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와는 다른 일 년 살기
다음날 아침 9시에 집과 자동차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잠에서 깨니 허리가 뻐근하고 등이 결렸다. 조리도구가 없어 아침을 해 먹을 수 없었고, 인터넷도 없으니 배달 주문도 불가능했다. 결국 굶은 채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8평짜리 작은 집에 28인치 캐리어 3개와 이민 가방 1개가 거실을 차지하고 있으니 짐부터 정리해야 했다. 캐리어와 가방 속 짐을 모두 꺼내놓으니,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이 작은 집에 이렇게 많은 짐을 가져온 내가 잘못한 걸까, 수납할 가구도 없이 집을 렌트한 오너의 문제일까.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런 곳에서 1년을 살아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달 살기를 네 번 해보고, 세 달 살기도 해 보니 자연스레 일 년 살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동안의 경험 덕분에 어디서든 잘 적응할 자신도 있었다. 불편한 점이 있어도 이내 곧 적응했으니까, 까다롭고 예민했던 내가 어느새 둥글어졌다고 믿었다. '처음이라 불편한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속으론 괜찮지 않은 내 모습이 낯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여행으로 왔을 때도 콘도의 상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오히려 좋게 느껴졌었다. 달라진 건 결국 내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 달, 세 달'이라는 한정적인 기간만 머무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돌아갈 내 집이 있었기 때문에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 년'이라는 기간에 마침표를 찍고 나니,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이케아에서 봐두었던 제품들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이토록 간절하게 택배를 기다린 적이 있었을까? 남편과 아이들이 차례로 책상, 책장, 선반을 조립하고 적당한 곳에 배치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간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주문했던 스탠드 조명을 켜니 방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폭신하고 안락한 토퍼를 침대 위에 올려 다 같이 누워 깔깔거리며 행복해했던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집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게 된 시간들이었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갈등이 지나고 나니, 비로소 감사함이 찾아왔다.
우리가 여행을 특별하게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일상과 다른 낯선 환경과 경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한정된 시간' 덕분이지 않을까. 언제 또 이런 시간이 주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외여행이 특별했던 건 그곳이 낯설고 새로웠기 때문이지만, 막상 그곳에서 내 삶이 시작되니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 살던 집과 비교하면 불편한 점이 더 많은 이곳이지만, 이제는 매일 수영장을 바라보며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의 상황에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나 자신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