 근접할 수 있는 지대가 존재한다면, 그와 나는 지금 그 지점에서 술잔을 건네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와 나는 지금 이 순간 지구라는 행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13월의 사나이, 그 이방인들임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 그 무엇이, 그의 표현으로 빗어진 그의 패배와 내 완승을, 이렇듯 형체도 없이 무미건조한 이것을, 거들어 줄 수 있겠는가. 그와 나는 모르긴 몰라도 세상의 살아가는 방식으로부터 퇴행을 서슴지 않는 위험한 13월의 사나이, 그 인물들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민홍섭 씨, 당신은 나를 압도하는 장면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닐 줄 아는 멋진 사내가 분명하군요.

     

  우리는 진승우 씨가 보고 있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단호하게, 그러면서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내 미래를 거기에 걸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걸어왔던 흔적들이 설계된 미래 안에서 살아서 숨을 쉬었습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은 너무 너저분하고 가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를 깨물었습니다. 조금만 참아 달라. 그러면 머지않아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몇십 배를 보상을 해줄 테니. 나는 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감으로 충만된 내 몸과 정신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선거대책본부장으로서의 경험은 오히려 미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계획은 완벽했고, 그 길목에 한호정 씨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생각났던 것은 그즈음이었습니다. 그때는 한호정 씨도 당신을 알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진승우 씨를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진승우 씨를 모르는 것만큼 오히려 내 의욕은 앞서나갔습니다. 그것이 나 자신의 첫 번째 실수였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정한진흥건설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때는 오히려 감당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내 계획을 가로막는 모든 것과 일전을 불사할 각오가 돼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피차가 치러야 할 희생을 생각하면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가혹했던 지난 세월들을 거침없이 걸어온 것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생활은 그와 같은 판단의 점철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민홍섭 전체였습니다. 앞에 놓인 일에 단 일 퍼센트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나는 그것을 선택했고, 그것을 해냈습니다. 내가 만약 구십구 퍼센트의 불가능성에 메여서 그것을 우회했다면 여기 민홍섭은 존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몸담았던 세상도 이 넓은 세상의 축소판일 뿐입니다. 그곳에서도 모든 것이 옳을 수만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를 수만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세인들의 관심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시비의 판단은 내가 몸담고 있던 세상의 각각 구성원들만이 규정할 수 있기에, 그곳은 이 넓은 세상 속의 판단으로부터 일종의 타부의 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은 모두가 무모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불변의 실체이자 실존의 방식인 것입니다. 진승우 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라면서 그가 웃었다. 나는 그의 진한 웃음과 함께 묻어 나온,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만은 더 이상 의미가 퇴색된 이 공감의 확인에 대해서 잠깐동안 가슴이 쓸쓸해져 왔다. 

    

  - 한호정 씨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두 번째 실수이자 마지막 실수였습니다.

  그의 건장한 체격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의 가슴 안에서 아직 다 나오지 못한 뭉뚱그려진 고뇌가 가슴을 타고 나와야 할 것처럼 두꺼운 상체를 쭉 세웠다.


  한호정 씨는 내 말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듣고만 있었습니다. 지금은 윗분께서 레드, 당신과의 일을 정리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붉은 풍차>를 당신이 관리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해 두셨습니다. 윗분이 원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당신께서 모든 이해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부득이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야만 하는데 대해서는 저로서도 유감입니다. 언론을 통해 발생할지 모를 만일의 일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을 경박스럽게 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이 윗분과의 관계를 연결해 오면 부인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보는 부류들은 아니니까요. 그때 가서 그런 그들을 궁지에 빠뜨릴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라고 내가 말을 마쳤을 때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정말, 그분이 그러셨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그렇게 해드리지요. 제가 그분이 필요로 했을 때 그분은 제 곁에 계셔주지 않았던가요? 저는 그분께 감사하고 있어요. 그분을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비로소 난감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 년이 넘는 시간 내내 의원님의 곁에서 많은 일들을 보아왔고, 또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의원님이 경영하는 사업소의 사업내역의 많은 부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감추고 싶은 것들, 일테면 세금과 관계된 일, 금지된 약물의 유통, 밀거래 관계 등 뭐 그런 거였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묻어두기 위하여 나는 내 미래를 걸고 작업 중이었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 그녀가 단 한마디의 거절도 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많은 사업 중 중요한 일의 대부분은 <붉은 풍차>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의 관리 및 운영권은 이제는 한호정 씨가 가지고 있는 법적인 근거들로 가득 차 있었고요... 우리들이 정말로 우려했던 것은 <붉은 풍차>와 관계된 일이 세인의 입 밖으로 새어 나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드리워질 어둠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자 나는 처음으로 내 세상에 대해 회의를 일으켰습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미래를 건 계획들에 대해 갑자기 회의가 몰려온 것은 그때였으니까요.   

   

  나는 그가 이와 같은 내용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유를 차츰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술기운이 오를 정도로 마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듣기에 따라서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내용들을 그는 그저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어서 처음에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역시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음 말을 계속했다.   

   

  - 한호정 씨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의원님이 당황하시더군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홍섭은 이제는 깊이가 깊어진 눈을 나에게로 보내면서 당신을 믿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한가하게나마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일 뿐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듯이 쉽게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 이제는 이미 자신의 몫으로 남겨졌을 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비록 갈등은 있었지만 스스로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그녀가 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전날 저녁, <붉은 풍차>에 있는 아이 하나가 의원님께 그녀가 전해 달라는 것이라며 봉투를 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의원님이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무언가 좋지 못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글씨가 촘촘히 적혀 내려간 거기에는 자신으로 인해서 그동안 의원님이 일으켜 세운 모든 것이 의원님으로부터 떠나버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원님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을 그것인데, 이제는 그저 외면만 해버리면 되는 저를 잊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의원님으로부터 잊어지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의원님이 저를 처음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주던 날의 기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렙니다. 정말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의원님이 저를 필요로 하실 때까지는 저는 언제든지 의원님을 위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꾸짖으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의원님으로부터 떠나가야만 하는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의 무례인 줄 알면서도 그래야만 될 것 같습니다. 의원님으로부터 잊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허지만 이것이 의원님을 위한 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저를 잊으셔도 됩니다. 의원님 사랑했습니다.> 글을 읽고 한동안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의원님은 내부의 일이 새어나갈지 모른다는 것으로 그랬고, 나는 우리로부터 정말 그녀가 조용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그랬습니다.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그때 밀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 그녀는 견고하기만 했던 내 시각에 굴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내 내부에서 많은 것들이 그 굴절로 인하여 부서져 내렸습니다. 모든 것은 참담했고, 나는 방향마저 잃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그녀 때문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레드가 떠올랐다. 그녀가 견고한 그를 결국은 무너지게 만들었구나.    

  

  - 진승우 씨,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더군요. 무의미한 것을 짊어지고 있을 필요가 더는 없어졌는데, 이제는 내가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도 사라진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반쯤 채워진 술잔을 들어 보였다. 나도 잔을 들었다. 그가 깊어진 눈가에 웃음을 보였다. 그와 나는 술잔을 천천히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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