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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13. 2024

알베르, 알베르 하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서랍을 열어 마지막으로 노란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 CD를 담았다. 몇 개의 CD케이스가 그 안으로 담겼다. 조그만 상자는 여전히 눈에 부실정도로 노란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몇 번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짐 꾸러미에 쌌다. 창밖으로는 기울어진 석양빛을 받고 차분하게 물들어가고 있는 소도시의 건물들이 보였다. 나는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나는 차를 몰고 이 소도시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석양이 넘어가고 어스름이 깔려왔다. 도심의 건물들은 하나둘씩 불을 밝혔다. 네온사인에도 불빛이 밝혀졌다. 고개를 숙인 가로등에도 하나둘씩 생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도시의 외곽지대까지 한번 돌아본 나는 하진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차를 세웠다. 차문 유리를 내리자 묵묵한 바다냄새가 와닿았다. 아마도 고개 너머 하진은 지금 항구로 돌아오는 배들이 뱃고동 소리를 울리고 있을 것이리라.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하진 쪽에서 몰려오는 바다냄새를 맡았다.   

   

  별들이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밤하늘 저 멀리 밤새들이 깃을 찾아드는지 울음을 남기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앙ㆍ마두>의 마담과 작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소도시 쪽으로 천천히 몰았다.  

    

  출입문 양옆의 유리 창문에서 실내의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동등은 여전히 조그맣고 하얀 불빛을 정겹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다. 조용한 실내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몇 번인가, 나를 따라 들어온 출입문이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렸다. 실내의 테이블에는 사람들 몇이 한가롭게 정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의 안쪽에는 마담이 어깨와 목선이 드러난 녹색 슬립차림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결을 뒤로 감아 핀으로 찌른 모습이었다. 내가 바 앞에 앉을 때까지 마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 위 천장에서는 조그만 조명등 두 개가 작은 틈을 헤집고 나오는 햇살처럼 내리 쏘이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깊어진 눈에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은 다물어진 채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깐 시간이 흘렀다.  

    

  - 준비는 다 끝나셨나요?

  그녀가 하나 둘, 사라져 가는 네온사인의 불빛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 어딘 가에는 물기가 젖어 있어서 그것이 내 가슴 안으로 베여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는 이곳에 오기가 힘들겠군요.

  그녀가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동생이 말해 줘서 알았어요.

  나는 그녀의 말끝에서 조금씩 Elsa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실내에는 엘사의 노래가 언제부터인가 흐르고 있었다. 

  - 그 애는 그날 밤, 울더군요. 당신이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나 봐요.

  나는 다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정이 많은 애니까요.

  나는 깊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이 젖어 있어서 이제 내 쪽에서 가슴속이 젖어 왔다. 

  - 지현이는 아직 모르고 있을 거예요. 아마도 당신이 떠난 사실을 알면 그 애도 당신이 생각날 거예요.

  나는 다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 그곳으로 가시면 해외로도 나가시게 되나요?

  나는 아마도 그래야만 할 거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격정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녀의 하얀 어깨와 목선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녹색의 옷 위로 천장의 조명등 빛줄기가 흐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 술 한 잔 하실래요?

  그녀는 카뮤를 열었다. 은은한 술 향기가 가슴을 타고 들어왔다.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그녀의 하얀 손이 가늘게 떨렸다. 

  - 당신이 좋아하시는 술일 것 같아서요.

  머릿결을 뒤로 모아 핀을 찌른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의 귀 언저리에는 핀과 함께 뒤로 모이지 못한 몇 올의 머릿결이 옆 이마에서 타고 흘러 내려와 있었다. 그것은 조명등 빛줄기를 때때로 받으면서 그녀를 현실의 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 ...

  나는 마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마담, 오늘에서야 생각하게 되었는데, 언젠가 마담이 내게 준 CD를 잊지 않고 짐 꾸러미에 쌌어. 물론 마담이 그것을 담아서 준 노란 상자에 다시 담아서 말이야. 그 조그만 노란 상자를 보면서 생각이 들었지. 이게 내 꿈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비틀즈의 노란 잠수함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나는 그녀가 따라준 카뮤를 한 모금했다. 그러자 조금 전, 내 가슴 밑바닥에 젖어 있던 마담의 목소리가 몇 개, 가슴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런 작별의 기분을 마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 그동안 많지는 않았지만, 몇 번인가...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이지 미치도록 자유가 그리웠어. 노란 잠수함 속의 사나이가 녹색의 푸른 바다와 함께 누리고 있는 그 자유 말이야.

  나는 다시 카뮤를 한 모금 더 했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말을 짧게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 마담, 당신이 준 조그만 노란 상자가 바로 그것이었던 거야. 노란 잠수함. 나는 비로소 그것을 가져가고 있는 거야.

  내가 입술을 깨물면서 눌러 두고 있는 이 작별의 기분이 짧게 마치고 싶은 말을 자꾸 가로막았다. 

  - 나는 그 노란 상자 안의 CD에 담긴 노래들을 잊지 않겠어. 그것은 마담이 이 고집스러운 사내, 아니 어린아이에게 준 자유니까.

  나는 하마터면 눌러 두고 있는 작별의 기분을 그녀 앞에다 내비칠 뻔했다. 그것은 아마도 깊은 눈 가득히 그저 눈물을 보이는 마담의 모습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입술을 다시 지그시 깨물었다. 

  - 마담, 마담의 머릿결에서 항상 느껴지던 싱그러운 장미꽃 냄새는 잊지 않겠어.

  그사이 마담은 빈 잔에 카뮤를 채워 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마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마셨다. 

  - 마담,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거야. 그때면 마담의 눈물이 다 말라있기를 바래. 그럼.     


  나는 당신은 사랑스러워라는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흐려져 가는 카페 안의 불빛을 뒤로한 채 <조앙ㆍ마두>를 나왔다. 나와 함께 밖으로 반쯤 따라 나왔던 출입문이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서 은종이 몇 번인가 딸랑거렸다. 그것은 마치 알베르, 알베르 하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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