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너는 나를 만나서

by 연우

2003년, 나는 9살이었다. 그다음 해 2004년 11월, SBS에서는 대하드라마 토지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내가 9살인 것과, 대하드라마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신다면(약 두 분정도 예상), 부끄럽지만 얘기해 보겠다.


그 드라마는 초반에 아역들이 꽤 많이 등장하는데, 그 아역 배우를 뽑는 오디션에 참가했다. 9살이던 내가 말이다.


우연한 기회로 오디션 참가 서류를 얻게 됐다. 프로필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해서 엄마를 따라 동네 사진관에 갔다. 빨간색 긴팔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하나로 묶고, 티브이 조기 교육으로 갑작스레 쓰게 된 안경을 벗은 채로. 당시 나는 드라마 보는 걸 참 좋아했지만, 내가 드라마에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뜻밖이라서 신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뭘 너무 모르고 순진했다.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을 서류에 붙였다. 그 이후 어떻게 접수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후, 1차 오디션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친구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 친구 방에는 컴퓨터와 햄스터가 있었다. 햄스터를 구경하고 있는데 엄마가 이리 좀 와보라고 했다. 햄스터 그만 보고, 컴퓨터 화면을 보라고 했다.


내 이름이 거기 있었다.


1차 오디션 통과? 합격? 아무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초등 2학년 애가 갑자기 대하드라마 2차 오디션을 앞둔 아역 배우가 된 순간이었다.


2차 오디션은 방송국에서 치러졌다.

나는 또 빨간색 긴팔 티셔츠를 입고, 무슨 청치마 같은 것을 입고 방송국으로 갔다. 방송국에 가서 연예인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했다.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엄마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도 무슨 대단한 욕심이나 야망이 있던 게 아니고, 그냥 한번 해본 일인데 일이 점점 커지니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딱 곤혹이었겠다 싶다.


오디션 장소에 도착하니 사람이 정말 많았다. 엄마는 딸의 이름과 수험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아다가, 옷핀으로 나의 빨간색 긴팔 티셔츠에 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긴장은커녕, ‘옷에 구멍이 나겠군.’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큰 대기실에 다 같이 있으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게임이 안 되는 일이구나. 아역 배우라는 세계에 발도 붙여본 적 없는 9살 무지렁이와 그의 엄마(그녀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는 거기서 코 베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한복을 입고 다소곳이 북을 치는 소녀와 중절모를 쓰고 현란하게 탭댄스를 추는 소년. 그들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물을 먹이는 엄마들.


나의 빨간 티셔츠와 청치마와 포니테일은 저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망 가고 싶었다. 근데 못 갔다. 내 이름이 불렸기 때문이다.


몇 명의 이름이 더 불리고, 우리는 함께 오디션장 바로 옆 복도 벽에 서서 대기를 했다. 그때 내 앞에 있던 여자애가 말을 걸었다. 그 애는 머리에 핑크색 브릿지를 하고 반짝이는 실 같은 걸 붙이고 있었다. 예뻤다.


브릿지 소녀: 너 자기소개 어떻게 할 거야?

나: 자기소개를 해야 돼?

브릿지 소녀: 당연하지. (연기)학원에서 알려주잖아. 너 어디 학원이야?

나: 나는 눈높이만 하는데?

브릿지 소녀: ?


엄마한테 당장 달려가서 말하고 싶었다. 왜 나를 눈높이만 시켜놓고 여기에 데려왔느냐고. 나랑 같이 벽에 서있던 애들은 모두 연기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우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들”과 나였다.


일단. 자기소개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뭐라도 준비를 해야 했다.


준비를 마치자 어떤 언니가 그들과 나를 오디션 장 안으로 인솔했다. 내 앞에는 모르는 아저씨 1, 모르는 아저씨 2, 그리고 어떤 이모 또래의 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높으신 분들이었겠다.


