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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Nov 18. 2022

하늘을 걷는 시

―문보영의『책 기둥』(민음사, 2017)을 읽고       

                                                                          

문보영 시인은 김언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친구가 바닥에서 뭔가를 집으며 앞사람에게 ‘이거 놓고 가셨어요.’라고 외치는 거예요. 그것은 좌석 아래 삐져나온 노란색 구명조끼였습니다. (중략) 진짜 그 사람이 떨어뜨린 구명조끼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명조끼를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구명조끼를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관점은 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며 시인이 평면적으로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면을 꿰뚫어 보는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 시들은 균형을 이룬다.  


「입장 모독」에서 ‘신’은 절대적이거나 엄숙하거나 전능한 ‘신’이 아니다. 우리와 친숙하거나 결핍이 많은 ‘신’이다. 신이라면 평등하게 빵을 나눠 줘야 하는데 신도 편견을 가지고 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에게 빵을 준다. 12가지의 입장 모독으로 빵을 받지 못한 인간은 신에게 항의한다. 왜 공평하게 빵을 주지 않냐고. 그것은 신이 스스로 신성 모독하는 게 아닌가. 공평하지 못한 신과 소원만 기원하는 인간 모두를 동시에 유쾌하게 비웃는다.


‘애인이 떠날 때 마음이 아니라 뇌를 두고 떠나’니(「뇌와 나」)그 이별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 갈아 마실 수도 있는 뇌가 “실제 본 것보다 더 많이 기억하는 것은 뇌가 지닌 유일한 결함이다.”라고 말하는데 과연 결함일까? 이익 아닐까? 그것은 결함이다. 특히 이별 후의 기억은 내 마음대로 덧붙여 기억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시인의 꿰뚫어 보는 감각이 월하다. ‘비스킷 씹을 때 내게만 크게 들리고 상대방은 잘 들리지 않으니 밧줄을 이용하자.’고 한다. 소통이다. 뉴런이 끊어진 뇌가 아니라 뉴런을, 즉 밧줄을 연결하여 소통하자고, 바람이 드나들게 하자고 한다.

이 시에서는 ‘밧줄’이라는 소통을 말하지만,「벽」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벽을 느끼고 결국은 ‘벽을 앓아 자기만의 집을’ 만들 수밖에 없다. “꽃이 펴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를 ‘위로조로 읽어야 하는지, 공포 조로 읽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은 ‘벽을 뚫으면 또 벽이 딸려 나오’듯 “개과천선해도 봄은 봄이” 듯 설득을 해도 타인과 나 사이에는 벽이 있다. 나를 이해 못 하는, 내가 이해 못 하는 벽이 있을 뿐이다. 결국 ‘벽은 벗어도 벽이 ’된다.  


‘새벽 2시는 잠들어 있는데 나는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고(「불면」)말하는 화자의 불면은 분명 섬뜩한데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이 다른 이 발이길’ 바라는 마음은 애잔하다. 유체 이탈하여 잠 못 드는 자신을 바라보며 다시 ‘내 옆얼굴에 기대 잠을 청하지만, 집요하게 아침은 밝아 오는’ 날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죽을 만큼 깊은 잠이 행복이란 걸.  


이 시집에는「공동창작의 시」,「파리의 가능한 여름」,「과학의 법칙」,「N의 백일장의 풍습」,「모기와 함께 쓰는 시」,「빵」,「시인과 돼지」등 메타 시가 많다. 김언 시인의 시집『모두가 움직인다』에도 메타 시가 다수 있는데 김언은 교수자가 되어 시에 관한 텍스트를 보여준다면, 문보영은 화자의 화자로 시속에 들어가 직접 시를 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서사적인데 뒤죽박죽 서사다. ‘기발하다’ ‘새롭다’ ‘재밌다’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대신 ‘이게 뭐지?’ ‘불편하다’ ‘독자를 놀리나?’라는 느낌도 든다. 방언을 쏟아부어 놓고 ‘당신 맘대로 해석해’라고 말한다. “눈을 질끈 뜬 듯이”(「도로」) 뇌를 질끈 쪼여도 뉴런들이 끊어지듯 시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뭐 이래?’ 하면서 읽다 보면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는 고소한 앙금을 맛볼 수 있다. 그의 시는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으며 존재를 다층적으로 바라보고 어느 한 면만 애정 하지 않는다. 공평하게 사랑을 주는 따스한 시다. 신, 시체,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친숙한 일상이며 삶의 연속이다. ‘누군가 행복하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누군가 슬퍼진다’고 한다.(「지나가는 개가 먹은 두 귀가 본 것」) 그렇다면 내가 굳이 행복하지 않아도 되겠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음을 슬퍼할 필요 없겠다. 시집을 덮으며 “끝”하고 발음해 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웃는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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