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 달 살기를 하던 중, 우리는 사누르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 수영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5~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외동딸인 그 아이는 아빠와 함께 튜브를 가지고 즐겁게 놀곤 했다. 우리 아이들도 아빠와 같이 혹은 아이들끼리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어느 날 그 꼬마는 우리 아이들의 튜브에 관심을 보였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호주에서 온 가족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아이들과 그 꼬마는 수영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첫 외국인
우리 아이들은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고 '엄마표영어'로 영어영상을 보고 영어책을 읽어왔다. 그 아이는 우리 아이들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외국인이었다. 어느새 꼬마의 아빠는 선베드에 누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우리 아이들은 자연스레 그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외국인과 함께 노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도 나는 매일 신기하고 놀라웠다. 우리 아이들이 수영장에 먼저 나와 있으면, 그 꼬마는 자기 방 발코니에서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곧장 내려와 함께 놀았다. 세 아이가 함께 노는 모습을 보며 수영장에 있던 다른 어른들도 말을 걸곤 했다.
어느 날은 독일에서 온 아이가 다가와 "Can I play with you?"라고 묻더니, 네 명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조용한 성격의 우리 아이들이 외국에서 낯선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아이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엄마표영어'로 지내온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영어학원을 보내지 않아서 걱정했던 남편도 내 방식이 옳았다며 상당히 기뻐했고, 나 역시 흐뭇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제 아이들이 슬슬 다음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획했던 '엄마표영어'의 마지막 단계는 해외 영어캠프였다. 충분히 인풋이 쌓인 후, 2~3개월간 집중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필리핀 캠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필리핀의 영어캠프를 검색해 보니, 숙소의 컨디션에 비해 비용이 비싸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편 또한 필리핀의 치안문제를 걱정하며 반대했다. 이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영어캠프를 알아보았다. 단기간 몰입해서 영어를 배우러면, 오래 운영되고 체계가 잘 갖추어진 기관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한국인 원장님이 운영하는 학원을 찾게 되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영어캠프
이번 캠프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영어공부'라는 목적을 가지고 해외로 나간 첫 경험이었다. 학원의 겨울방학 영어캠프는 한 반에 최대 1:6의 소규모 그룹으로 운영되었고, 우리 아이들 반에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일본이나 중국 학생들도 있긴 했다.) 수업은 대부분 말레이시아 현지 선생님들과 다른 국가 출신의 선생님들이 진행했다.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30까지 어휘, 문법, 리딩 수업이 이어졌고, 점심식사 후에는 라이팅수업으로 마무리되었다. 점심은 학원에서 신청한 한식 도시락을 배달받아먹었는데, 두 아이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처음으로 영어학원에 다니는 경험이었기에, 수업 시간이 길어서 아이들이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혹시 그만두고 싶다고 할까 봐 초반에는 긴장도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두 아이 모두 힘들다는 말 없이 숙제도 스스로 알아서 했다. 모든 레벨의 반에서 공통적으로 매일 '단어 10개 암기 + 예문 만들기' 숙제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숙제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1호는 학교보다 학원이 더 재미있다며 즐거워했고, 2호도 역시 학원 생활을 즐겼다. 라이팅을 어려워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의외로 두 아이 모두 라이팅 시간을 좋아했다. 이때 다양한 형식의 라이팅 경험이 지금 국제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학원 다닌 지 2주가 지났을 무렵의 글이다. (2022년 12월)
1호가 다니는 반에서는 1호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베트남 국제학교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다. 어느 날 1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나도 국제학교 다닐 수 있어? 나랑 영어실력이 비슷한데 다들 국제학교를 다닌대. 솔직히 내가 좀 더 잘하는 것 같은데..(웃음) 우리 반에서 나 빼고 전부 국제학교 다닌다고 하니까 좀 궁금해지네."
반 친구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국제학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에는 국제학교가 약 200개가량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고, 학비도 천차만별이었다. 학교의 시설이나 원어민 교사의 비율에 따라 학비가 결정되는 듯했다. 각자의 경제 상황에 맞춰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유학원을 통해 상담을 받았고,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세 곳의 국제학교를 직접 방문하기로 예약했다. 학교 투어를 하는 동안 관심이 없던 2호와 남편도 진지하게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학교 투어를 해보니 영미권이 아닌 동남아의 국제학교도 내가 막연히 꿈꿔왔던 '영어환경 노출'에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학교는 비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제는 학비가 아닌 '비자'였다. 말레이시아는 아이가 둘이라도 부모 중 한 명에게만 가디언 비자가 발급되었기 때문이다. 기러기 부부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던 우리는 해외살이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영어캠프가 끝난 후, 우리는 예정대로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치앙마이
2018년 아이들과 함께한 첫 한 달 살기는 치앙마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힘들었던 나의 마음을 치유해 준 도시였기에 치앙마이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겨울방학 내내 영어공부하느라 애쓴 아이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영어캠프가 끝난 후 10일간의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했다. 운명이었을까? 우리가 머무는 기간 동안 '치앙마이 국제학교 박람회'가 열렸다. 국제학교들에 대해 미리 검색한 후 두 곳을 선택해 상담을 했고, 각각 학교투어를 진행하기로 했다. A학교는 미국식 교육을, B학교는 영국식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였다.
약속한 날 학교들을 방문해 투어를 진행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입학시험 비용이 아이당 30만 원이었기에 시험을 보지 않았지만, 치앙마이에서는 시험 비용이 10만 원이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국제학교에 입학할 경우 어느 학년에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시험을 통해 실력을 확인해보고자 했다. 아이들이 경험해 본 영어 교육은 10주간의 영어캠프가 전부였기에, ‘나이에 맞는 학년에 입학할 수 있을까? 학년을 낮추면 입학이 가능할까? 잘 보면 ESL 과정을 조건부로 해서라도 입학이 가능할까?’라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A학교에서는 컴퓨터로 영어와 수학 시험을 봤고, 결과는 즉시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두 아이 모두 ESL 과정 없이 나이에 맞는 학년으로 바로 입학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정말 이게 가능하다고?”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담을 해주신 한국인 선생님이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나 봐요.”라고 말씀하셔서 우리 부부와 아이들 모두 웃음이 나왔다. 이 경험 덕분에 아이들은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크게 얻었다.
Connecting the dots
우리 가족 마음에 들었던 곳은 영국식 학교인 B학교였다. 컴퓨터가 아닌 페이퍼로 영어와 수학, 과학 시험을 봤고, 인터뷰까지 마친 후 일주일 뒤에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치앙마이를 떠나기 마지막 날 밤, 1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만약 B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그 학교에 꼭 다니고 싶어."
그 말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일주일 뒤, 한국으로 돌아와 ESL과정 없이 나이에 맞는 학년으로 입학이 가능하다는 합격 통보를 이메일로 받았다.
만약 발리 한 달 살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영어캠프를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국제학교 투어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의 마음에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 옳다.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