하필 내가 맨 왼쪽에 서게 됐다. 그래서 맨 처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 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오연우이고, 나이는 아홉 살입니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도 거기서 엄마랑 왔습니다.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정말 많이 봅니다. 그래서 드라마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 가훈은 성실하게 살자입니다. 성실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 ???


정확하게 토씨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뭐, 저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버벅거리지 않고 준비한 말을 다 마친 나는 갑자기 뭔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버렸다. 아니, 이미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은 걸 보니 그전부터 자신감은 충만했던 것 같다.


그때 갑자기, 핑크 브릿지 소녀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브릿지 소녀: (별안간 웨이브를 하며) 춤도, (별안간 노래를 부르며) 노래도, (별안간 엄마!!!!를 외치며), 연기도 다 되는 ㅇㅇㅇ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연기 학원을 갔어야 했다. 나는 눈높이 국어에서밖에 자기 소개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그다음 남자애는 멜빵을 튕겨가며 탭댄스를 췄고(아까 대기실의 그 소년과 다른 인물), 또 어떤 여자애는 부채를 펴고 민요 같은 것을 불렀다.


이럴 거면 자기소개가 아니라 장기 소개라고 해야지. 갑자기 너무나도 창피했다.


다음으로는 대본을 읽으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대사가 적힌 종이를 받아서 보고 있는데, 아저씨 1이 말씀하셨다.


“오연우. 서희 1 대사 읽어보세요. 아니다, 서희 2를 읽어야 하나. 너 몇 살이냐?”


서희 1은 어린 최서희를 의미하고, 서희 2는 청년 최서희를 의미한다. 나는 9살이라서 굳이 따지자면 서희 1에 가까운데, 키가 커서 청소년기의 서희 2를 시켜야 할지 애매했던 거다.


서희 1 대사를 읽었다. 엄마한테 간다고 떼를 쓰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나름 1년간 방과 후 연극부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드라마를 정말 많이 봤기 때문에, 대사 읽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연우. 서희 2 대사도 읽어보세요. 서희 2는 조금

더 큰 언니처럼 읽어야 돼. “


큰 언니처럼 읽었다. 어렵지 않았다.


브릿지 소녀가 서희를 할 차례였다. 아저씨 2가 말했다.

“오연우. 이번에 ㅇㅇㅇ이가 서희를 하면 너는 상대역 어린 봉순을 해보자. 너는 봉순이도 맞겠다.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


저 말은 똑똑히 기억이 난다. “얼굴도 그렇고.” 얼굴이 까무잡잡해서 그랬을까. 암튼 대사를 슥 본 뒤 프로페셔널하게 읽어 냈다. 구수하게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말이다.


나: 아이고, 애기씨 그라믄 길상이한테 ~~~ 어쩌구 저쩌구.

아저씨 2: 역시 쟤는 봉순이가 맞아.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오디션이 끝났다.

오디션을 마치고 온 나에게 엄마는 어땠냐고 물었다. ‘나 빼고 다 연기학원을 다니더라.’ 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또 물었다. “너도 갈래?” 나는 대답했다. “아니,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던데?”


자기 장기 소개만 빼고는 내가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봉순이가 맞아.”라는 극찬까지 들었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 대단한 자신감 덕이었을까. 눈높이 국어식 자기소개가 차별화 전략으로 보였던 걸까.


나는 2차 오디션도 합격해 버렸다.


3차 오디션이 최종이었기 때문에, 하나 남은 걸 합격하면 나는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3차 오디션은 최종이라 그런지 시작하기 전부터 뭔가 달랐다. 집으로 드라마 오디션용 대본이 도착했다. 위로 넘기면서 보는, 갱지로 된 대본이었다. 아무 데도 공개하면 안 된다고 해서, 학교에 가져가 자랑하고 싶었는데 집에서만 봤다.


그리고 3차 오디션 전날 밤.

당시 남동생이 입원을 하고 있어서 외갓집에 맡겨졌던 나는 막내이모와 함께 대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지정 대사를 외워가야 해서, 이모가 상대역도 해주고 연기 지도도 해주면서 준비를 도왔다. 내일 가서 못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는 나에게 이모는 말했다.


