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가까이 업무인계를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어쩌면 앞으로 일주일 후면 본부 지원센터로 자리를 옮겨야 할 것만 같았다. 동료들은 내가 보여줄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이곳에 정착하시도록 족쇄를 채워 드리는 건데. 아직까지 팀장님의 마음을 훔쳐버린 여인이 이 소도시에서 없었다니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지난겨울에 갔던 <붉은 풍차>라도 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며 언젠가 <붉은 풍차>에서 술을 마셨던 동료가 다른 직원들의 동의를 기대하며 말을 꺼냈다.
퇴근 후 우리 일행은 <붉은 풍차>가 있는 항구도시 하진으로 갔다. 붉은 주황색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일렁거리는 건물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넓은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레드가 생각났다. 러시아 무희들도 몇 명이 바뀌었을 테지만, 모습은 하나같이 예전 그대로 같은 모습들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우리들은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자 다시 레드가 생각났다. 나는 단숨에 맥주 두 병을 비웠다. 러시아 무희들이 퇴장하고, 두 사람인가, 가수들이 그들의 노래를 끝마쳤을 때, 나는 또 한 병의 맥주를 마저 비웠다. 누군가 테이블 위의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내 맥주를 더 주문했다. 맥주가 테이블에 놓이고 내 옆으로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게 쪽지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웨이터는 손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을 마친 뒤 테이블을 떠났다.
< 오늘 찾아 주셨군요. 선생님. 이층에서 동료 분들과 들어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선생님을 위해 노래를 준비했답니다.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레드 >
나는 이층 난간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무대에서 반사되는 조명등불빛만이 어지럽게 흘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질 않았다. 그때 오른편 무대 쪽에서 음색이 감미롭게 느껴지는, 그러나 반항적인 색조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목소리의 주인을 환호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Axelle Red의 Elle danse seule(그 여자는 혼자서 춤을 춘다)를 부르며 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레드였다.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현듯 솟구쳐 오르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유혹적이었고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조명을 화려하게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도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을 사로잡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게로 왔다. 나는 이런 상황을 채 깨닫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이끌려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와 부러움이 뒤섞인 탄성들이 쏟아졌다. 나는 내 가슴속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길을 따라 무대 위에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조명 빛을 온몸으로 받았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안내되었을 때 거기에는 레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 팀장님, 장난이 아닌 것 같습니다. 레드 씨가 어떻게 팀장님을 알고 있는 거죠?
예전에 레드의 노래를 과찬해하던 동료가 지금의 환대를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 살다 보면 행운이란 있는 법입니다. 그 행운을 오늘 밤 내가 만났을 뿐입니다.
이런 내 말에 일행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탄성을 다시금 쏟아냈다. 레드는 일행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미소가 얼굴에 자리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밤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팀장님, 오늘이야말로 앞당겨진 환송회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께서 자리를 함께 하는 행운까지 가져다주었으니 말입니다.
술잔을 비우던 동료가 고조된 기분을 놓치지 않고, 오늘밤 팀장님은 당신 곁에 함께 있고 싶어 할 것입니다라고 레드에게 농담을 건넸다.
아마도 환송회라는 말에 대해 레드는 놀랐던 것 같다.
- 정말, 오늘은 환송회 자린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뭐 별일은 아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레드의 얼굴에 잠깐동안 저녁노을에 젖은 그림자 하나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어떤 말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무대 쪽에서는 음악소리가 흐린 불빛처럼 간간이 들려왔다. 레드는 깊어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술을 내 잔에 따랐다.
- 팀장님, 축하합니다.
동료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으면서 비로소 내가 이 지방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됐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소도시로 돌아온 나는 불을 밝히고 서있는 <조앙ㆍ마두>의 출입문이 마주 보이는 건너편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갔다. 거기서 <조앙ㆍ마두>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출입문 앞에는 청동등이 연약한 가스등처럼 하얀빛을 밝힌 채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아래에 바람이 불면 흔들거리던 <조앙ㆍ마두>라고 음각된 청동제 푯말이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출입문 양편으로 상단이 동그랗게 처리된 유리 창문 두 개가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카페 안의 불빛을 어둠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정경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가로등 옆, 녹음이 촘촘해지고 있는 가로수에서는 밤벌레가 우는지 가끔씩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시의 외곽지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