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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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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 Jul 28. 2023

우연히, 행운

일상조각_05


일상이 팍팍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물을 찾듯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목적지였던 뮈렌으로 가기 위해 라우터브루넨이라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라우터브루넨은 높다란 절벽으로 둘러진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아담한 마을이다. 얼핏 보기에도 예쁜 경치에 눈길이 갔지만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었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강력한 끌림을 좀처럼 떨쳐버리기 어려워서,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이 마을을 조금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남편은 이곳의 폭포가 유명하다며 함께 폭포를 구경해보자고 했다.



아주 높은 절벽에서 가느다란 폭포 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극적인 풍경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인상 깊은 장면으로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진짜는 이다음부터였다. 원래도 현관과 마당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집들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라우터브루넨은 유독 귀여운 장식들이 많았다. 공장에서 깔끔하게 만들어 판매하는 그럴싸한 장식품보다, 어딘지 모르게 투박함이 느껴지는 물건들이 더 많았다.



여기저기 눈을 돌릴 때마다 아기자기함과 재치가 가득했다. 원래 귀여운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정말이지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멋진 사실은, 배경에 펼쳐진 자연경관과 이 인위적인 물건들이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갔던 시기는 11월 말이라,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기 시작하는 시즌이었다. 벌써부터 마을 구석구석 가판대와 데코 소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리스 같은 인테리어 소품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다양한 물건들을 사이에 두고 마을 주민, 상인,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제법 축제 분위가 났다.



우리는 심사숙고 끝에 융프라우 산맥 모양으로 바닥이 솟은 유리잔 두 개를 구입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던 핫도그도 사 먹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핫도그로 기억될 만큼 아주 환상적인 맛이었다.



마을 가운데쯤에서는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무쇠 솥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와인에 과일과 계피 등을 넣고 끓이는 ‘뱅쇼’를 만들고 있었는데, 구경하던 우리에게도 갑자기 잔을 채워 건네주었다. 이걸 마시면 멋진 밤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농담으로 시작된 짧은 대화. 대부분의 이야기는 마을에 대한 설명이었다. 저녁이면 여기 걸어놓은 전구들이 모두 켜질 텐데 정말 아름다울 거라고 말하는 아저씨의 표정에서 마을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졌다.



“라우터브루넨이 이렇게 멋진 줄 알았더라면 여기에 숙소를 잡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을을 떠난 우리. 다음에 또 스위스에 오게 된다면 꼭 이곳에 머물자고 이야기했다.




목적지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가장 좋았던 여행지로 남게 된 라우터브루넨. 갑작스레 받은, 내 취향에 딱 맞는 선물 같은 기억이다.


이 날의 행운은 언제고 또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다.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가 아닌 평소와 같은 날, 내 익숙한 삶의 터전 속에서도. 그래서 일상이 유독 팍팍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그날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소원한다.

내 일상의 라우터브루넨을 마주하기를. 그래서-

꼭 그날처럼 내 일상을 뜻밖의 기쁨으로 채워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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