“내일 가서 못해도 괜찮아. 너는 좀 아쉽겠지만 합격 못하는 것도 괜찮아. 어쨌든 내일 지나면 너는 sbs 방송국도 두 번이나 가보고, 최종 오디션까지 가본 경험이 남는 건데, 그것만으로 훌륭해 조카.“


말은 그렇게 해놓고, 우리 이모는 밤이 새도록 연기 연습을 시켰다.


다음날 이모 차를 타고, sbs 방송국으로 갔다. 이모는 물도 사주고, 대사도 맞춰주고, 화장실도 데려가고, 립글로스도 발라줬다.


무지렁이였는데. 오늘은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매니저까지 있는 아역배우의 모습이었다. 뭔지 모르게 떳떳한 기분이 들었다.


3차 오디션장은 지난번의 그것과는 크기부터 달랐다. 엄청나게 넓은 방 한가운데 동그란 단상이 놓여 있고, 큼지막한 카메라가 여러 대 있었다. 그 옆에는 아주 커다란 TV도 여러 대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TV는 처음 보았다.


2차 오디션까지 통과한, 매니저도 동행하는, 어엿한 아역배우인 나는 동그란 단상 위에 자신 있게 올랐다.


이제는 아는 얼굴이 된 아저씨들과 이모가 나를 보고 있었고, 새로운 얼굴들도 있었다. 모르는 할아버지 1, 2였다.


(아는) 아저씨: 씬 넘버 3 연기하시면 됩니다. 준비되면 시작하세요.


바로 그때, 내 앞에 있던 그 커다란 TV가 켜지더니, 더 커다란 내 얼굴이 화면에 보였다. 왼쪽 옆모습, 오른쪽 옆모습, 정면과 후면 모습까지.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다. 준비해 간 연기를 해야 하는데, 나는 화면 속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이모: 화면에 보이는 게 신기하죠? 카메라로 테스트해 볼게요. 준비한 연기 보여주세요.


자. 이제 밤새 연습한 연기를 선보일 시간이다.


나: ...


선보일 시간이다.


나: ...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뇌가 일을 하지 않았다. 입에게는 대사를 읊으라고, 눈한테는 눈물을 흘리고, 얼굴 근육에게는 열심히 움직이라고 명령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이놈의 뇌가 파업을 선언한 거였다.


할아버지 1: 대사 까먹었으면 대본 다시 확인하고 해 보세요.


주섬 주섬 대본을 꺼냈다. 다시 대본을 내리고 숨 한번 들이쉬고 첫 대사를 내뱉었다.


나: 넌 누구냐! ... 넌..!



“대사를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무지렁이냐!라는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했다.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연기는 보여주지도 못했다.


딱 도망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나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아까웠다. 단상 위에 올랐는데, 뭐라도 하고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저, 대본 보고 읽으면 안 되나요? 그건 잘할 수 있어요.


그때 가만히 있던 할아버지 2가 말했다.


할아버지 2: 누구는 오연우 양 같은 친구를 당돌하다고 좋게 봐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왜 나를 만났어요 그러게. 다시 외워보든지 아니면 나가세요.


나: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망쳤다.


도망쳐서 나온 곳에는 나의 든든한 매니저, 이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는 잘했냐고 묻지 않았다. 잘했다고, 좋은 경험한 걸 축하한다고 말해줬다.


당연히 나는 최종 합격을 하지 못했다.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도 되지 못했다.


대신 매주 드라마 토지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열혈 시청자가 되었고, 그 기세로 박경리 선생의 청소년 토지를 섭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고나서 적은 독후감으로 글짓기 상도 받았다.


인생 두 번째로 겪은 포기의 경험은 꽤 씁쓸했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오디션에서 대사를 잘 외우고, 눈물을 잘 흘렸다면 합격했을까 하고.


아마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SBS 토지의 서희 역은 배우 신세경이 맡았고, 봉순 역은 티아라 함은정이 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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