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현재 나는 n년차 기자다.
언제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굳이 기억해 내려고 애쓰진 않았다. 'When(언제)'보다는 'Why(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때, 정말 우연한 계기로 내 꿈의 시작점을 알게 됐다. 그것은 친구 따라 재미로 떼 본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였다.
생기부에 적힌 나의 진로희망은 1학년 방송기자, 2학년 광고기획자 혹은 기자, 3학년 광고기획자였다. 부모님의 진로희망에는 1학년 중등교사와 기자, 2학년 방송기자, 3학년 방송기자였다.
광고기획이라는 꿈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기자가 되고 싶었다니. 게다가 재미로 SNS에 올린 생활기록부를 본 동창이 남긴 댓글은 나를 더욱 놀랍게 했다.
나도 기억해. 너 기자 하고 싶었다는 거
내 꿈이 기자였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기자는 내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장래희망이었다는 거, 그 시절 주변에 알릴 만큼 바랐던 꿈이었단 거다.
When에 대한 답은 찾았다. 그렇다면 Why, 왜 하필 기자였을까.
기자가 되고 싶었단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이유를 알리 만무하지 않나.
다만 취업을 준비할 때 '왜 언론사에 지원하셨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준비한 나의 답은 기억난다.
보통 누군가 '왜 기자가 되셨어요'라는 물음에 나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한다. 면접에서도 이 한 문장을 300자 내외로 풀어 설명한다.
이러한 답에 대한 다음 질문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글 쓰는 직업이 꼭 기자만 있는 건 아닌데, 왜 하필 기자예요?
솔직한 내 마음은 별 이유 없었다. 모든 선택에 반드시 특별한 이유가 따르는 건 아니니까.
그저 멋있어 보였다. 일반 회사원이라면 불가능한, 기자 타이틀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거 같았다. 남들이 모르는 걸 내가 가장 먼저 알았을 때, 그것이 무언가 작은 변화를 일으켰을 때 오는 성취감과 짜릿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다.
생계를 생각하면 돈도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안정적인 월급이 필요했다. 그래서 책 혹은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 집필은 선택에서 배제됐다.
성공하면 큰돈을 벌고 유명세도 타겠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래도 기자는 어딘가 소속돼 글 쓰고, 따박따박 월급 받으며 부유하진 않아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단하진 않지만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분명했다.
'학창 시절 제 장래희망은 기자였고요, 열심히 노력한 끝에 그 꿈을 이뤘습니다'라는 아름다운 과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나는 지금 꿈을 이룬 사람이 됐다.
그래서 꿈을 이뤄 행복하냐고?
절반은 맞고, 절반은 아니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으로부터 얻은 만족감은 상당하다. 그것은 행복으로 귀결됐다.
다만 내가 동경한 기자로서의 삶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컸다. 그 괴리감은 해를 거듭할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커져가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행복과 동떨어지기도 한다.
행복의 기준선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는 끝나지 않을 듯하다.
*오로지 글쓴이 기억에만 의존해 작성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